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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임화」 연재를 시작하며
이형권
다시, 임화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임화를 다시 호명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삶과 사회에서 유리된 오늘날의 자폐적이고 상업적인 문학을 넘어서기 위해서다. 요즈음 문학 현실은 문학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임화의 열정 혹은 청년 정신이 요구되고 있다. 그가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였다는 이념적 성향은 중요하지 않다. 이념 선택의 문제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으로 돌아가 그 동기와 함께 다시 물어야 할 일이다. 지금 이 시대의 논리로 그 시대의 이념 선택을 문제 삼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근대문학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불살랐다는 점이다.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나 1953년 평양에서 45세의 나이로 처형될 때까지, 그는 한순간도 머뭇거림 없이 문학의 불길을 향해 부나비처럼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임화는 시인이자 비평가, 문학운동가, 문학사가, 출판인, 영화배우였다. 한국 문학사 혹은 한국 문화사에서 이처럼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살다간 인물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당대 문학뿐만 아니라 근대문학사에 관해서도 많은 관심과 성과를 보여주었다. 임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이고 하나의 문학사이다. 그래서 임화의 생애를 살피는 일은 한 개인을 넘어서 한국 근대문학사 전체를 새로이 발견하고 성찰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때 리리시즘이나 다다이즘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장 집중적으로 추구한 문학적 이념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였다. 계급적, 국제적 연대와 혈연적, 국내적 결속 사이에서 임화는 비판과 성찰의 정신으로 그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임화의 문학적 생애 가운데 이번 호에는 임화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한다. 관련 자료가 매우 부족한 형편이지만 임화의 탄생 일화나 그가 태어난 1908년을 전후한 시대적, 문학적 배경을 설득력 있게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가능하면 엄정한 학술적인 논의보다는 교양 차원에서 대중성과 서정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집필 과정에서 전체적으로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삼았지만, 부분적으로 필자의 상상력과 비평적 판단을 덧붙였음을 밝혀둔다. 글의 성격은 평전의 형식이 될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의 비극과 열정을 오롯이 상징하는 임화의 삶에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해 본다.(필자 주)
임화의 탄생과 그 시대 이야기
-첫울음, 종로에서
임화(1908∼1953)
이형권(문학평론가)
“네가 태어났을 때, 네가 울고 세상이 기뻐했다. 네가 죽을 때, 세상이 울고 네가 기뻐할 수 있도록 세상을 살아라.”―체로키족(Cherokee) 격언
1908년 10월 13일, 서울은 을씨년스러웠다. 10월의 날씨 탓도 있었지만, 을사년의 망국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던 탓에 싸늘한 기운이 서울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아기 임화가 태어나던 그 날, 스산한 바람이 부는 서울 한복판 종로의 낙산(駱山) 아래 작은 골목에서 낭랑한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응아, 응아, 응아앙∼” 골목 깊숙한 곳의 작고 초라한 집에서 울려 퍼지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는 골목 담벼락을 타고 종로 사거리 큰길로 퍼져나갔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맑고 청아하면서도 어딘가 끈질긴 데가 있었다. 유난히 낭랑하고 슬픈 목소리가 좁은 골목을 울림통 삼아 먼 하늘로 퍼져나갔다.
낙산 아래의 동네 사람들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평범하지 않다고 느꼈다. 아기 임화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고, 임화(林和)는 필명이다. 그는 임화(林和) 외에도 임화(林華), 성아(星兒), 철부(鐵夫), 김철우(金鐵友), 임유(林唯), 청로(靑爐), 쌍철대인(雙鐵台人), 다림다(DA林DA), 임다다(林DADA) 등 다양한 필명 혹은 예명을 사용했다. 본명을 포함하여 이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던 이름이 임화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명칭을 기본으로 사용한다.
