뫼비우스 띠에서 배우는 지혜
공자맹자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분들의 주장이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석가 마호멧의 주장들도, 각각의 종교단체는 다른 해석이나 곡해를 한다.
이같은 사실들은 세상에는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으로 풀이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나, 그의 제자인 플라톤 등의 주장들도 그리스의 선민의식하에서 이루어진 관념들이기 때문에, 이를 절대적인 사상이나 철학서의 텍스트가 된다는 주장은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세상사는 방법은 오롯이 자신의 주관이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순리이고 상식이라는 생각이다.
조금 좁혀서 생각해보면,
아직도 매듭을 풀지 못하는 장애인복지의 문제점도 정부나 장애인단체의 주장 모두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는 피차간에 아전인수적인 주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호, 자신들의 주장만이 절대선善 이라는 강박에 가까운 주장들로서는 복잡하고 난해한 현재의 장애인복지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일은 부지하세월이라는 것이다.
이의 해법으로, 정부나 장애인단체가 서로 앞 서의 지적처럼 자신들만의 주장이 절대적이라는 옹 고집스러움을 과감하게 버리고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철학적 관점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현재처럼 “너 죽고 나 살자” 는 극한의 주장을 벗어난 “ 너도 살고 나도 살자”라는 쌍방이 웃으며 손을 맞잡을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 자극(장애인)과 반응(정부) 사이의 공간이 텅 비어있는 것보다는, “절대적 선은 없다” 라는 철학적 개념이 그 빈공간에 자리한다면 쌍방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과 그 기능을 충분하게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도 정부와 장애인단체의 대립은 아직껏 소모적인 버티기로 일관하는 중이다.
상호 단 한발짝도 물러설 기미가 없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라는 고차적 방정식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고집불통의 면모를 여지없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곧, 정부나 장애인단체 공히, 현명한 업무나 일 처리 와는 영 거리가 먼 듯 보인다.
세상천지에 유아독존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예수나, 마호멧, 석가조차도 상호 인정하지 않으려는 게 현실이고 사회 세상이다.
하물며 장애인복지에 대한 접근방식에 절대적인 방안이 어디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걸음씩 양보하며 자신들의 뒤를 돌아보는 혜안으로 문제를 풀어간다면 백발백중 해법이 나온다는 데 필자의 모든 것을 건다.
극과 극은 상통하는 법이다. “뫼비우스의 띠”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