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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당시의 전주지도 |
백제가 660년 신라에 망하면서 패배지역이 되었다. 신라 경덕왕은 757년 행정구역을 전주를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고 전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 이전의 중심지였던 부여나 왕궁을 견제하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라에 대한 저항 분위기가 남아 있었던지 200여년 후 견훤에 의한 반란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후백제가 건국되었다. 그러나 부자지간의 갈등으로 다시 고려에 복속되어 고려조에 의한 차별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역적으로 금강이 활을 개성을 향해 쏘는 형태라 반역향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저항의 역사정여립은 대동사상을 통해 임금의 국가가 아닌 모두의 국가라는 사상을 주장했고, 결국 반역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동학은 지배층의 문란과 서양세력의 침탈로 일어난 국가적 혼란을 바로 잡고자 하는 궐기였지만 역부족으로 패배하였다.
이러한 저항은 지역적 차별에 대한 저항이고(패배지역으로서), 대동적인 개혁사상에 기초한 저항으로 상대적으로 개혁적 저항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후백제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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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성 건물터 |
후백제가 36년간 전주에 도읍을 유지하다가(900-936) 망했지만 유적들이 남아 있다. 승암산 또는 중바위로 불리는 곳에서 전주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곳에 견훤성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지금의 국군묘지 위쪽에서 전주성이라는 와당이 나왔다. 이 와당들에 연꽃무늬와 봉황무늬가 그려져 있다. 이들은 대체로 궁궐에서 나타나는 것이어 견훤성이 이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층건물로 추측되는 건물터가 나왔는데 왕궁건물의 일부로 보인다. 바깥 부근에서 성벽으로 추측되는 유물들이 보여 산성과 평지성을 겸하는 성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주의 성격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500년간 전주가 이씨 왕조의 출향지로서의 독특한 분위기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전주가 경기전(사적 339호, 이성계 어진이 모셔 있음-보물 931호), 조경묘(경기전 내에 있음, 지방유형문화재 16호, 전주이씨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이성계는 이들의 21세손이다), 오목대(지방기념물 16호,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이루고 전주에 사는 일가친척에 잔치를 한 곳), 목조대왕유허지(향교에서 기린로 건너서 있다. 이성계 4대조가 살던 마을로 자만동, 옥류동이라 불렸다), 건지산(전주이씨 시조의 묘지)를 비롯하여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었고 지역유림들도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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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경기전, 오목대, 조경단, 이성계 어진 |
이에 따라 중국의 한고조 유방이 태아나고 관직을 시작한 곳의 이름을 따서 객사(보물 583호, 도읍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임금의 전패를 모시고 임금에 대한 제례를 올리는 곳)는 풍패지관, 남문은 풍남문(보물 308호), 서문은 패서문이라고 하였다. 서문, 동문, 북문은 일제가 부셨다. 객사의 풍패지관의 편액은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만방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실제 전주성 내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관아에서 일하는 중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전주를 둘러싼 지역에 양반들이 살고 있고 또한 전주가 이러한 분위기를 포괄하기 때문에 중인도시라고 말할 수 없다. 보통 양반들은 서울을 제외하고는 성안보다는 자신의 마을에 사는 것이 경향이었기 때문에 전주만이 특별한 아전도시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전주자체에 양반이 거주하는 양반도시가 아니었음은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전주의 성격은 단순히 성내의 거주민이 아니라 지역의 (특히 완주권) 거주민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느 정도 전주가 양반도시라고 할 수 있다.
왕이나 관찰사나 주민들이 왕조의 본향지로서 전주를 다루었기 때문에 전주는 다른 도시와 구분되는 神聖性과 자부심이 있었다. 또한 전라도의 중심지로서 500년간 작동해왔기 때문에 지식수준(출판 등), 예술수준(서예, 동양화, 판소리 등), 공예품수준(합죽선, 종이 등)이 높았다.