의 울음소리는 낙타산(駱山)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사막을 걸어가는 어린 낙타의 울음소리를 닮은 듯했다. 아기 임화의 첫울음은, 한 생명으로서 세상과 처음 맞이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사막과도 같은 고달픈 인생길 앞에 선 슬픔의 표현이었다. 이 슬픔은 앞으로 펼쳐질 아기 임화의 삶에서 휘발성 감정을 넘어 가슴 깊이 새겨진 정동(affect)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기 임화의 슬픔은 일제 강점기 혹은 타락한 자본주의 시대라는 어둠 속에서 인생을 출발하는 한 인간의 하릴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울면서 세상에 태어난다. 한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체로키족의 격언대로 세상이 기뻐할 위대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는 제일 먼저 어머니가 동참하고, 이어서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친인척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함께 등장한다. 그 울음의 주인공은 먼 훗날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남은 사람들이 크게 울어줄 것을 바라면서 살아가게 된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스스로 울면서 태어나 남은 사람들의 울음을 이별 노래로 삼아 생명의 원적지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울음으로 태어나 울음으로 떠나가는 인생, 한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다간 인간 임화도 예외일 수 없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가 떠나는 순간 혹은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위해 뜨겁게 울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궁금증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서울의 동쪽에 자리 잡은 낙산은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 북쪽의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분지를 형성하는 4대 산으로 불린다. 임화가 태어난 낙산 아래는 오늘날의 동숭동(東崇洞) 지역으로서 행정적으로 이화동(梨花洞)에 속한다. 동숭동은 조선 시대 한성부(漢城府) 행정단위인 동부 12방의 하나인 숭교방(崇敎坊) 동쪽에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894년 갑오개혁(고종 31년) 때부터 이어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1914년 신대동, 하백동, 상백동, 쌍계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하여 탄생했다. 같은 해 9월에 경성부 동부출장소 동숭동이 되었다가 1915년 6월 출장소 제도가 폐지되어 경성부 동숭동이 되었다.
동숭동은 1936년 4월에는 일본식 지명인 동숭정으로 변경되었는데, 이 이름은 1943년 구제(區制) 실시 이후에 신설된 종로구의 동숭정이 되었다. 그러나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과정에서 정(町)이 동(洞)으로 바뀔 때 동숭동이 되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2009.
이후 1980년대에는 문예회관의 개관과 함께 다수의 소극장이 생기면서 오늘날 우리나라 연극과 대학 문화의 중심 무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임화라는 문제적인, 너무도 문제적인 인물이 탄생한 곳이다.
1908년의 종로, 그곳은 자본주의의 물신화를 비판하면서 밤하늘의 별빛과 같은 영혼을 찾아 헤매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종로는 임화라는 문제적 인물이 탄생하여 한국 문학의 역사에서 주연 역할을 담당하게 한 장소이다. 이때 문제적 인물이란 헝가리의 문학이론가 루카치가 말하는 근대 소설의 주인공과 다르지 않다. 임화는 별빛이 사라진 암흑과도 같은 세상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훗날 임화가 최초의 필명으로 성아(星兒)를 선택한 것과 이러한 시대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환하게 비춰주던 시대는 또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하고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Georg Lukacs, 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93, 29쪽.
임화는 창공의 별을 잃어버려 지도의 갈 길도 보이지 않는 불행한 시대의 시인이자 비평가였다. 그는 연속적 세계관을 상실한 현대인의 숙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자아와 세계의 불화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시대의 물신화를 비판하면서 타락한 사회 속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해 나갔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타락한 사회이고, 이러한 사회는 삶의 총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절박하게 인식하고 살았다. 그는 신성한 세계와의 일체감을 지향하는 신화나 서사시, 로망스의 주인공이 아니라, 타락한 부르주아 시대에 타락한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근대 소설의 주인공과 같았다.
임화의 출생과 관련된 사연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현재 가장 정확한 것은 북한에서 처형되기 직전 임화의 법정 진술문이다. “저는 1908년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4, 5세 때 아버지가 소기업을 경영하여 17, 8세 때까지 소시민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군사법정 판결문」(1953년 8월 3일∼6일)
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또한 임화 스스로가 어느 잡지를 통해 “출생일 : 1908년 10월 13일 경성에서 출생” 임화, 「자화상」, 조선문학 1933년 12월·1934년 1월 합병호. 인용문은 현행 맞춤법에 맞게 수정함(이하 마찬가지).
이라고 밝힌 것이 있을 뿐이다. 김윤식이 작성한 「임화 연보」에는 “서울 낙산 밑 소시민 가정에서 10월 13일 태어남. 가정환경이나 형제 관계는 알 수 없음.” 김윤식, 임화 연구, 문학사상사, 1989, 631쪽.
