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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형욱씨의 “개는 훌륭하다”에서, 명견과 일반견의 다른 점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기다린다”는 겁니다. 저희 집에도 “반달”이라는 개가 있지만, “기다려”를 가르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어려도 진돗개와 같은 명견들은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이 “기다려”하면, 언제까지도 기다립니다. 이것이, 명견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을 향해 많은 이들이, “위대하다”고 하며, 자신들도 다윗 닮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을 닮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경우가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멈추라고 하자, 다윗은 멈추었습니다. 대상 22: 7 - 8을 보시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며 성전건축을 아들인 솔로몬에게 위임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능력입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다윗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며 추락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엎친데 겹친다고, 아들에게 쫓기는 것도 처량한 데, 이제는, 사울 왕이 소속되었던 베냐민 지파의 “시므이”가 뒤따라오며, “이 악한 자야,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 가족을 죽인 죄를 너에게 갚으셨다. 네가 사울 왕을 배반하여, 왕위를 빼앗았지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너의 아들 압살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너는 왕을 배반하고, 많은 사람을 죽인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했으니, 꼴 좋다”라며, 조롱합니다. 참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차,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기다리는 믿음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위대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쫓기는 상황이었지만, 그 상황을 통해 오히려 한 단계 더 높은 믿음의 경지로 들어갔고,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다윗이 되었습니다.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중국 송나라 때, 원숭이들에게 상수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적다고 화를 내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준다고 하자 좋아했다는 우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지금 다윗은 아들이 일으킨 반란과 시므이의 조롱으로 처참한 지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기다린 것은, 다윗이 자신을 조롱하는 시므이에 대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함으로, 그로 인해 받게 될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잃게 되는 “조삼모사”격으로, 좋아했다 슬퍼했다 하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생활하는 가운데, 뭔가 사태가 벌어지면,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19가 시작할 때, 어떤 교회는 발 빠르게 가정예배로 전환하거나 장로, 권사등의 직분자들이 목회자에게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드리지 말자고 강력하게 건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발빠른 대처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행하신 그 징계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시므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징계의 자리에 계속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란을 평정하고, 온 백성의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복귀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길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은 믿음에 대해 반드시 선대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함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을 기다리는 다윗과 같은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 - 10절을 보시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라고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시므이가 다윗과 그 신복들을 저주하며 돌을 던진 근거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사울과 그의 가문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렀다는 겁니다. 그런데, 시므이의 이러한 생각과 실제는 전혀 다릅니다. 다윗은 오히려, 사울의 손자인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왕의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할 정도로 예우했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이의 행위는 그릇된 자기 선입견으로 인한 착각이었던 겁니다. 시므이는 마치, 자기에게 유익하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고,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며,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관점은, 내가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겁니다. 이를 보며, 우리도 다윗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가면서, 현재의 상황이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며,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랬기에, 지금의 상황을 압살롬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고, 시므이 탓으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시므이가 자신을 향해 하는 저주를,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통해서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아비새의 말이 비록 율법적으로 맞는 말이며, 왕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 말이라 하여도, 본인의 생각은 그것과 전적으로 다르다고 한 겁니다. 본문 10절을 보시면, 다윗은 아비새의 요청에 대하여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며 거절합니다. 여기서, “상관이 있느냐”는 것은, 당시의 관용적 표현으로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대화를 통해, 다윗이 얼마나 신중하고 자제력이 강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시므이의 말을 듣고 분노할 사람은, 당사자인 다윗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윗과 같은 경우에 처하게 되면, 자신의 과실 여부를 떠나 매우 분노하며 보복을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 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아비새보다도 더 차분하고도 신중하게 현실에 임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다윗의 자제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볼 때, 다윗의 수준 높은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되, 그의 의로우심까지 인정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시 119: 75을 보시면,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쫓기는 처지에서, 시므이를 물리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행하시는 것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전적으로 믿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경박한 자는 쉽게 분노하나 성숙한 성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옛 성현의 말 중에 “소인은 끓는 냄비와 같으나 군자는 깊게 흐르는 강물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에든지 쉽게 흔들리지만, 성숙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변 사람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이든, 성도된 우리는 다윗과 같이, 오직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만을 믿으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절을 보시면,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현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다윗은 앞의 10절에서,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 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고백함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생사화복과 우주만물을 주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고난과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시므이의 조롱과 이를 본 아비새의 분노에 대한 다윗의 자세가 본문에 나옵니다. 어떤 자세입니까? 다윗은, 자기가 처한 현재의 상황에 대해, 그 모든 일을 인간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이지만, 아직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이 세상에서 살며 실수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와 연단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 12: 6을 보시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받는 고통이 그들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면, 성도들이 받는 징계와 고난은, 우리를 연단시킴으로 성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배려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욥 23: 10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하며, 또, 시 119: 71을 보시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놓여진 환경으로 인해 불만불평을 하기보다는, 다윗과 같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세상의 그 어디도 하나님 앞에 가려지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 45: 7을 보시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죄의 조성자는 아닙니다. 시 23: 1 - 2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그 분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성도된 우리는 이것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시므이의 조롱조차 하나님의 뜻으로 받은 것처럼, 우리의 현실이 힘들고 어려움에 있다하여 불만불평하기보다 그 속에서, 성도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를 발견하심으로, 다윗과 같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코람데오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 - 13절을 보시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시므이가 조롱하면서 뒤따라오지만, 다윗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갈 길을 갑니다. 하지만, 시므이의 조롱으로 인해, 다윗의 마음이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만큼, 그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히 10: 30을 보시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과 시므이의 조롱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성도인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다윗은 시므이로 인해, 매우 분노했으나, 자신이 직접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 맡겼습니다. 본문 12절에, 이러한 다윗의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시므이가 조롱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며, 그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은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절망 속에서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그 저주 때문에, 하나님이 선으로 갚아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지만, 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의해,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바뀔 것을 기대했던 겁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에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의 친족인 그가 그렇게 저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통함을 아시고 선으로 갚으시고 축복해 주시길 바랬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징계의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였으며, 존 웨슬리와 찰스 스펄전에게 영향을 준 “리처드 십스”는 “겨울은 봄을 위해서 땅을 준비시킨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고난은 영광을 위하여 영혼을 준비시킨다”라고 했으며, 미국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이자 영성가인 “브레넌 매닝”은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절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절망한다는 것은 은혜를 갈구하게 된다는 말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과정일 뿐 결과가 아닙니다. 시 119: 67을 보시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가치관이 흐려지고 나날이 인본주의적으로 변해 가는 이 시대에, 진정한 가치관과 참된 성도의 자세가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과 성도의 차이에 대해서도, 다윗과 아비새의 분명한 대조를 통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대조가 보여준 것은, 비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정한 기준이 없이 편리에 따라 행동하며, 심지어 진리를 왜곡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도된 자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기준으로 판단하며, 고난과 고통,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거룩한 성도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는 다윗과 같이, 아름다운 신앙으로 무장하여 성숙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