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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89:1-4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 칼빈
박윤선께서는 이 시편의 시제를 “다윗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의 전체적인 기도는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것을 반듯이 이루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1. 먼저 선지자는 고통에 빠진 지상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가운데 자신과 다른 신실한 자들에 대한 권면으로 삼 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천상의 좋은 소망을 제시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셨던 언약을 소중히 지킬 것을 이야기합니다.
2. 다음에 선지자는 이 세상의 온전한 다스림 속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능 에 자신과 신실한 자들의 주의를 돌립니다.
3. 그 다음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하신 백성에게 내리시는 아버지로서의 사 랑에 대한 영원한 증거로서 베풀어 주신 구속(救贖)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셨던 언약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을 취합니다
곧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의 왕을 위하여 이 백성을 향한 자신의 은혜 가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4. 끝으로 선지자는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잊으시고 자신의 교회를 원수들의 뜻에 이끌리도록 내버리셨으며 알 수 없는 재앙과 애통스러운 황무함 가운데 모든 구조와 안위하심을 물리치신 것같이 느껴지는 불만을 덧붙입니다.
1. 이 시편의 표제는 “에스라인 에단의 마스길” 입니다.
여기서 가리키는 에단이 누구며 이 시가 누구에게 바쳐진 시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에단을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에 비유의 대상이던 4인의 훌륭한 현자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면(왕상4:31) 이 시의 요지나 주제가 그의 시대에 합당치 않은 것이 됩니다.
더구나 시인이 솔로몬 시대에 살아 있었고, 솔로몬왕의 사후(死後)에 일어났던 슬프고도 통분한 사건이자 장차 닥쳐올 이스라엘 멸망의 전주곡이었던 왕국의 분할을 애통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더욱 더 그의 시대상과는 일치되지 않습니다.
왕국이 둘로 나뉜 후에도 백성들이 예전처럼 안전한 생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굳건히 세워졌던 단일 왕국으로의 통일이 불화와 반목으로 와해되고 말았을 때 더 이상 어떤 소망의 근거가 지속될 수 있었겠습니까?
시편 89 편
더우기 전체 집단의 번영과 복이 오직 단 한 사람의 통치자를 받들고 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었던 것인데 이 통치자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던 백성들 중에서 열지파가 간교하게도 반역의 행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 세상 끝까지라도 왕성하고 부족함 없이 번영을 누릴 수 있었을 왕국이 한 사람의 생애가 그 종막을 내리려는 순간에 와해되고 비통하게 찢겨지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겠는가!
거룩한 예언의 진리가 짧은 시간이 흐른 후 그토록 쉽게 뒤집히는 것처럼 보였을 때 누가 거룩한 예언의 말씀이 거짓이고 헛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에단을 이 시의 기자로 여긴다면 시 속에 담겨있는 온갖 불평들은 다윗의 왕좌가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무리의 백성들이 변절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버리고 동포끼리 서로 물고 뜯는 내부 불화로 인하여 상호간의 파멸을 몰고 왔던 다윗의 한 시대에 관한 것이겠습니다.
이것이 이 시편 기자에 관한 한 가장 큰 개연성(蓋然性)을 지닌 추리입니다.
혹자는 기자가 예언의 영의 감화 아래에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장차 백성에게 닥쳐올 재앙을 예고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견해는 이 시의 문맥 자체를 보아서도 쉽사리 일축할 수 있습니다.
이 영감을 받은 시인은 여로보암이 일으킨 모반의 결과로 왕국 안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불행한 개변(改變)을 애통해 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절은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입니다.
기자는 엄습해 오는 무서운 유혹의 힘에 대항하여 성도들이 믿음을 굳건히 지킬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던 언약을 마음속에 되새김으로서 이 시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의무를 시작할 때 기도의 시작과 함께 어떤 절망적인 사념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우리는 용기를 잃고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굳세고도 단호한 결의로 그 절망감을 뚫고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의도하는 바는 처음부터 믿는 성도들의 심령을 확고하고도 견실한 뒷받침으로 굳건히 지켜 나가게 하려는 것으로 외면적으로는 거의 땅에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고 또 성도들의 믿음을 격렬하게 뒤흔드는 온갖 유혹의 엄습들을 격퇴하면서 왕국 재건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지니며 이런 복을 위해 온갖 시련을 무릅쓰고 끈기 있게 기도를 계속할 것을 간구합니다.
시편 89 편
에단은 자신이 지켜본 것같이 이미 시작된 붕괴의 슬픈 광경으로부터 한편으로는 육체적 이성의 지령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쩌면 자신과 다른 모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기만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단은 당시 그의 눈에는 가려져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고자 하는 그의 굳건한 결의를 표현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관해서는 실제의 체험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에단은 ‘하나님의 인자하심들’ 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복의 풍요로움과 다양함을 깊이 되새김으로서 이 시험을 이기려 한 것입니다.
3. 본문 2절은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이 어려운 역경에 처하여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면서 꿋꿋이 참고 있는 이유를 말합니다.