근대 100년 일제는 전주에 들어와서도 전주성을 파괴하여 도로를 만들었다. 서양사람들은 종교자유를 얻어내 1890년대부터 서문교회를 시작하였고, 또한 1900년대 전동성당을 건설했다. 이때 교회는 완산칠봉, 성당은 오목대에 지으려고 했으나 성지라는 이유로 거부되어 현 위치에 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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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전주객사, 아래) 풍남문 |
일본은 조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성벽, 경기전, 건물(특히 감영, 부청)들을 파괴하였다. 감영사이로 길을 내고(중앙로), 객사건물을 부수면서 길을 내고, 경기전을 부수고 중앙초등학교를 만들었다. 일본식 근대건물과 도로를 건설하였다. 이를 통해 전주문화는 서구문화, 일제문화가 혼합된 식민도시로 만들어졌다. 전주 성 부근에 있는 사직단(기전여대자리, 지신과 곡물신에게 전주부사가 제주가 되어 춘추로 제를 지내는 곳으로 1895년 전후로 소실되었다), 여단(동초등학교 북쪽부근,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을 모시는 곳으로 이들이 일으키는 병을 막기 위한 제를 지낸다. 동서 18m 남북 15m의 장방형 단이 있었다), 성황사(동고산성 부근, 지역신을 모시는 곳) 등도 사라지거나 일본기념물(신사 등)으로 바뀌었다. 모든 지명과 명칭도 한자나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자발적 근대화에 따라 과거의 것보다는 근대의 것을 건설하는 데 집중하면서 과거의 것들을 파괴하고 사라지게 했다. 일본이 도입한 근대가 자발적인 형태로 전주에서도 복제되고 확산된 것이다(건물, 제도, 이름 등). 따라서 역사적 연속성이 단절된 형태로 근대 전주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8년 올림픽을 치르면서 우리것에 대한 자부심이 중요하다는 점이 인식되어 우리 것 찾기가 확산되었고, 1995년 이후 지방자치를 시작하면서 지역적 자부심이 중요해지고 지역적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에 대한 조사와 복구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문화관광과 문화산업이 중요해지자 이러한 전통문화자원을 축제, 문화자원, 관광에 활용하기 위한 전통문화에의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전주의 경우 풍남제, 세계소리축제, 종이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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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1920년대 남부시장. 아래왼쪽) 1897년 중화산동 선교자촌, 현 예수병원 자리. 아래오른쪽) 1930년대 중앙동 2가 |
전주전통문화의 특성전주의 전통문화도 다양하여 단일한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전라도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화예술, 음식을 발전시켜 왔고, 다른 지역에서처럼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전통문화적 특성이 계속 되고 일부 그대로 남아있다. 이들을 포괄하여 보통 맛과 멋의 고장 또는 예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맛과 멋의 고장 또는 예향이라고 부르는 고장이 아주 많기 때문에 꼭 전주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라도 감영이라는 점이 판소리, 음식, 출판이 발전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조선 500년간 전주가 왕조의 발원지라는 자부심과 전라도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화예술과 음식을 발전시킨 측면이 다른 도시들과 구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전주음식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는 예로부터 4 불여(不如)의 고장이라고 전해졌다. 수령으로 온 벼슬아치는 토박이 아전만 못하고, 아전들은 기생들만 못하고, 기생들은 음률풍류만 못하고, 음률은 음식만 못하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전주가 음식의 고장임을 널리 알리는 말이다.