이라고 적혀 있다. 임화는 무신년(戊申年) 원숭이띠에 태어난 것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의 집안 환경은 “빈농의 집안”이라는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임화는 가계나 유년기의 성장 과정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임화 자신이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 남긴 것이 적을뿐더러 남북한이 오랫동안 공산주의자 혹은 미제 스파이라는 이유로 임화 지우기에 몰두해온 탓이기도 하다. 하여 그의 출생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은 있으나 체계적으로 이야기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임화를 주인공으로 하는 어느 실명 소설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여기 호적에 기재된 대로라면 임화의 조부인 임상호(林尙浩)는 임화가 태어나기 15년 전인 1893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어, 임화 출생 시점의 가족은 조모와 부모 합쳐 4인 가족이었어요. 이 호적은 1947년 화재로 멸실되어 세 차례나 재제되는 바람에, 조모의 사망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임화가 일곱 살 때인 1915년 호적의 성명난에 그때까지 ‘성명불상(不詳)’으로 비워져 있던 조모인 문(文)씨의 성이 처음으로 호적에 등록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무렵까지는 4인 가족인 듯해요. 따라서 임화가 독서에 열중하기 시작한 보성(普成)중학교 입학 시절쯤이 되면 잘 해야 4인 가족, 실제로는 3인 가족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영진, 바람이여 전하라, 푸른사상, 2002, 111∼112쪽
이는 소설의 한 부분이지만, 실명 소설이라는 부제를 생각하면 일정 부분 사실성을 담보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임화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그가 이북만의 누이동생 이귀례와 동거하면서 낳은 딸 혜란이 있다는 사실, 이후 이귀례와 이혼하고 이현옥(지하련)과 혼인했다는 사실 외에 달리 밝혀진 게 없다. 그런데, 이 글에 의하면 임화의 조부와 조모, 그리고 부모에 관한 정보가 제시되어 있다. 임화는 어린 시절 가족이 많지 않았다는 점, 그로 인해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는 점은 사실인 듯하다. 어린 시절의 고독은 자연스럽게 그를 독서의 길로 이끌었고, 그것이 결국 문학에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임화의 유년기에 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유년기적 삶이 그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실증적으로 논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위의 소설과 임화가 남긴 파편적인 기록들을 참조하건대 가난한 집안에서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계급으로 볼 때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었는데, 이는 장차 카프 문학에 흥미를 느끼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가난은 당시 사회에 대한 불만과 혁명 정신을 싹을 틔우는 데 정신적 자양 역할을 했다. 자고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열정은 계급적 적실성이 담보될 때 더 뜨겁게 타오르기 마련이다. 세계의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이 그러한 속성을 말해준다. 고리키가 그랬고, 존스타인백이 그랬고, 임화가 또한 그러했다.
임화가 태어난 1908년의 한반도 정세는 세 해 전에 을사오적이 조선의 국권을 차례로 일제에 넘겨주면서 망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이 격변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민요의 가사를 바꾸어 부르면서 망국 전야의 울분을 표현하였다. 당시 개작 민요는 더 이상 국가와 전통을 지켜낼 수 없었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오적대감이 생겨나서 신조약 성립이 된 날부터
이등통감이 나온 후에 별별 수단이 다 생긴다
화폐개량을 한답시고 지정권리 빼앗으며
전유인계를 한다하고 통신기관을 빼앗으며
숙청궁금 한다 하고 궁문파수를 세운 것과
경찰실시 한다 하고 순사 천명 걷어오고
이민조례를 실시한다 외국출입 엄금하고
시정개선을 한다 하며 고붐고좌를 거빙하며
목축장과 군용지로 생민전토를 특탈하여
우리는 꼼작 못할지니 좋구나 매화로다(「매화타령」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30일(근대계몽기시가 자료집 1, 성균관대학교출판부, 51-53쪽.
전문)
이 작품은 개작 민요로서 을사늑약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고 있다. “매화타령”은 원래 경기민요로서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지만, 이 민요는 식민지가 되어가는 조국의 어수선한 상황과 일제를 향한 저항의 내용으로 개작되었다. 여기서 “오적대감”은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 즉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 등을 일컫는다. “신조약”은 바로 그 을사늑약을 의미한다. 1908년 전후의 시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매국적 인물들이나 을사늑약에 대한 비판적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다.