비록 지금은 준엄한 징계 아래 처해 있다 해도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의 명백한 표현에서 결코 눈길을 돌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노여움을 품고 계실 때도 그 백성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지 않는 한 그 누구라도 감히 입을 열어 자유로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기를” 이라는 표현은 영감을 받은 선지자가 그려내는 진리가 자신의 가슴속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여하한 일들이 일어났을지라도 그것이 내 마음으로부터 미래에 관해서만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을 입게 될 것이라는 굳건한 소망을 지울 수 없었고 또 우리는 언제라도 똑같은 신념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변함없이 지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비록 당시로서는 완전히 눈에서 가려지고 볼 수 없게 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오직 믿음으로 굳게 껴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는 모든 징표들을 우리들로부터 거두실 때에라도 우리는 절망하는 일이 없이 이 시에서 노래하듯이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굳게 새길 수 있기 위해서도 이 대목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 89 편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는 곧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그 목적에 이르거나 완전한 성취를 이룰 때까지 끊임없이 확대되고 계속될 것이라는 뜻의 은유입니다.
둘째 구절 “주의 성실하심을 ........”에는 무엇인가 보충해 의미를 살펴야 됩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변화로부터 벗어나 있는 천계(天界)의 영원하고도 확고한 노정(路程)보다도 더 굳건하다는 것입니다.
“하늘” 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하늘뿐 아니라 이 세상의 전체 구조를 초월한 하늘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지닌 하늘나라의 영광 속에서 이 세상의 요소들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본문 3-4절은 “(3)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 에게 맹세하기를
(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입니다.
1) 자신과 모든 성도들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안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굳건한 자세를 지킬 수 있도록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목소리로 앞 절에서 선지자가 말한 것을 자신의 권위로서 말씀하시고 또 승인하시는 것으로 소개합니다.
믿음이란 응당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한 것이기에 이 절에서처럼 하나님이 친히 우리들 앞으로 나아오셔서 자신의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신다고 묘사하는 화법은 선지자 자신이 이 사실을 단순히 서술하는 경우에 비해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가까이 나아오기를 기대하실 때는 우리가 그분께로 허물없고 친근하게 나아가므로 그 경망함에 대한 책임을 책망받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바탕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추정(推定)할 수 있는 근거는 없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 않으신 것을 단순히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소망할 수 있는 바탕도 전혀 가질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종 다윗과 맺은 언약을 자신의 엄숙한 맹세로 확증하시면서 선포하실 때 하나님이 행하시는 약속의 진리는 더 확고하고 범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고대에는 맹약이나 언약을 놋쇠 서판(書板)에 새기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선지자는 이 구절에서 고대의 이러한 관례로부터 한 가지 은유를 빌어다 씁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가리켜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은 자” 라고 함으로서 두 가지의 구별된 칭호를 다윗에게 적용시킵니다.
시편 89 편
전자의 칭호를 아브라함에게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시편의 문체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한 가지 일이 두 번씩 되풀이된 것은 시편의 특징적 기술방법으로 아주 흔한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 라고 불려졌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의 후손들보다도 더욱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뛰어난 용모를 가진 그의 형제들보다도 그를 더욱 아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계약의 원인이나 기원을 찾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한 선택으로 보아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곧 이어지는 “종”이라는 표현은 다윗이 그의 봉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손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왕이 지니신 엄위함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이러한 왕의 존귀하신 위엄 속에서 그가 경솔하게 처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의 위임을 받고 하나님의 합당하신 부름에 순종하여 통치권을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이 요컨대 개괄적으로 어떠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선지자가 이러한 언약을 자신의 개인적인 용도를 위해 부당하게 적용하지 않고 오직 전체 백성들의 쓰임을 위해 끌어왔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맺으심에서 다윗이라는 한 개인과의 관계를 생각하셨던 것이 아니라 세세(世世)에 영원토록 존속될 전체 교회라는 존재를 보고 계셨던 까닭입니다.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라는 구절은 부분적으로는 솔로몬과 다윗의 나머지 후계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극히 엄격하고도 합당한 관점에서 영원한 기간의 영존(永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실증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왕으로 임명함에 있어서 옛 아브라함과 맺었던 사사로운 언약과 그에 따른 경의만을 분명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다스림의 권능을 다윗과 그 후손들에게 위임하셔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 진정한 왕권이 땅위에 확립될 때까지 모든 백성들의 공공복리를 위하여 다스릴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시편 89 편
시89:5-8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시인은 먼저 주의 기사와 신실하심에 하늘과 땅 위의 성도들이 찬양할 것을 말합니다(5-). 다음에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없다고 재삼 역설합니다(6-8).
1. 본문 5절은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비롯될 수 있다는 것까지 말한 후, 시인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보편 찬양으로 말머리를 돌립니다.
먼저 기자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을 말하면서 언약의 거룩하심을 보다 높이 찬양하고 확대하려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의도도 없음을 올바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기자는 하나님이야말로 예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실 정당한 권리를 지닌 분이며 반드시 믿음을 드려야만 할 오직 한분 하나님이신 동시에 우리가 일호(一毫)의 주저도 없이 확고한 신뢰를 안주시킬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임을 주장합니다.
“기사”라는 말도 이런 바탕에서 생각할 때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보전하시고 지키시는 일 중에 분명히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가리키는 말로 국한시킵니다.
하늘이 주의 놀라운 권능의 가장 탁월한 증거요, 설교자들이라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범위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여기에 나오는 “찬양”이 우리가 이야기한 바 있는 ‘목적’을 특별히 가리킨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주석가들 중에는 “하늘”을 교회의 구원 안에서 얻어지는 공통 기쁨과 찬양이 곧 그들 가운데 있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는데 이 설명은 참으로 합당한 해석입니다.
