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보문 : 삼상 15장 10-23절
설교제목 : 내 뜻과 하나님의 뜻
아름답게 색칠하기 위해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 주 오랜만에 정선의 1117m 높이의 민둥산을 다녀왔습니다. 이 민둥산은 정상 부분에 억새로 유명한 곳입니다. 억새의 하얀 가루는 대부분 떨어졌지만 베이색의 아름다움은 여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파른 길을 오르며 산행하며 마주쳤습니다. 3시간 정도의 산행을 하면서 체력이 얼마나 저하되었는지 반성했고,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자연이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며 모든 것을 비워내듯,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비워내고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논어의 “팔일(八佾)”편에 대하여 지난 여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팔일이란 뜻은 가로 세로에 각각 여덟 줄로 서서 64명이 추는 춤으로 천자가 사용하는 의식을 가리킵니다. 팔일편은 공자가 사대부의 집안에서 천자의 예법을 사용한 것을 지적하며 진정한 예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팔일편에 보면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다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바탕을 하얗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무늬와 그림을 넣어야 함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논어에서 마음의 형식적 표현인 예도 바탕이 이루어진 다음에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합니다. 회사후소가 되지 않고 그림만 그려 넣으려고 하면,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치중하게 되고, 마음을 살피지 않고 거만한 마음을 지닌 팽창적 삶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색칠하기 위해서는 흰 바탕을 만들고, 거기에 색을 더하며 무늬를 더하는 일이 중요함을 마음에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급함과 과한 열심
사울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었지만, 바로 태평성대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주변국과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새로운 왕을 뽑고 군대를 결집하자 블레셋은 이를 깨뜨리기 위해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에서 사무엘은 사울 왕의 행동에 대하여 질책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울 왕이 아닌 주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합한 사람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13:1-14) 사울왕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질책을 받고 다른 왕을 세우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이스라엘 군대를 포위하자 혼비백산하여 굴과 바위, 숲으로 피해서 숨었습니다. 사울은 길갈에 머무르며 사무엘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7일을 기다리는 동안 사무엘이 오지 않자, 백성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사울은 사람들을 시켜서 제사를 직접 주도하여 드렸습니다. 사울이 막 번제를 드리려고 하는 순간, 사무엘이 도착하였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왕이 맘대로 제사를 드리냐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제사장의 고유권한임에도 왕이 임의대로 번제를 드리려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아서, 주님께 은혜와 도움을 구하기도 전에 블레셋이 우리를 칠까봐 번제를 드렸다고 변명합니다. 사울의 변명은 언뜻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의 제사를 가리켜,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사울의 잘못과 실수는 무엇일까요? 사울의 마음 속에 있는 조급함과 과한 열심입니다. 7일을 꽉 채워서 기다리지 못한 것은 조급함 때문입니다. 정해진 시간까지를 충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 때문에 서두르게 되고, 한계 초과하여 치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삶은 질서를 잃고 균형이 깨지고 맙니다. 정한 시간을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시험과 같습니다. 7일은 새로운 전환이 활성화되는 시간입니다. 창조적 변환의 수이기도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조급함과 싸워야 합니다. 조급함은 한 계단 한 계단을 밟으며 높이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한껏 힘을 다해 뛰다가 그만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에게 꽉 채운 시간까지 조급함을 견디며 기다릴 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남을 반드시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흩어지는 군대를 모아서, 기필코 승리해야하기에 과한 열심으로 맘대로 제사까지 드리려한 것이 사울 왕의 잘못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합니다. 지나친 열심은 마음을 교만하게 하고, 나의 마음의 열정에 다다르지 못하면, 누군가를 비난하게 되는 또다른 원인이 됩니다. 이런 조급함과 과한 열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리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조급함과 지나친 열심을 주의깊게 다루면서, 주님의 마음에 맞는 태도로 나를 조정해갈 수 있느냐입니다. 우리에게 조급함과 지나친 나의 열심으로 인생을 살고자 하는 태도가 있다면, 그것을 다시금 내려놓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모자란 듯 겸손함으로 삶을 빚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아의 방식 vs 하나님의 방식
이런 일이 있었지만, 사울이 왕권을 얻은 다음에 주변 민족들과 싸움을 하면서 승리하였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 앞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를, 아말렉을 치고, 그들에게 딸린 모든 것을 전멸시키라고 전합니다.(15:2-3)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들과 가장 기름진 짐승들과 어린 양들과 좋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모두 아깝게 여겨 진멸하지 않고 다만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습니다.(15:9) 그런데 이 일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은 아침에 일어나 사울에게 갔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자 자신은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무엘은 나의 귀에 들리는 이 양 떼 소리와 내가 듣는 소 떼의 소리는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 좋은 것들은 살려두었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사무엘은 왕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시절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고,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약탈하는데만, 마음을 쏟고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하였다고 질책했습니다. 왕이 되기전에는 그렇게 겸손하더니 그의 변한 마음을 향하여 책망한 것입니다. 사울은 계속되는 추궁에 명령하신 대로 진멸하지만,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가장 좋은 것만 골라 왔다고 다시 변명합니다. 그때 사무엘은 분명하게 사울에게 질문하며 일러줍니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15:22)
사울왕이 전쟁의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겨서 제물로 드리려 한 것은 언뜻 보면 악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 왕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듯 합니다. 가장 좋은 소와 양으로 제물을 드리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업적을 치켜세우며 자신의 힘을 한껏 자랑하려고 한 것입니다. 더 큰 잘못은 내 뜻을 마치 하나님의 뜻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따르려 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의 의도와 계획, 뜻이 항상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 있고, 자아의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가정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세상은 내 의도와 욕망을 관철하고 실행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믿고 있고, 나의 생각과 의견이 진리인냥 떠들고 있습니다. 자아가 아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질문의 대답은 사무엘이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받은 계시처럼 객관성을 담보하기가 어렵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자아의 의도를 넘어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꿈을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꿈을 성찰하며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는 길을 제공할 것입니다.
형식보다 마음의 태도
사무엘은 가장 중요한 핵심을 순종과 제사의 관계, 즉 형식과 마음의 태도로 가르칩니다. 제사의 제물도 좋지만, 말씀을 따르려는 마음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순종의 마음없이 드리는 제물은 한낫 껍데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를 강조하는 것일 뿐입니다. 형식은 일종의 그릇 같아서 안정과 균형,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물이 지저분한 것을 담는다면 그것은 좋은 그릇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중시하며 형식적 틀 속에 굳어진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마 23:27-28)
껍데기 안에 진실한 마음이 깃들지 않으면 그것은 위선이고 외식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고 그 길을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호세야 예언자의 말을 다시금 상기면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