또한, “이등통감”은 을사늑약을 강제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대한제국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이 되어 조선의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를 뜻한다. 그가 추진한 조선의 식민화 정책은 여러 수단(“별별 수단”)을 동원하여 강압하고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조선인들에게서 정신적, 물질적 자산을 모두 빼앗고, “순사”를 통해 감시하면서 외국 출입마저 엄격히 금지(“외국출입을 엄금”)하는 등의 혹독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다. 이 민요는 그러한 일제의 식민화 정책에 대해 “좋구나 매화로다”라고 하여, 기쁨의 노래를 슬프게 부를 수밖에 없는 반어적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1908년 즈음의 조선 사람들은 망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냥 슬픔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서양과 일본의 근대 문물이 조선 땅에 이미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배척할 것인지 개화파와 척사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갈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을사늑약 이후 그러한 갈등은 일본의 근대화론과 맞물려 소위 개화파의 노선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그러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터였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 좇아 변하지 않고 못 살겠네
겨울에도 베 것 입고 오정에도 불 켤손가
때를 좇아서 변할지오 형편 보아서 고치시오
옛 법만 좋게 알다가는 야만인종을 못 면하네
에에에에에 에야지어라 방에로고나(「방에타령」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4일
전문)
이 노래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 좇아”야 한다는 점, 즉 과거의 문물과 제도를 버리고 근대적인 문물과 제도를 좇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은 겨울에 베옷(“베 것”)을 입고 한낮(“오정”)에 불을 켜는 일과 같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한다. 풍속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 고치는 일이 소중하므로, 과거의 법도(“옛 법”)만을 긍정하는 사람은 “야만인종”이나 다름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개화기 혹은 계몽기의 조선인들이 간직했던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서구의 근대문명은 대부분 일본을 경유하면서 유입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근대화가 곧 일본화라는 기괴한 등식이 가능했다. 이 시대는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저항이라는 민족사적 과제와 근대문명의 도입이라는 시대사적 과제가 동시에 압박하고 있었다.
1908년의 문단 상황은 근대화를 향한 변화의 물결 위에 있었다. 최남선이 종합잡지인 소년을 창간하여 최초의 신체시인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발표했다. 이 문학적 사건은 근대시 출발의 신호탄이었다. 이전까지 유행했던 개화 가사나 창가(唱歌)의 경직된 정형률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운율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소설은 이미 1906년에 「혈(血)의 루(淚)」라는 신소설 형식을 확보하고 있어서 시보다 근대화를 향한 발걸음이 더 빨랐다. 따라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등장과 함께 한국 문학은 전근대적 양식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된 셈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근대문명을 상징하는 바다가 신세대인 소년에게 개화 계몽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를 보면 임화가 태어날 당시의 시대 상황뿐만 아니라 언어 환경까지를 살필 수 있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같은 바위 꼴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소년 창간호, 1908.
부분)
모두 6연으로 구성된 시의 1연이다. 이 작품의 바다는 거침없는 위력과 기개를 지닌 문명개화의 주체로 의인화되고 있다. “소년”은 바다의 대화 상대이자 동반자로서 문명의 개화를 실현해야 할 주인공이다. 이 시는 고전 시가에서 보기 어려운 의성어를 반복하면서 구체적, 감각적 표현을 성취하고 있다. 신체시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문명의 개화라는 새로운 내용을 7.5조를 기반으로 하되 자유율에 가까운 운율에 확보하고 있다. 아직은 근대적 의미의 자유시에 충분히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전근대적 시가를 극복하고 근대시 혹은 자유시 탄생의 모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의 사상적 배경은 낙관적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을 터, 1연은 바다(파도)의 위력적인 모습을, 2연은 바다의 용맹한 모습을, 3연은 바다의 강인한 모습 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후에 전개되는 4연, 5연, 6연의 경우도 바다가 보여주는 기개 있는 모습이나 하늘에 대한 동질감, 혹은 바다의 소년에 대한 애착심 등을 중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새로운 문물의 도래를 예찬하고 문명의 개화를 이룩하려는 의지를 중심 내용으로 삼고 있다. 이 시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하듯이, 새로운 개화 계몽사상을 신체시라는 새로운 양식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실린 소년 창간호의 머리말은 당시 개화 계몽이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는 이 잡지의 간행하는 취지에 대하여 길게 말씀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한마디 간단하게 할 것은/ 「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려 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 이 잡지가 비록 적으나 우리 동인은 이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으로 써 힘 쓰리라./ 소년으로 하여금 이를 읽게 하라 아울러 소년을 훈도하는 부형(父兄)으로 하여금도 이를 읽게 하여라” 위의 책, 3쪽.
는 문장이 그것이다. 우리나라가 새로운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소년의 나라” 즉 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년” 정신을 “교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근대적 계몽주의 사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당시의 시대정신뿐만 아니라 언어 환경도 제시해주고 있다. 임화가 태어나던 시기는 아직 국한문 혼용체의 시기로서 문법적인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1933년 조선어학회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보다 25여 년 앞선 이 시기의 언어 환경은 아주 혼란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임화는 한국어가 근대어로서의 조건을 충실히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태어나 훗날 근대문학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던 셈이다. 언어의 근대화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문학의 근대화를 추구했다고 하겠다.