5절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는 표현에서 확인됩니다.
마지막 구절에서도 같은 주제를 다루며 “성실”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맺으신 약속에 자신의 신실을 명백히 드러내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더할 수 없는 빛을 조사(照射)하기 위한 의도임이 분명합니다.
2. 본문 6-8절은 “(6)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 있는 자 중 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시편 89 편
(7)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
(8)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 이 주를 둘렀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기사에 대하여 지금까지 말했던 것을 예증으로 더욱 뚜렷이 드러내 보이며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라고 강력히 부르짖습니다.
선지자가 “궁창”이나 “하늘”에 대하여 말하는 이유는 땅위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뛰어난 존재라도 인간이 처한 상태가 얼마나 하찮고 비참하며 얼마나 수치와 부끄러운 질책의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지 잘 압니다.
이런 까닭에 하늘 아래 하나님의 권능과 겨룰 수 있는 탁월한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을 쳐다볼 때 우리는 곧 감탄으로 인해 넋을 잃게 되며 참되신 한분 하나님을 우리의 눈에서 멀리 격리시키는 수많은 신들의 모습을 그려보게 됩니다.
6절의 마지막 구절의 “권능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라는 말은 처음 구절에 대한 일종의 설명입니다.
“궁창”이나 “하늘”이란 표현을 해, 달, 별들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이 구절의 문맥 자체로서도 타당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진정 뜻하는 바는 하늘에서조차도 하나님 한분만이 동반자나 동류(同類)가 될 수 있는 아무런 존재도 없이 홀로 지극히 높으신 분임을 간곡히 표현하는 것에 틀림없습니다.
‘신들의 아들들’(칼빈 ; 권능있는 자 -한글)이라는 명칭이 이 구절에서 천사들을 가리킨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천사들이 그 기원이 땅에 있지 않고 타락한 육체를 입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하늘의 영들이기 때문입니다.
광신자들의 몽상처럼 천사들이 신성의 본질이나 그 실체의 일부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 안에서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 보이신 것처럼 이런 명칭이 천사들에게 붙여진 것은 천사들의 본성과 우리들 인간의 본성을 뚜렷이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피조물에게서보다 천사들 안에서 더욱 큰 위엄이 빛나고, 우리들 인간은 그 위엄을 생각할 때 찬탄으로 넋을 잃고 황홀경에 빠질지라도 천사들이 그 뛰어남으로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고 손상을 미친다든가 우주의 주권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 권세를 함께 나룰 수 있을 만큼 하나님 가까이 근접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의 특별한 주의를 끌어 마땅한 요점입니다.
시편 89 편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자기 스스로의 말씀으로 천사들은 자신의 종이며 언제라도 자신의 명령을 준행할 준비를 한다고 선포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오직 한분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수없이 많은 신들을 날조해 냅니다.
곧 이어지는 절도 이와 똑같은 취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를 확언합니다.
이런 표현 속에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듯이 이성도 없고 그 한계마저 넘어서서 천사들을 극구 찬양하는 극악한 미신을 견책합니다.
그러나 만일 천사들이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워 떤다면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완전한 주권을 홀로 지니신 것이므로 천사들이 종으로만 여김받고 그들 스스로의 위계(位階)를 결코 벗어날 수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천사들이 ‘하나님을 둘러 있는 자들’(칼빈 ;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있는 자 - 한글)로 묘사되는 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경호원들처럼 둘러싸고 있음과 또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절에서도 역시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라는 표현으로 같은 내용이 다시 한번 되풀이되는데 이렇게 거듭되는 표현은 우리에게 적어도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도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두려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일에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라고 선포하는 말에서 앞 절의 묘사와의 사이에 따뜻한 자비의 정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후자의 구절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신다는 것과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라도 주께서는 그의 전후좌우 어디에서나 영원히 변함없이 성실하심을 알게 됩니다.
시편 89 편
시89:9-14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먼저 본문 중 이 앞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신 사실을 가리킵니다(9-10).
다음 구절들은 앞에 말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기사(奇事)가 천지 창조의 하나님에게는 가능한 것임을 지적합니다.
성도들을 보호하시며 도와주시는 이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십니다(시121:1-8).
그 다음 말씀은 성도의 신앙근거를 더욱 공고(鞏固)하게 해줍니다(14-).
성도의 신앙은 다만 하나님의 능력(11-13)에만 의지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와 “진실”을 의뢰합니다.
1. 본문 9-10절은 “(9) 주께서 바다의 흉용함을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평정케 하시나이다
(10) 주께서 라합을 살육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 나이다” 입니다.
저자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권능에 관해 말한 내용이 이제 그가 명백한 용어로 찬양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으로부터 기적적 구원에 대해 당연히 그 주의가 돌려질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대홍수를 갑자기 쏟아 내리시지도 않고 온 세상에 넘치도록 홍수를 퍼붓지 않으시기에 하나님이 바다의 흉용을 잠잠케 하시는 것으로 이야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9절과 10절을 연관시키고 싶고 이 구절들을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들이 위험을 넘어갈 수 있도록 바다를 가르고 길을 열어 주셨던 홍해의 이야기를 끌어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시인은 곧 “주께서 라합을 살육당한 자같이 파쇄하시고”라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으로 기자는 교회의 구원에서 명백히 드러내 보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인상적으로 그립니다.
