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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시작은 서울 내 어느 근린공원들보다 평화로웠으며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도는 곳이었다. 지하철역과 대학가 사이 더불어 공원을 오래도록 지키고 있는 분들의 무게감이 대단했기에 평소에도 찾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있을 줄 알았으나, 그저 공원에 놓인 운동기구들의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편안한 분위기 너머로 느껴지던 그 묵직한 분위기는 절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을 만큼 엄숙하면서도 도처에 널린 각양각색의 태극기들이 이곳의 중요성을 상징하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으나 효창공원을 감싼 푸르름은 절정을 향해 치닫던 와중에 공원에 압축된 분위기와 어우러져 특유의 느낌을 선사했다. 곳곳에 식재된 무궁화는 넌지시 그분들께서 일궈낸 결과를 상징하는 듯 보였다. 수십 년 동안 고향땅에 들어와 보지도 못하면서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던 그분들 중, 아직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신 분과 광복을 불과 얼마 앞둔 상태였으나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까지 공원 구석구석을 돌아보기 전, 우선 그분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묵묵히 전하며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겨본다.
1.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
효창운동장 쪽으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었으나 일부러 크게 뒤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덩그러니 놓여있던 공원의 후문에는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중에 많이 알려지신 독립운동가 분들도,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었기에 그래도 사람이 좀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주변에 거주하시는 분들과 나이 드신 분들의 도란도란 대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근린공원이었던 만큼 곳곳에 운동 시설들도 좀 있었지만 가을이 다가오고 있을 적에 곳곳에 떨어진 낙엽들이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본래 효창공원은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으로 조성되기 전,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의 묘역인 '효창원'이 자리했던 곳이다. 아들의 묘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했던 정조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둘러쌓인 이곳의 지형을 마음에 들어했다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좋다고 판단하여 이곳에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라는 의미의 '효창'이라는 이름을 붙여 생모인 '의빈 성씨'와 함께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후, 조선왕조 때 까지는 인적도 드물었고 묘역도 꽤 넓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이점을 들어 효창공원에 숙영지와 비밀 병참기지를 설치해 독립군 토벌작전의 기반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해당 군사시설들은 일괄 철거되었으며, 1944년 효창원이 고양시 서삼릉 쪽으로 이장되자 이곳을 지칭하는 지명만이 남게 된다. 이후, 1946년에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인 박열, 이강훈 등과 같은 분들의 유골 수습을 촉구했었고, 1949년 백범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을 당하면서 그의 묘가 이곳에 조성되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언덕의 높은 곳. 데크 길 따라 바로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그분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더불에 경외감을 담아보고자 아래에서부터 올라갔다.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결성된 상하이 임시정부를 묵묵히 이끌어 주셨던 분들께서 바로 이곳에 계셨다. 상하이에서부터 시작된 그 물결은 충칭에서 방점을 찍었는데, 우리나라 헌법에서 임시정부의 법통과 3.1 운동의 의미를 계승하는 것을 전문에서 명시하고 있기에 근본 그 자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개화 사상가이자 신흥 무관학교 초대 교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 멤버셨던 이동녕 선생,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출신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군무 차장으로 일하시다가 1919년 만주로 돌아가 무장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조성환 선생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국장을 시작으로 흔들림 없이 묵묵히 역할을 수행하셨던 차이석 선생까지 자리해 계셨다. 하지만 차이석 선생의 경우 조국이 광복을 맞이한 뒤, 과로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객지에서 환국 직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효창공원을 찾기 전, 나 조차도 처음 들어보는 분들의 존함의 나열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 번, 카페에 앉아 태블릿을 통해 두 번 그분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니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많은 분들의 존재를 알 수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가까이에 자리한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존재와 존함을 조심스레 되새겨 본다. 모두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기록으로 남겨두고 더불어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은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며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2. 삼의사의 묘
앞서 언급한 식재된 무궁화와 다양한 조형물들을 통해 그분 들께서 걸어오신 발자취들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태극기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당시 다양한 모습들로 활용됐었는데, 이토록 다양한 모습들이 남아있었다는 사실 또한 상세히 몰랐던 부분이었다. 만발한 무궁화들 사이로 익히 들어봤던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으로 방향을 돌렸다. 사실, 효창공원을 찾은 날 이곳에 교과서와 각종 매체를 통해 접했던 분들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
계단 가장 높은 곳에 그분들의 유해를 모신 묘역이 차례로 자리해 있었다. 각각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님들께서 자리해 계셨으며 익숙하신 분들의 존함을 확인하니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통해 전국 8도를 돌게 됐는데, 책을 통해 글자로만 배우던 그 사실들이 내 몸에 와닿는 듯한 기분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당대 그분들의 순간들과 시대적 배경 더불어 선택의 무게가 얼마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실감했을 때, 삼의사의 묘 앞에서의 내 감정은 오롯이 존경 대신 슬픔과 눈물이 흐를 뿐이었다.