전주비빔밥은 평양냉면, 개성탕반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전라도 음식이 가장 맛있고 풍부하다는 일반적인 평가를 고려하면 전주가 한국 최고의 음식도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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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비빔밥과 한정식 |
그 이유는 전주는 전라도 중심지로서 주변에 너른 들판이 많아 부유한 계층이 많았고 또한 해산물이나 생선(전주천의 모래무지, 서해의 조기), 젓갈류(순창 고추장, 곰소 젓갈), 산채나 나물(전주 인근, 미나리, 콩나물, 열무 등), 곡식(김제평야) 등의 공급이 수월해 다양한 음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라도 내에서 다양한 음식들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전주의 풍류에 깃들인 음식발전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전주비빔밥, 콩나물국밥, 한정식, 돌솥밥, 오모가리탕이 널리 알려졌다. 대부분 전주 인근에서 좋은 음식재료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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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
과거 문화요소 중에서 가장 수준 높게 전주에서 발달한 것이 전주대사습놀이다. 전주성보다는 전주일원과 관련된 행사로고 볼 수 있다. 18세기에도 판소리가 발달하여 잔치 등에서 소리가 이루어졌다. 19세기 전주가 판소리의 중심이 되면서 소리꾼에 전주인근 출신들이 많았다. 그 이전부터 명절이나 잔치에 판소리를 했다. 그 전통이 이어져 감영과 전주부의 통인들이 동짓날에 전국 명창들을 불러 소리를 들었다. 이를 통해 전국적인 판소리의 중심지로 전주가 성장하였다.
이러한 판소리잔치가 반복되면서 전주에 귀명창이 많아지고 국악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도 국악이나 판소리와 관련된 음반이 서울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곳이 전주라고 한다.
출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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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를 만드는 모습 |
전주는 서울, 대구와 함께 목판인쇄의 중심지였다. 판소리가 널리 유행하면서 판소리가 소설로 정착되어 직접 필사본들이 판매를 하는 목판본 고소설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자녀 교육용 서적들, 생활백과용 서적들(제례 등), 사서삼경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전주천변의 남문시장을 중심으로 서점이 발달하였다. 그만큼 전주 지역에 책판매시장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앞서서 출판문화가 발달하였던 것은 감영에서 관영 목판을 만드는 각수들이 많이 공급되었고, 양질의 종이가 공급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선진지식도시의 모습은 일제를 거치면서 출판이 서울로 집중되면서 사라져, 사람들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한옥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다. 그러나 한옥마을의 한옥은 1920년대부터 초가집을 개축한 것들이거나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조선의 정식 전통문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를 이어 받아 지은 것으로 조선시대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하지만 일부 일본식 형태들이 개입되어 있다. 특히 정원형식이나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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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그림지도 |
목조와 기와로 지은 맞배집, 팔각지붕들이 돌담과 흙담으로 또는 나무울타리로 이어져 있었다. 해방 후 시멘트가 들어오면서 벽과 담들이 시멘트로 바뀌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도시생활문화를 잘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는 것은 한국에 남아있는 최대의 한옥밀집지구이고 이를 기초로 전통을 어느 정도(적어도 겉으로라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통에 대한 향수를 되살리고 전통생활문화를 되살려 사람들에게 전통에 대한 이해를(물론 어느 정도 왜곡된 것이지만)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전주의 풍수지리전주에는 4가지 방향에 4固寺가 있어 전주를 완전하게 호위하고 있다. 동고사는 기린봉이나 승암산 중턱에 있었다고 전해지면, 후백제의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기 전부터 창설되었다고 전해진다. 서고사는 황방산 중턱에 있었다. 남고사는 교대 뒤쪽 남고산 산 중턱에 있으며 그 부근에 관왕표(관우를 모시는 사당), 만경대, 천경대, 억경대, 남고산성터가 있다. 1300년전인 신라 문무왕 8년에 명덕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북고사는 유연대 북쪽의 어은골에 있다. 현재 개축하여 진북터널 가는 쪽 북쪽에 진북사로 되어 있다. 4방향에서 전주를 보위하는 고찰들이 있었던 것은 통일신라의 불교의 영향과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사상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전주는 북쪽이 평야로 허하여 전주의 기분이 북쪽으로 빠져 나간다고 하여 진북사(북고사)와 북쪽에 숲을 조성하여 숲정이가 형성되었다(진북동, 숲정이 성당). 덕진지역에 연목을 조성하고 나무를 심어 기가 북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덕진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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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전주 덕진연못. 아래왼쪽) 1910년대 덕진연못과 취향정. 아래오른쪽) 단오절에 덕진연못을찾아 물맞이하는 사람들. |
건지산이 진산이었는 데, 너무 낮아(103m) 이를 보하기 위해 객사에도 일부러 언덕을 만들어 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승암산이 진산이고 건지산, 황방산, 완산칠봉이 보위하는 형태라고도 말해진다.
