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雲夢
칠보시(七步詩)를 짓다
공주는 정소저와 연에 동승하여 동화문으로 들어가 겹겹이 쌓인 아홉문을 지나 협문 밖에 이르자 연에서 내려 황상궁한테 이르기를,
“상궁은 소저를 모시고 잠깐 여기서 기다려라.”
왕상궁이 여쭙되,
“태후마마의 명을 받들어 이미 정소저의 막차(幕次)를 배설하였나이다.”
공주는 기뻐하며 머물러 있게 하고는 들어가 태후께 뵈옵더라. 태후는 본디 처음에는 정씨에게 좋은 뜻이 없었으나, 공주가 미복으로 정사도집 근처에 임시 거처하면서 한폭 수족자로 인연을 맺어 정씨를 만나서 그 자색과 덕행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뒤이어 정의가 또한 친밀하여지고, 한편 양상서도 마침내 정씨를 버리지 않을 줄을 알자, 서로 사랑하며 서로 언약하여 형제의 의를 맺고 장차 한 집에서 한 사람을 섬기고자 하여, 자주 글을 올려 태후께 극간하므로서 마음을 돌리시게 하였더라. 태후가 이에 크게 깨닫고 공주와 정녀가 양소유의 두 부인이 되기를 허락하고 친히 그 용모를 보고자 하시어 공주를 시켜서 계책을 내어 데려오게 하심이었더라.
정소저는 막차에서 잠깐 쉬는데, 궁녀 두 사람이 내전으로부터 의함을 받들고 나와아 태후의 명을 전하되,
“정소저가 대신의 달로서 재상의 예괘를 받았는데 아직도 처자의 옷을 입었으니, 아무래도 평복으로는 내게 조회치 못할터이므로 각별히 일품명부(一品命婦)의 장복(章服)을 주노니 입고 입시하라.”
하기에, 정소저가 재폐하고 대답하되,
“첩이; 처자의 몸으로써 어찌 감히 명부의 복장을 갖출 수 있사오리까? 신첩의 입은 옷이 비록 간단하고 단정치 못하오나 또한 부모 앞에서 입는 옷이며, 태후마마는 곧 만민의 어버이가 되시니 엎드려 비옵건데 부모를 만나는 의복으로써 들어가 조회하고 싶사이다.”
궁녀가 그대로 아뢴즉 태후가 매우 기특하게 여기시고, 곧 정씨를 불러들여 보시니, 좌우의 궁녀들이 다투어 보고 흠모하여 탄식하되,
“내 마음으로 아름답고 고운이는 우리 공주님이라 하였는데 어찌 정씨가 다시 있을줄을 알았으리오?”
하더라,
소저의 절이 끝나자 궁녀가 인도하여 전상에 오르니 태후가 명하여 앉으라 하고 하교하시되,
“지난번 공주의 혼사로 말미암아 조칙으로 양상서의 예폐를 도로 걷어들이게 함은 나라 법을 쫒아 공사를 분별함이요. 과인이 비롯한 바 아니나 공주가 간하되 새 혼사로 말미암아 옛 언약을 저바리게 함은 인군으로서 인륜을 바르게 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고 또 너와 더불어 한가지로 소유의 부인되기를 원하기에, 내 이미 황상께 상의하고 공주의 뜻을 따른지라, 장차 양소유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예폐를 전대로 보내게 하고, 너로 하여금 한가지로 부인이 되게 하려 하니,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은전(恩典)은 전후무후하기로 이제 이를 너에게 일러 두노라.”
정씨 엎드려 사은하되,
“은덕이 융숭하사 신자로서는 감히 바라지 못하는 바이오니 신첩의 우매한 천질로는 도저히 보답지 못하올듯하나이다. 그러하오나 신첩은 신하의 딸이온데 어찌 감히 공주와 더불어 반렬(班列)를 같이 하고 그 위(位)를 가지런히 할 수 있겠나이까? 신첩이 설혹 명을 따르고자 하올지라도 부모가 필연 죽기로써 조칙을 받지 아니하오리이다.”
태후가 이르시기를,
“너의 겸손함은 가상하나, 너의 집이 대를 거듭한 후백(侯伯)이요, 너의 부친 사도는 선조의 노신이라, 나라에서의 예우 또한 남과 다르니, 신자의 도리를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되느니라.”
소저가 대답하여 여쭙되,
“신자의 도리는 군명을 준수하는 것이 만물이 스스로 때를 따른 것 같사온즉, 끌여올려 시녀를 삼으시든지 내려서 비복을 삼으시든지 어찌 천명을 거역할 수 있사오리까마는, 양소유 또한 어찌 마음이 평온할 수 있겠나이까? 필시 따르지 아니 하오리이다. 신첩이 본래 형제가 없삽고 똫한 부모가 노쇠하였사오니, 신첩의 간절한 소원은 오직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공양하와 그로써 남은 세월을 마치려 할 다름이로소이다.”
태후가 타이르시기를,
“너의 부모를 위하는 효성과 처신하는 도리는 가히 지극하다 하려니와, 어찌 감히 한 물건이라도 그 곳을 얻지 못하게 하리요? 하물며 너는 백 자깆 아름답고 험도 찾기 어려우니 어찌 양소유가 너를 버릴 수 있으랴! 또한 공주가 양소유와 더불어 퉁소 한 곡조로써 백 년 연분을 중험하였으니, 하늘이 정하는 바를 사람이 가히 폐하지 못할 것이요, 또 양소유는 일대 호걸이요, 만고에 다시 없는 재상이니 두 부인에게 장가들어 무슨 불가함이 있으리오?
