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등반을 시작하던 초기에는 루트에 대해 설명해주거나 안내해 줄 선배 등반가가 없었다. 1990년 발간된 북한산 일원의 가이드북 『바윗길』이 필자의 등반을 상상하게 하고 안내해주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일요일 등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바윗길』 마지막 장에 있는 ‘난이도별 암벽루트 조건표’에 루트를 하나씩 표기해 나가곤 했다. 조금씩 실력이 늘면서 코끼리크랙에 도전할 시기가 다가왔고, 마침내 찾은 코끼리크랙에서 필자는 마치 사람과 코끼리가 힘 대결을 치른 듯 완벽한 패배를 맛보았다.
이후 2000년대 후반, 필자는 문성욱, 안종능, 이명희씨와 ‘잊혀진 루트를 찾아서’라는 등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차 코끼리크랙을 다시 찾았을 때, 뒤늦게 비로소 코끼리크랙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었다.
어디로 갈까? 어디든 가자!
장마 기간 등반은 ‘어디로 갈까?’라는 고민보다는 ‘어디든 가자!’는 마음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이달 취재지는 가깝고도 먼 코끼리크랙을 선택했다. 하루에 몇 번씩 흐리고 맑음을 오가는 날씨 때문에 대상지 선정이 영 쉽지는 않았다.
코끼리크랙은 백운산장 건너편에서 쪽두리봉 방향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인수봉 남면을 오르다 백운산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곡선의 아름다운 등반선이 바로 그것이다. 코끼리크랙은 인수봉에서도 가깝고 북한산 일원에서 상위 5위 안에 드는 훌륭한 크랙 등반대상지이다. 다만 오래전 출입금지 구역에 포함되면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게 되어 가깝고도 먼 곳이 되었다.
오후 3시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 일찍 우이동을 찾았다. 어제 내린 소나기로 북한산은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가슴골을 따라 흘러내린 땀이 허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고갯마루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동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등반을 시작하면서 수없이 지나다닌 하루재는 언제나 설레는 길이다. 이곳에 닿으면 언제나 나를 성찰 시키는 인수봉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취재에는 오랜 산 친구인 문성욱씨와 경기도 포천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인공암벽장을 관리하는 배대원씨가 함께했다.
문성욱씨는 크랙등반의 성지인 인디언 크릭(Indian Creek), 자이언(Zion), 요세미티(Yosemite) 등 북미뿐 아니라 중국의 리밍(Liming)에서도 크랙등반 경험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세레토레(Cerro Torre, 3,102m)와 같은 고난도 알파인 등반도 병행하고 있는 국내 몇 없는 등반가이다. 요즘은 필자와 문성욱씨가 함께 있는 모임에서 그는 ‘저승교(저승봉) 교주님’으로 불리고 있다. 크랙등반의 교리를 한참 설파하고 있으며, 몇몇 신도(등반가)들이 그의 교리에 감명받고 있다. 특히 문성욱씨는 핸드와 오프위드 사이즈 등반에 뛰어나 지난 6월 제3회 트래드클라이밍 페스티벌 때도 오프위드 코스를 도맡아 강의했다. 필자가 생각건대 그는 국내 유일의 오프위드 크랙 전문 등반가이며 유독 전신을 사용하며 오르는 것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등반가이다.
그에게 크랙등반 대한 애착을 물으니 그는 “손끝과 발끝만을 사용하여 오른다면 진정 바위를 이해할 수 있을까? 특히 온몸을 사용하는 오프위드 등반이 진정 바위와 교감하고 물아일체가 되는 등반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등반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배대원씨는 설악산 울산바위에 ‘인클길’과 ‘인클주니어’라는 멋진 크랙코스를 공동 개척했으며, 등산학교 강의를 비롯해 왕성한 등반 활동을 하는 등반가다. 그는 최근 들어 문성욱씨와 북한산 일원의 고난도 크랙 코스를 다니면서 새롭게 등반에 흠뻑 빠져 있다고 한다. 지난번 코끼리 1번을 온사이트로 시도하다 아깝게 실패하고, 단 한 번의 추락으로 동작을 모두 해결했다고 한다. 오늘도 크랙 컨디션만 좋다면 그의 완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