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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동행
제목 : 주님과 함께 하는 은혜로운 동행(同行)
성경 : 마 28:16~20
찬송 : 430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50101 낙양교회 신년예배
마 28: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마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전도자 요한 웨슬레의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즉 '가장 최선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이 시간이 최선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어떤 상황이든 우리에게는 최선의 시간이고 최대의 행복입니다. 현재가 언제나 극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시고 우리의 침상에 같이 누워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중대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많은 전쟁의 신화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항구에 영국군 수십만 명이 후퇴를 할 때 그 부근의 독일 군들이 집결해 있는 항구에는 대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불과 얼마 안 되는 부근이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잔잔해서 수십만 명의 영국군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답니다. 훗날 기록을 보면 영국군들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 군에게서 우리들을 지켜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다사다난했던 2024년이 가고 희망찬 새해 2025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2025년 우리교회 표어를 ‘주님과 함께 하는 은혜로운 동행’으로 정하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함께 하는 동행이야 말로 가장 은혜로운 동행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하는 은혜로운 동행을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는 정체성이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종류입니다. 새로 비유한다면 우리는 다른 유의 새입니다. 이번 무안 제주항공 참사도 조류 충돌을 중요한 요인으로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닭은 새와 같은 종류인데 거의 날지 못합니다. 어쩌다 지붕까지 날아가는 닭도 있기는 합니다만 대부분 비행 능력과 의지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닭처럼 새인데도 새 같지 않은 꼴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품으신 우리에 대한 그림은 생각과 눈과 몸을 땅에 처박고 사는 닭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새 중의 왕인 독수리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 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독수리 같은 그리스도인이 닭처럼 시시하게 살다 갈 수도 있을까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든 신약의 크리스천이든 인생이 시시해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정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를 때 우리는 시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저희 5대조 할아버지는 우리 동네 김해김씨 집안에 머슴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머슴이 시간만 되면 몰래 보는 것이 있었는데 족보 책이었습니다. 머슴이 일나가고 주인이 몰래 그 족보 책을 펴 보았는데 글쌔 전주이씨 족보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이 생각할 때 비록 머슴살이는 하지만 양반 집안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딸을 주어 데릴사위를 삼았고 그래서 우리 고향 동네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 그분의 거룩하심을 세상에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모조품, 유사품, 사이비 신들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 구별되신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구별된 백성이 다름을 포기하고, 주변과 같은 삶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다른 정체성을 포기하고 사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그분의 계획을 훼방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함을 멸시하고 구별됨을 포기한 자기 백성들을 흩어버리셨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주님과 함께 은혜로운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정체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그들과 같게 살려는 것은 자신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입니다.
√둘째, 우리는 생명이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다른 인종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생명을 지녔습니다. 물론 이 말은 영적 생명을 말합니다. 코로 숨 쉬고, 맥박이 뛰며, 피가 돌고, 뼈와 근육이 있는 이런 육체적 구조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아주 다릅니다.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인이란 말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일까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다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처음 쓴 곳이 어디였습니까? 바로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행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인도의 전도자 선다 싱은 ‘그리스도가 있는, 그리스도가 없는’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눕니다.
1)그리스도 없는 비그리스도인
2)그리스도를 모신 비그리스도인(비밀 신자)3)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종교인으로서 교인)
4)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모신 그리스도인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바로 네 번째에 속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셋째, 우리는 삶의 목적이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다른 인종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해 삽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목적은 바로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 답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즉 우상을 섬기며 살아가는 목적은 오로지 자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참 신앙은 신에 의해 내가 변화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변하면 신앙인이고, 신을 바꾸려 하면 무속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기준과 목적은 자신입니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넷째, 우리는 삶의 원리가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삶의 원리로 삼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삶의 목적을 이루는 유일한 원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뿐입니다. 이 말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할 때 영적주의가 필요합니다. 불교도는 불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교훈을 삶의 원리로 삼습니다. 무슬림은 코란에 기록된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삶의 원리로 삼습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삶의 원리로 삼는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불경이나 코란과는 아주 다른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기독교적 정보나 교리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초점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성경의 초점이 무엇인지 모른 채 율법의 조목을 자신의 삶의 원리로 붙들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예수님이라는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기독론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2인칭으로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암송할 때, ‘아, 이런 교훈이 있구나’하면 3인칭으로 읽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바로 ‘내게’ 말씀하시는 통로입니다. 성경을 2인칭으로 읽는 방법은 예수님과 나의 사랑의 이야기로 읽고 들으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릭 위렌은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목표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구절로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상명령입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다른 하나는 지상 사명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가를 확실하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1)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자신과의 관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 자라가는 것입니다.
3)이웃과의 관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
사랑으로 교제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4)세상과의 관계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
복음으로 세상을 축복하는 것과 봉사로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살아가신다면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스라엘의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고 다리야, 아버지, 저는 돌아갈래요. 목도 마르고 다리도 아파서 저는 더 이상 못 걷겠어요." 아들이 우는 소리로 앞에서 걷고 있는 아버지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좀처럼 쉬실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얘야, 끝까지 해보아야지, 이렇게 포기하면 안 된다. 곧 마을이 나타날 거야." 아버지는 아들을 격려하며 힘든 걸음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막을 여행 중이었습니다. 사막은 너무나 뜨거워서 사람이 다니기에는 너무 힘이 드는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가져간 물도 다 떨어져서 매우 힘든 여행길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가도 가도 마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끊임없는 격려 때문에 아들은 주저앉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걸어가기 힘들 정도로 지쳐서 쓰러지려는 순간에 아버지는 무덤을 발견하였습니다. 무덤을 본 아버지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얘야 힘을 내거라. 무덤이 있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다는 표시란다." "정말이에요?" 아들은 무덤이 왜 마을이 있다는 표시인지 몰랐지만 다시 희망을 가지고 걸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정말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그곳에서 물도 마시고 편히 쉴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5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우리 혼자만 걸어간다면 힘들고 지치고 곧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길을 간다면 정말로 은혜로운 동행이 될 것입니다. 2025년은 정말로 주님과 함께 은혜로운 동행을 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