기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북돋우고 보다 큰 자유와 활달함을 지니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의지할 수 있도록 그와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시편 89 편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라고 확언하면서 기자는 교회의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행위의 양식은 언제나처럼 비슷할 것이며 이런 모습은 한편 하나님의 무량(無量)하신 지혜 안에서 때를 불문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결론짓습니다.
2. 본문 11-13절은 “(11)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12)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 (13)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입니다
시편 기자는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셨던 똑같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일에 자신의 최상의 주권을 행사하시고 계심을 세 번째 거듭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 하늘에서도 땅위에서도 모든 일을 실제로 다스리시고 관할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이 이제는 우연의 법칙 아래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것이며, 온 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 땅과 땅 위에서 지으신 모든 것을 유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땅 위의 모든 사물이 사람의 뜻에 의하여서나 혹은 우연이 지배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혼란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마치 이방인들이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지으신 모든 일들을 내려다보시면서 그분 자신은 만드신 만물에 조금도 마음을 쓰시지 않고 그저 하늘과 땅을 아름다운 극장처럼 여기시면서 한 관객의 입장으로 만족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일일 것입니다.
‘남쪽’과 ‘북쪽’에 대해 언급하고 아울러 ‘다볼산’과 ‘헤르몬산’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시편 기자는 백성들의 다듬어지지 않은 이해에 언어를 적응시킵니다.
즉 선지자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그 어느 것 하나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를 나타내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게 선지자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13절의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 라는 표현과 함께 연관해 생각합니다.
3. 본문 14절은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입니다.
시편 89 편
여기서 보이는 차원 높은 찬양은 신실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홀로 나타나 보이는 것보다 그 소망을 확고히 함에 있어서 한결 커다란 효력을 지닙니다.
하나님에 관한 언급이 있을 때에는 언제라도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각별한 표현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길 필요가 있으며 어리석은 자들이 아무리 그들의 정신적 명상과 사념에 몰두할지라도 하나님이 참으로 어떠한 분이신지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하는 쓸모없고 하찮은 사색에 빠져 우리의 자아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연관 아래 기자는 왕들이 지닌 징표와 화려한 모습에 대한 은유 속에 “의”와 “공의”가 주권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보좌의 기둥들이라고 명백히 선포하며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은 비유컨대 그가 거느리신 종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입고 계신 장식은 자주 빛 예복이나 왕관 또는 홀(笏)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의와 공평하신 판단이며 자비의 아버지시고 그 백성의 신실한 보호자이심을 지적합니다.
그들 안에 자신을 위하여 권위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아무것도 없으며 위엄을 지니게 할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 땅의 왕들은 다른 것들에서부터 그들에게 권위의 옷을 입혀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빌어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모든 능력을 다 지니고 계시며 다른 어떠한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의와 자비로우심과 그 성실하심 속에서 자신이 지니신 빛을 우리에게 비치시는 것입니다.
시편 89 편
시89:15-18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성도들이 복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 본문 15-16절은 “(15)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 의 얼굴빛에 다니며
(16)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 입니다.
1) 먼저 선지자는 이 구절에서도 교회에 관해 같은 취지의 진리를 반영하려 애씁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해 그 생각의 눈이 먼 자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도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선한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며 담대하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함으로서 닥칠 수도 있는 역경 속에서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이외의 다른 의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2) 다음으로 선지자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복이 주어진 자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 삶의 영양을 받아 양육되고 유지되는 것이지만 모든 이가 그들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 내린다는 확신으로 자신의 복된 상태를 자축할 수 있는 체험을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체험은 하나님이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주신 뛰어난 특권이며 이로 인해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게 바라면서도 그 은혜를 함부로 대하며 발아래 짓밟아 버리는 불신자들의 짐승같이 배은망덕보다 더 비참한 상태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풍요로운 은혜를 내리면 내릴수록 그 감사를 모르는 마음이 더욱 사악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이란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북돋우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게 하심을 깨닫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으로 선지자는 이런 복으로부터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는 사람들은 복 있는 자들인 사실을 증거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기쁘게 누릴 뿐 아니라 그의 자비하심에 대한 신뢰에서 그들이 가는 삶의 모든 노정을 정신적 평화와 안정 속에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이 “저희가 주의 얼굴빛에 다니며” 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이기도 합니다.
시편 89 편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 다닌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복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이를 잃어버리지 않고 굳게 잡을 수 있도록 지키고 보호해 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으로부터 주의 섭리 안에 안주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와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도 같은 취지입니다.
이 구절 속에 담겨 있는 뜻은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 뿐 아니라 풍요로운 이상으로 엄청난 토대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종일”이라는 말을 쓴 것은 확고하고도 동요하지 않는 끈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간접적으로는 오직 헛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고 자신의 힘을 믿고 스스로 자고(自高)하면서 우쭐거리는 어리석은 자들의 오만을 비난하려는 의도입니다.