과인에게 본디 두 딸이 있다가 난양공주의 형이 열 살에 요절하여 난양의 외로움을 염려하였는데, 이제 너를 보매 죽은 딸을 본 듯 한지라, 내 너를 양녀로 삼고, 황상께 말씀드려 너의 휘호를 정하고자 하니; 첫째는 내 딸을 사랑하는 정을 표하고, 둘째는 난양이 너를 사귀어 가가이 하는 뜻을 이루게 하고, 셋째는 너로 하여금 난양과 더불어 소유에게로 돌아가는데 난처한 일이 없게 하려함이니 네 뜻에는 어떠하뇨?”
소저가 머리를 조아리고 사양하되,
“처분이 이에 이르시니 신첩이 복에 겨워 죽지 아니할까 염려되나이다. 바라옵건데 곧 처분을 도로 거두시고 그로서 신첩을 관계 하옵소서.”
태후가 이르시되,
“내 황상께 주달하여 곧 처분을 내릴 터이니 너는 고집하지 말라.”
하시고, 공주를 불러들여 정소저를 보게 하매 공주가 장복(章服)을 갖추고 위의를 베풀며 정소저를 보게 하매 위의를 베풀며 정소저와 더불어 서로 대하니, 태공이 웃으시며 말씀하시기를,
“공주가 정소저와 더불어 형제되기를 원하다가, 이제 참 형제가 되었으니, 뉘가 형인지 뉘가 아우인지를 분별치 못하겠도다. 공주는 마음이 다시 한이 없느뇨?”
하시고, 뒤이어 정씨를 얻어 양녀로 삼은 뜻으로써 공주에게 말씀하시니, 공주가 기뻐하며 일어나 사례하되,
“마마의 처분이 지극하신 바로소이다. 자내깨나 바라던 소원을 성취하였은즉 이 즐거움 어찌 가히 다 아뢰 올 수 있겠나이까?”
태후가 정씨를 대접함을 간곡히 하시고 옛날 문장을 논의 하시다가 이에 이르시되,
“내 일찍이 공주에게 들으매 네가 음풍영월(吟風詠月)하는 재주가 있다고 하는지라, 이제 궁중이 무사하고 봄경치가 좋으니 문을 아끼지 말고 한 번 읊어 그로써 즐거움을 도우라. 옛사람에 칠보시를 지은 자가 있었으니, 네 또한 능히 하겠느뇨?”
소저가 엎드려 사죄하기를,
“이미 명을 듣자왔으니 재주를 다하여 다시 웃으심을 자아내고자 하나이다.”
태후가 궁중에서 걸음 빠른 사람을 골라 전각 앞에 세우고 글제를 내어 시험코자 하시니, 공주가 아뢰되,
“저저로 하여금 홀로 짓게 하심이 소녀의 마음에 미안하오니, 소녀 또한 정녀와 더불어 한가지로 시험코자 하나이다.”
태후가 또한 기꺼워하시며,
“공주의 뜻이 묘하도다. 그러나 맑고 새로운 글제를 얻은 연후 연후에야 글 생각이 스스로 나리라.”
하시고 바햐흐로 옛글을 생각하시는데, 때는 늦은 봄으로 벽도화(碧桃花)가 난간 밖에 만발하였는데 갑자기 까치가 우짖으며 복사 나뭇가지 위에 앉더라. 태후가 ㄲ치를 기리키며 말씀 하시되,
“내 바햐흐로 너희들의 혼인을 정하매 저 까치도 기쁨을 알리니 이는 길조렷다. 벽도화위에 기쁜 가치소리를 들은 것으로 글체를 삼고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를 짓되, 글 속에 반드시 정혼하는 뜻을 넣으라.”
하고 궁녀에게 명하사, 각각 문방제구(文房諸具)를 벌여 놓으니 공주와 정씨 붓을 잡으니 전각 앞에 있는 궁녀가 이미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음에 일곱 걸음 안에 혹시 글을 짓지 못할까 두 사람의 붓놀리는 것을 돌아보며 더디게 하는데, 두 사람 모두 붓이 빠르기가 바람과 소낙비 같아서 동시에 써 바치니 궁녀는 바로 다섯 걸음을 걸었더라.
태후가 먼저 정씨의 글을 보시며 읊었으되,
궁월의 봄빛이 벽도에 취하였으니
어디서 오는 좋은 새의 말이 교교하뇨?
다락머리에서 어기가 새 곡조를 전하니
남국의 하늘꽃이 까치로 더불어 깃들이더라.
다시 공주의 시를 보시고 읊었으되,
봄이 액정(掖庭)에 깊으매 백화가 번성하니
신령스러운 까치가 날아와 기꺼운 말을 아뢰더라,
은화수에 다리를 놓으매 모름지기 노력하여
일시에 나란히 두천손이 건너가더라
태후가 읊어 보며 탄식하시되,
“내 두 딸아이는 곧 여자이오나 청련(이태백)과 조자건이니 조정에서 만약에 여자 진사를 취한다면 마땅히 감시장원(監試壯元)과 탐화(探花)를 차지하겠도다.”
하시고, 두 글을 바꾸어 공주와 정씨에게 보이니 두 사람이 각기 공경하여 탄복하더라. 공주가 태후에게 아뢰되,
“소녀가 비록 한 수를 채웠으나 그 글 듯이야 뉘 능히 생각지 못하리이까마는, 저저의 글이 정묘하여 소녀의 글이 미칠 바 아니겠나이다.”
태후가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그러나 공주의 글도 적이 영민하여 사랑스럽도다.”
하시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