주요한 민속
다리밟기: 정월대보름 기린봉 봉우리에 보름달이 떠 오르면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남천교와 서천교로 몰려가 다리밝기를 했다. 대보름놀이: 기린봉에 정월대보름달이 뜨면 곤지봉과 투구봉에서 나무를 산같이 쌓아 불을 놓고 “만월이야”하고 외쳤다(옛 전주공전 위쪽). 남천교와 서천교에 횃불을 들고 사람들이 나타나서 다리밟기를 한다. 석전: 정월보름날에 남천(서학동, 교동 등)과 서천(완산동, 고사동 등)으로 갈라 양쪽팀으로 돌을 던지며 싸웠다. 각기 100명씩 10대, 20대, 30대 순으로 싸웠다. 머리가 깨지는 일도 자주 나타났다. 일제가 1920년대 금지시켰다. 주변 농촌에서는 횃불을 들고 다른 마을을 처 들어가 횃불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굴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삼짓날: 보통 산에 가서 진달래를 따다 화전을 해 먹었다. 단오: 단오날은 창포에 머리를 감는 관습이 있었다. 또한 덕진연못에서 씨름과 놀이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이 날을 이어 받아 전주시민의 날, 전주풍남제로 이어졌다. 백중: 백중이나 칠석날 전주주변에서 술멕이가 이루어졌다. 풀뽑기를 끝내고 마을 농꾼들이 흐드러지게 노는 시간이다. 삼천동이나 삼례 등지에서 기접놀이가 행해졌다. 천변에서 소을 걸고 씨름이 행해지기도 한다. 동짓날: 원래 대사습이 이루어지던 날이다. 현재는 그저 동짓날일 뿐이다. |
전주의 8경시군들이 8경을 가진 곳이 많다. 8이 적당이 꽉차서 좋은 의미를 가진 숫자로 생각했다. 전통도시의 풍경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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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기린토월, 한벽루, 비비정, 남고모종, 다가사후, 천양정, |
(1). 기린토월 - 기린봉에서 달이 뜨는 모습 (2). 한벽청연 - 한벽당 아래에 찬 자고 푸른 물과 희부연한 물안개로 어우러진 풍경 (3). 남고모종 - 남고사에서 저녁 노을에 울리는 범종, 범고, 운판 소리 (4). 다가사후 - 다가산 입구 천양정에서의 활쏘기 (5). 비비낙안 - 삼례와 전주 사이의 한내천 백사장에 앉은 기러기 떼와 그 위에 걸쳐있는 飛飛亭의 모습 (6). 덕진채련 - 덕진연못의 연꽃모습 (7). 위봉폭포 - 송광사 위쪽 산골로 가면 나타나는 폭포의 모습(위봉사, 위봉산성이 있음) (8). 동포귀범 - 용진 마그네 다리에 들어오는 소금배, 젖갈배, 생강배, 곡식배 등.. 만경강으로 이어지는 수로의 역할을 하였고 돛배와 만경강의 어울리는 풍치 |
전주역사문화를 위해 보아야 할 책들
이정덕 편 (2004) [전주의 문화정체성] (전라문화총서 12), 신아출판사 김규남, 이길재 (2002-3) [지명으로보는 전주 100년 상, 하] (전주문화원) 신아출판사 전주역사박물관(2002) [제1기 전주역사박물관 아카데미] 전주역사박물관 전주문화원 (2000) [전주문화유산탐구] 전주문화원 전주교육청 (2000) [전통예향전주의 얼토피아 지도자료] 전북 전주교육청 전주문화원 (1997) [살아있는 전주 문화유산] 전주문화원 전주문화원 (1994) [완산고을의 맥박] 전주문화원 |
이정덕(전북대교수)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장 및 전북혁신협의회 문화영상관광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전북의 축제(신아출판사), 21세기 한국의 문화혁명(살림출판사) 등을 저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