불안한 기초 위에 서 있는 자들이 끝내 타락하고 만다는 것은 불가피한 귀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지 않고는 참된 관용이나 능력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라고 부르짖는 바울의 고결한 자부 속에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아울러 지금 처한 상황과 장차 다가올 모든 재난에 담대한 마음으로 대처하는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2. 본문 17절은 “주는 저희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그의 신실한 종들을 결코 연약한 상태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따라서 앞 절과 같은 감정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호칭 “저희 힘의 영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영광을 받고 누릴 수 있는 바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종들이 언제나 그침 없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양육되고 유지된다는 의미입니다.
신실한 종들을 돕고 양육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영광스레 빛납니다.
그러나 신실한 종들의 입장에서는 항상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바쳐야 마땅할 것이라는 점을 깨우칩니다.
이러한 것이 신실한 종들이 꾸리는 현재의 생활이 지닌 진실이라면 우리 종들의 영적 생활에서 이와 같은 영광을 더욱 진실하게 받들고 찬양 드려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신 성품을 보여주는 이 실예(實例)를 보다 더 높고 크신 것에까지 확대하여 생각할수록 그와 동시에 이 모든 관대하심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심에 전적으로 유래되는 것일 뿐 전혀 다른 요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편 89 편
이로부터 신실한 종들은 값없이 관대하심을 베푸시고 언제나 한결 같이 도와주시고 계신 하나님께 온전히 둘러싸여 있고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3. 본문 18절은 “우리 방패는(우리 방패 든 자는 - 칼빈)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속하였음이니이다” 입니다.
백성을 보호한다는 으뜸가는 책임이 그 백성의 왕이라는 신분에 속한 것이었던 연유로부터 신실한 자들에 관한 안녕의 유지가 그들에게 주신 왕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이 이 구절에 명백히 보입니다.
그러나 이 왕국의 종말을 생각하기를 소홀히 할 만큼 이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왕국에 선지자의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힌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머리에 은혜를 넘치게 부으시고 이로부터 교회의 몸 전체에 넘치는 은혜를 내리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때문인 사실을 선지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왕을 가리켜 선지자가 먼저 ‘방패든 자’(칼빈)라고 은유적인 호칭으로 부른다는 점에서 이 표현은 성경 말씀에서 흔히 취하는 비유적인 표현 방법입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이 ‘방패든 자, 곧 왕의 손과 그 사역(事役)으로 수호받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수호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사실을 알립니다.
또한 이런 은혜로운 행위가 결코 인간적인 매개체가 아닌 보다 차원 높은 근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임을 선지자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두 번째 구절도 같은 고백을 되풀이 표현한 것으로 왕은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이 내려 주신 것이므로 왕으로부터 나오는 수호는 하나님의 복인 사실을 확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왕국에 관해 말한 바가 보다 위대한 어떤 사실의 그림자로 우리가 그 왕의 권능에 의해 유지되고 수호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복을 지켜 주실 분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그리스도 한분을 정확히 은유한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시편 89 편
시89:19-23 주께서 이상 중에
이후 구절들은(19-37)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윗을 신정국(神政國)의 대표자로 택하여 세우시고 계약하신 사실을 진술합니다.
이 사실을 통하여 그 택한 백성을 위한 계약의 성격이 알려집니다.
(1)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여 능력 있게 하십니다(19, 20).
(2)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십니다(22, 23).
1. 본문 19절은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 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 입니다.
1) 먼저 시인은 이제 마침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 앞에 이 백성들의 공동의 선(善)을 보전하기 위해 세움을 받은 왕은 하늘로부터 주신 왕이신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 왕은 사람들의 투표에 의한 것이 아니며, 또 이 왕은 자신의 손으로 최상의 통치권을 찬탈한 것도 아니며, 또 타락하고 더러운 간계로 비밀스럽게 왕위에 앉으신 분도 결코 아니고 오직 공동의 선을 보전하기 위한 유일한 도구로 하나님이 택하시고 후원하심과 지도하심 아래 왕의 의무를 다하도록 선택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이 왕을 다른 모든 왕들과 명백히 구별합니다.
비록 바울 사도가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13:1)라고 가르친 교훈이 진실이긴 하지만 세상적 방법으로 통치권을 획득한 세상의 모든 다른 왕들과 다윗 왕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친히 종 다윗에게 왕권을 내리시고 자신의 권위로 다윗을 왕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이 구절 중 원문(原文) 에서 ‘그때’ 라는 뜻으로 쓰인 불변화사 או (아즈)는 ‘이미 오래 전에’ 또는 ‘옛날에’ 라는 뜻으로도 풀이됩니다.
이 불변화사가 들어있는 전후의 의미는 어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왕손(王孫)으로 태어나 계승권에 의해 대를 이어받기도 하고 선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기도 하며 폭력과 군대의 힘으로 왕권을 획득하기도 하는데 이 왕국의 창시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또 주께서 자신의 음성으로 친히 다윗을 택하시고 왕위에 앉히셨다는 뜻입니다.
시편 89 편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사무엘에게 계시로 나타내셨던 사실 외에도 이 구절에서 복수의 형태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곧 똑같은 하나님의 뜻이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되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 사실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다른 선지자들에게도 전달되어 다윗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명을 받아 왕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일치된 증거를 보일 수 있도록 역사하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당대에는 다른 여러 사람의 뛰어나고도 찬미를 받아 마땅한 선지자들이 살았었기에 이토록 중차대한 일이 이들로부터 숨겨졌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사실에서 오직 사무엘의 이름만 나타나 있는 것은 그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공포자였을 뿐 아니라 왕에게 기름을 붓는 성직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에게 꿈으로나 혹은 ‘이상(異象)’ 중에 말씀하셨던 까닭에 이 계시의 마지막 형태가 여기서 언급됩니다.