게다가 옆에는 가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로 일본의 초대 수상이자 하얼빈 역 의거를 성공적으로 이끄신 안중근 의사를 위한 자리로 아직 발견되지 못하신 그분을 위한 자리였다. 사형 직전에 광복 후, 조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분의 유일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아직도 시간이 흘러만 가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분의 고향은 황해도, 때문에 북한과의 문제도 걸려있어 참으로 복잡 다양한 상황이었다. 하루빨리 그분의 소망이 이뤄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부터 독립운동에 뜻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조선인으로서 받은 차별로 한계점을 깨닫게 되며,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게 된다. 하지만 그의 유창한 일본어와 임정에 대한 멸칭 등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믿지 못하였으나 김구는 그를 끝까지 믿어줬다고 전한다. 술자리에서 시작된 천황 암살과 관련된 그 말 한마디가 결국 사쿠라다몬 의거로 이어졌고, 이후 효창공원에서 영면에 들게 된다.
윤봉길 의사는 교육자 출신으로 동네에서 글자를 몰라 아버지 묘소를 찾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교육에 뜻을 가져 계몽운동에 힘쓰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미수로 끝난 점을 되새겼고, 얼마 후 진행된 훙커우 공원에서의 의거는 결국 대성공으로 막을 내린다. 그 후, 윤봉길 의사 또한 일본 형무소로 끌려가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오늘날 효창공원에 그의 묘역을 조성하게 됐다.
백정기 의사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운동가로 1933년에 중국 주재 일본공사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며 '육 삼정'이라는 곳에서 체포된다. 그는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와는 다르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이사하여 감옥에서 복역 중 옥사하게 된다. 그의 유해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유골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 국민장을 치른 뒤, 현재의 자리에 안장되었다. 여담으로 이곳에 잠든 분들 중 가장 연장자라고 전하고 있다.
기록을 통해 간략히 소개했지만, 광복 후 영광이라는 단어 그 뒤에는 참담함과 숭고함이 공존할 따름이었다. 1946년 그들의 유해를 찾을 당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공동묘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매장되어 있어 14년 동안 사람들이 그곳을 끊임없이 밟고 다녔다는 사실에 수습단은 분통을 터뜨렸다 전한다. 게다가 그분의 모친은 김구를 만나 '아드님께서 훌륭한 일을 한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다'라는 말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복잡한 마음이 고스란히 얼굴에 보였다는데 그 모습을 본 백범은 탄식하며 윤봉길과 교환했던 시계를 다시금 품 속으로 넣었다고 한다.
숭고한 희생도 결국 희생이었으며 그 사실을 당사자들은 누구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관련된 정보를 접하고는 삼의사의 묘역과 임정요인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에서 느꼈던 감정의 실체를 고스란히 받아낼 수 있었다. 학생 때, 그분들에 대한 감정이 자랑스러움과 위대함으로 설명됐다면 지금은 차마 나열할 수 없을 만큼의 복잡 다양한 감정들이 날 감쌌다.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무겁게 느껴졌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3. 백범의 발자취
2002년에 그의 뜻과 걸어왔던 발자취를 남기고자 이곳에 백범기념관이 들어섰다. 언덕 위에 덩그러니 자리한 그의 묘역을 바라볼 수 있는 곳과 그의 동상도 함께 자리해 있었으며, 그가 걸어온 길들이 상세히 나열되어 있었다. 남한과 북한에 각각 단독정부 설립 직전까지 38도선을 넘나들며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으나 안타깝게도 경교장에서 울려 퍼진 총성으로 인해 암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오늘날 강북삼성병원이 자리한 곳에 가보면 당시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굴곡 있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삶을 살아왔기에, 독립운동가들의 그 희생의 가치와 무게감을 깨닫고 있었기에 그는 마지막 사진에 담긴 구절을 저서를 통해 남기게 됐다. 이후, 저 구절은 내 삶의 이정표로 자리매김했으며 신기하게도 오늘날 그의 말에 따라 소프트 파워 강국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조심스레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본다. 이 모습이 그가 바랬던 우리나라의 모습이 맞는지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도 광복을 맞이했으나 여태껏 분단국가로 남아있게 됐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이 땅에 자리했던 그 어느 때보다 번영된 시기를 만들어 냈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발전과 시대의 흐름 한가운데 놓여있으며 쉽게 무시하지 못하는 나라가 됐다. 35년의 강제 점령 기간은 뼈에 사무칠 정도로 고달팠으며, 참혹했다. 편하게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는 와중에 평화로운 바깥의 모습을 보면서 그분들께서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여행기를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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