최남선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통해 소년 정신을 강조하던 바로 그해에 임화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최남선이 내세운 소년 정신은 임화의 청년 정신으로 변용되어 새로운 문학,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혁명과 열정의 에너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임화의 사상은 니힐리즘, 다다이즘, 코뮤니즘, 민족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지만, 이들을 총체적으로 수렴하는 정신적 고갱이는 청년 정신이었다. 청년 정신은 도전의 정신이자 열정의 정신, 그리고 끝없는 변화의 정신이다. 임화는 일평생을 이러한 도전 정신으로 살다간 비극적 영웅이자 비극적 숭고미의 화신이었다.
임화의 청년 정신은 당시 한국이 처한 시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열정적 실천 의지와 관계 깊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라고 하는 민족적 수난기에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라고 하는 시대적 소명을 실천해야 했던 상황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정신이었다. 청년 정신은 도전적, 열정적 인간 임화가 선택한 최선의 정신적, 현실적 에너지였기 때문이다. 「우리 오빠와 화로」, 「다시 네거리에서」, 「암흑의 정신」, 「통곡」 등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청년은 그러한 정신적 에너지의 표상이다. 다시 말해 청년은 식민지 시대 청년 담론의 한 반영이자 개인적, 문학적 특성이 반영된 결과 유성호, 「‘청년’과 ‘적’의 대위법」, 임화문학연구회 편, 임화문학연구, 소명출판, 2009, 88쪽.
였던 것이다. 임화가 살다간 시대는 청년 정신을 요구하던 시대였던 만큼 임화는 그 요구에 가장 뜨겁게 호응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화의 청년 정신이 배태된 종로는 임화에게 민족적, 개인적으로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장소이다. 종로는 역사적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조선인의 저항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북촌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공간이자, 만민공동회 이래 민의의 공간으로 각종 사회운동과 저항의 공간이기도 했다. 정규식, 「일제하 종로의 민족운동 공간」, 한국근대사연구 26집, 2003, 90∼91쪽.
임화 개인적으로 종로는 태어나고 자란 고향으로서 시대 분위기를 실감하면서 사회적 자아가 형성되는 장소였다.
종로는 ‘임화’의 인큐베이터였다. 임인식이 보성고보 다닐 당시, 종로에는 온갖 사회단체가 극성을 이루었고, ‘신사회 건설’과 ‘계급투쟁’이란 구호가 난무하고, 이를 알리는 삐라와 벽보가 휘날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회가 열렸으며, 군중들은 노동가를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하다 공권력과 대치하고, 공방 소에 검속되고 재항의 집회가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학생 임인식은 이를 의식하지는 않았다. 임화는 학창 시절을 평화한 감상시대였다고 회고했다. …(중략)… 학창시절 종로에서 수시로 목격하고 감각한 집회와 시위 행진과 함성과 노래, 공방과 검속 등의 긴장 국면은 청년, 자유, 해방, 이상, 새로움, 유동 등 고열한 낭만성으로 전유된 것 같다. 그가 종로의 사상지리적 격동 속에서 감각한 것은 ‘신흥’이었다. 이 ‘신흥’에 접속하여 예술과 사상, 삶의 양식으로 자기 미래를 구상하려 했던 것이다. 정우택, 「종로의 사상 지리와 임화의 ‘네거리’」, 민족문학사연구 51호, 2013, 125쪽.
임화가 종로 출신이라는 점은 “인큐베이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삶과 문학적 방향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보성중학교 시절에는 종로의 사회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무의식에 작용하여 훗날 “고열한 낭만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낭만성의 중심에 “신흥” 정신으로서의 다다이즘이나 계급의식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이처럼 종로는 당시 우리나라 사회운동의 중심지로서 임화의 문학과 생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임화는 자신의 시에서 종로라는 지명이 여러 차례 호명하는데, 그때마다 종로는 그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종로를 배경으로 한 시는 「네거리의 순이」(1929), 「다시 네거리에서」(1935), 「9월 12일-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1947)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이 발표되던 1929년은 임화가 ‘단편 서사시’를 창안하여 프롤레타리아 시의 최고 절정기에 이른 때였고, 1935년은 카프가 해산를 해산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신념이 위협을 받던 시기였고, 1947년은 미군정의 남로당 탄압이 극심하게 되자 월북을 감행하던 시기였다. 이처럼 임화가 종로를 호명하던 때는 삶의 중대한 변곡점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그의 삶에서 종로가 얼마나 소중한 장소였는지를 알려준다. 첫울음의 장소인 종로, 그곳은 임화의 문학과 사상이 싹튼, 삶의 원적지이자 진보적 변화의 매개 장소였다. 종로, 그 하늘에 울려 퍼진 아기 임화의 첫울음은, 어두운 시대에 별빛을 찾아 나서는 문제적 인물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첫댓글 좋은 글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