2) 다음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말씀에 관한 본질 또는 그 요지가 뒤따라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왕국을 다스릴 최상의 ‘머리’이자 통치자로 선택하신 강한 자 또는 능력 있는 자에게 언제나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능력있는 자”라고 불리는 것은 본래부터 그 자신이 어떤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키도 작고 형제들 중에서조차 멸시받았던 사람이어서 사무엘까지도 그를 무심히 보고 넘겨버릴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를 택하신 후에 그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셨으며, 또 왕의 자리에 앉을 사람에게 합당한 다른 뛰어난 자질들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사도들을 택하실 때 그들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주셨을 뿐 아니라 사도들이 직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은사들을 그들에게 함께 부어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언급된 다윗의 능력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결과였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임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다윗이 왕으로 그 백성을 이끌어 갈 만한 합당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은 두 번째 구절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라는 표현에서 더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바로 이 구절에서 다윗이 지녔던 강력한 능력의 근원이 추적됩니다.
이 대목에서는 모든 말이 다 강력한 시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높였으되”라고 선포하셨을 때, 이는 곧 하나님이 다윗에게 손을 뻗치시기 전에는 다윗이 무명(無名)의 낮고 비천한 지위에 처해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같은 의미가 “백성 중에서” 라는 표현에서도 나타납니다.
시편 89 편
결국 이 구절이 지닌 뜻은 다윗이 당시에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으며 백성 중에서도 매우 비천한 계층에 속해 있었고 어떤 뛰어난 표징을 지닌 흔적도 없을뿐더러 그 다윗이야말로 그가 비천한 목자로 살았던 벽촌의 고향에서 형제들 중에서조차도 가장 보잘것없고 업신여김을 받는 존재였다는 사실입니다.
“택한” 이라는 말로 하나님은 마치 자신께서 다윗을 승귀시키신 까닭을 그의 선하신 기쁨 이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지 않도록 우리를 금하신 것처럼 오직 우리가 그의 자유로우신 의지에 관해서만 생각하도록 일깨우십니다.
2. 본문 20-21절은 “(2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21) 내 손이 저와 함께 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도 선지자는 동일한 명제, 곧 다윗 자신에게는 스스로 왕권을 누릴 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었고 오직 모든 것을 자신의 자비로우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은혜로 입은 사실만을 거듭 확인합니다.
이런 뜻이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표현된 “찾아” 라는 말 속에 담긴 요지로 ‘내가(하나님) 그를 택하여 높인 것은 오직 나의 값없는 자비로움에서부터 나온 것이니라’ 고 하나님 스스로의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종”은 어떤 형태의 공로를 나타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가리킬 뿐입니다.
이 구절의 표현은 하나님 자신이 권위로 다윗의 통치권을 확증하고 비준하셨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으며 하나님이 이 사실을 승인하신 것이라면 다윗이 지닌 왕권의 합법성은 의문의 여지도 허락지 않습니다.
하반절의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택하심에 대한 부가적 확증으로 볼 수 있고, ‘기름부음’은 다윗의 방책에 대한 결실이 아니라 그가 천만 뜻밖으로 얻은 은혜로 그가 왕이라는 귀한 지위에 높임을 받는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홀로의 뜻으로, 오직 자신의 선하신 기쁨에 따라 다윗을 사무엘의 손으로 기름 부으실 자로 예정하시고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다음에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왕국의 보호자요 옹호자 되실 것을 덧붙입니다.
하나님은 사역을 시작하신 후 그 일을 중도에 버리시는 것이 결코 합당하신 뜻이 아니며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끊임없는 과정으로 보다 나은 길로 이끄셔서 마침내 완전한 성취에 이를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89 편
3. 본문 22-23절은 “(22)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곤고케 못 하리로다
(23) 내가 저의 앞에서 그 대적을 박멸하며 저를 한하는 자를 치려니와” 입니다.
다윗에게 원수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가 불법의 폭력에 억압 받지 않게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그를 보호하고 지킬 준비를 갖추고 계신 것을 분명한 말씀으로 선포하십니다.
다윗은 다른 왕들의 예로 보듯이 전쟁에서 정복당해 그들을 정벌한 자가 명령으로 제시하는 화평의 조건을 여하한 해악에도 무릅쓰고 승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처럼 그의 원수들을 “악한 자”라고 부르는 것은 다윗의 왕권이 포학과 강탈로부터 멀리 격해 있기에 그의 통치권을 타도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악하고 불의한 무리 속에 포함되리라는 사실을 암암리에 나타냅니다.
다윗과 그의 후계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매우 안전할 뿐더러 강력한 보호를 받기에 원수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다윗과 그의 후계자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점에 관해 훗날 하나님이 이 왕국이 지대한 괴로움 당한 것을 묵인하셨던 고로 다윗의 후계자들이 하는 수없이 외국이나 이방의 왕들에게 엄청난 공물을 바쳤던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나 이 사실이 하나님의 약속과 배치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왕국의 힘이 크게 줄어서 약화되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그 뿌리가 살아 있어서 그리스도의 손 안에서 왕국이 마침내 강고(剛固)하게 확립될 때까지 충족하게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후계자들과 백성들이 훗날 이 유일한 주의 복을 사악하게 배척함으로 왕국이 때때로 그들 자신의 태만함으로 흔들리기도 하고 손상을 입고 끝내 멸망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왕국의 영원성에 관한 그의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 이들의 배은망덕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소망을 갖게 하시고 또 그 소망을 보전하게 하십니다.
그밖에도 다윗을 “대적”하는 자와 “저를 한하는 자”라는 언급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다윗의 대적들에게 반대해 개입하시지 않는 이상 이 왕좌는 그에 대항해 적의를 품고 항거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을 것이며 또 그만큼 갖가지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면함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시편 89 편
시89:24-29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본문은 앞에 이어 계속 다윗으로 대표된 택한 백성을 위한 계약의 성격이 알려집니다.
1. 본문 24절은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다윗에게 내리셨던 은혜를 끊임없이 부어 주실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에 스스로 신실하심을 증거 하시고 자신은 언제나 은혜롭고 관대하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표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최초에 그의 선하심에 대한 증거를 다윗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후에도 항상 자비하신 모습으로 다윗을 대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구절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전체 교회에 대한 언급을 함께 품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 구원의 전 과정 속에 나타난 사실을 뜻하며 저 어리석은 술책가들과 궤변자들의 소르본느 학파의 무리가 지껄여대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에로 향한 최초의 입장만을 가리킨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의 “뿔”은 그의 영광과 위엄과 그의 능력을 모두 나타낸 말입니다.
그 의미는 이 왕국이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번영하고 왕성하리라는 사실입니다.
2. 본문 25절은 “내가 또 그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오른 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니” 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이 왕국의 광대한 확장으로 주의를 돌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성들이 그들 스스로의 사악 때문에 그 길이 막히고 주의 복을 빼앗기게 되었으며 그들의 기업이 약속에서 나타난 것보다 훨씬 큰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다윗이 다스리는 기간 동안 이 왕국이 다시 확장되도록 하실 것이며, 이에 따라 백성들이 바다로부터 유브라데스강에 이르기까지 일대의 전토(全土)를 소유하게 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던 것이 다윗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만, 다윗의 치세로부터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추리할 수 있습니다.
시편 89 편
“강(江)들” 이라는 표현은 많은 수로들로 갈라져 있는 유브라데스강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수리아 해안에 인접해 흐르는 여러 다른 강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3. 본문 26-27절은 “(26)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입니다.
이 절에서는 다윗 왕이 지닌 으뜸가는 탁월성이 바로 그가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여김 받을 것이라는 사실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시편 82편 6절에서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이 왕으로 임명하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영예로운 칭호입니다.
그러나 26절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왕에 대해 특별한 사실이 함축되는데, 이것은 그 왕이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비록 세상의 왕들이 그 왕권을 훨씬 큰 나라에서 마구 휘두를지라도 하나님이 택하신 이 왕이야말로 이들 땅의 왕들보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지위에 앉히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높은 지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단 한 사람의 왕에게만 고유한 특권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점이 진실이 아니라면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들보다도 위에 계시다는 교의에 대한 증거로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여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히1:5)라고 기록한 추정(推定)이 불확정적일 뿐 아니라 당치 않은 모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천사들, 왕들, 성령으로 거듭나 양자가 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을 그의 아들로 인정하신다고 약속하셨을 때, 다윗은 유일한 특권에 의해 이 명칭이 적용되는 다른 모든 사람들 위에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윗이 하나님의 장자라 불리는 다음 구절에서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까닭은 그가 세상의 다른 모든 왕들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영예는 아울러 인간이나 천사들 모두의 위엄을 초월하는 거룩한 영광입니다.
만일 죽음을 면치 못한 존재인 다윗이 어떻게 천사들과 동등시 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된다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시편 89 편
즉 다윗이 순수한 한 인간으로서의 다윗 한 사람으로만 상정(想定)된다면 결코 천사들과 동일한 지위로 높임을 받을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그리스도의 사람의 성품을 내포하고 있는 한 최상의 지위를 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4. 본문 28-29절은 “(28)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 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29)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왕국을 영원히 세우실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이 왕국을 세우셨다는 사실이 수없이 되풀이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28절이 지닌 표현의 순서가 “나의 인자함” 을 먼저 앞세웁니다.
다음에 “나의 언약” 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이 값없는 무상의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언약이 세워지는 기초일 뿐 아니라 언약이 손상되지 않고 보전되는 바탕임을 함축적으로 뜻하면서 이 언약의 원인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맺으신 언약이 결단코 지켜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다윗에게 항상 자비로우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이 왕국이 지닌 불가침성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으로부터 위대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곧 이어지는 29절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이 영원히 왕위에 앉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시면서 그의 성실하심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하늘의 날”이란 표현은 하늘 아래에서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유 위에서 영원히 그침이 없는 영속성을 나타내기 위해 쓰인 어귀입니다.
이로부터 그리스도 곧 엄정하고도 합당한 의미에서 오직 그 안에서만 이 영원이 지속되는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실 때까지는 이 예언이 어느 기간 안에 그 충만한 성취를 이룰 수는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예나 지금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무궁한 영생이 보장된다는 교훈입니다.
시편 89 편
시89:30-37 만일 그 자손이
본문은 다윗의 후손으로 지칭되는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실지라도 아주 버리시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30-33절은 “(30)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31)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33)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 며” 입니다.
1) 시편기자는 더욱 멀리 나아가 만일 다윗의 자손이 죄악으로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로우심으로 대하실 것이며 그들의 범죄를 저지를지라도 완전히 버리실 만큼 엄중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에 더욱 엄밀한 효능을 부여하기 위해 선지자는 항상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표현방식을 쓰며 마치 하나님께 그의 언약이 지닌 명백한 조항들과 계약의 말씀에 엄밀히 일치하는 어떤 요구라도 제시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도입합니다.
이 말씀이 추가된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죄악으로 떨어지기 대단히 쉬우며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끝없이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신이 맺으신 계약의 한 조항까지라도 계속 확고하게 이루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타락하기 쉬운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다른 방법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다윗의 자손들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서는 자신의 허물 때문에 언약으로부터 자주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의 용서하시는 은혜로 그런 경우에 치료책을 마련하셨던 것입니다.
2) 나아가 인간들은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순종한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기에 하나님은 인간들이 벌을 받지 않고도 피할 수 있다고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다면 결국 사람들이 죄악에 빠지는 것을 장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징계 속에서도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나타내셔서 그들의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정도까지 보응을 내리시지 않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시편 89 편
그리고 가벼운 범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크고 무거운 죄악에 대해서까지도 용서를 내리실 것을 약속하신다는 사실도 또한 주의 깊게 살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등의 표현 방식은 까닭이 있습니다.
또 ‘범죄’, ‘불성실’, ‘죄악’ 등의 말을 쓰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과 다윗의 자손들을 화해시키시는 인내와 자비로우심이 심히 가증스럽고 사악한 죄악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3)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가족으로 삼으실 때 일부 열성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 즉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부패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은 육체와 그 육체의 부패를 금방 완전히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 우리의 성품이 일시에 바뀌고 천사들에게 요구되는 바와 같은 완전무결함을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는 완전한 성취로부터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체의 장막에 거하는 한 악마와 같은 허구에 작별을 고하고 우리에게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용서의 성소로 우리 모두가 향해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구절에서 그의 교회의 가족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범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그를 반역하는 죄를 범할 것이라는 사실이 뚜렷이 밝혀져 있습니다.
4) 이 말씀을 옛 이스라엘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은 불합리하고 사악한 해석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 대한 중보자(仲保者)로 나타내실 형태에 대한 그림자로 이 왕국을 세우셨다는 것을 이 말씀의 어길 수 없는 요지로 받아들입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로 입증될 뿐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들로부터도 분명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추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여기서 말한 영원한 왕위를 어디서 발견하겠습니까?
다윗의 계승자들의 계보에 둘째 왕은 왕국의 많은 부분을 탈취 당했고, 그 결과 12지파 중에 간신히 한 지파와 다른 한 지파의 반을 지탱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이후 왕국이 수없이 많은 손상을 입었으며 그에 따라 왕국의 명맥을 잇기에 급급하였을 뿐더러 수없이 많은 재난을 당한 끝에 마침내는 왕과 백성 모두가 사로잡혀 끌려갔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왕의 아들들이 왕이 보는 눈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왕 자신도 죄인으로 취급당할 대 그 왕위의 위엄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왕하25:7).
시편 89 편
훗날 유대 백성은 그들의 고향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왕국의 영예도 칭호도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였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왕관이 진흙 속에 던져질 것임을 세 번씩이나 예언하면서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21:27) 라고 선포합니다.
5) 이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결론은 이 왕국에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영원히 존재함이 사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입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비를 입을 수 있는 바탕으로서 메시아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오시지 않았다면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의 우리들 중 그 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6) 이제 지금까지 말한 이 왕국의 특성들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왕국의 영원한 존속에 관한 언급이 우리를 축복받은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무적(無敵)의 힘은 우리의 마음을 평강 상태로 이끌고 고취하며 또한 사단이 우리를 대적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이 시들지 않도록 하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형태의 죽음에도 무릅쓰고 우리의 믿음을 실족시키지 않듯이 여기서 약속된 용서 역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약속의 신실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임도 이 구절로부터 동일하게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진리에 대하여 스스로 반대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결코 전적인 타락이나 실족을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썩지 않는 말씀의 씨앗이 그들 속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중요한 진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은 전체적인 배교(背敎)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마땅한 개인 안에서 경건함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신실한자들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 내던지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그들 안에서 소멸되어 버린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죄악으로 빠져드는 일이 이따금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에 신실한 자들이 넘어질 때마다 절망으로 휩싸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가증한 죄악까지도 모두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실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같이 다윗은 적어도 겉모습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 사람처럼 보였고 그 때문에 다윗은 다시 자신 안에 성령이 회복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증오하실 또한 치명적인 범죄를 행한 자들에게까지 용서에 대한 희망을 남겨두신 이유는 우리의 죄악의 극악성이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해하는 일을 못하거나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89 편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두세 번 타락했던 자들의 회개를 받아들임에 있어 몹시도 주저했던 열조들의 과도한 준엄성을 나무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지나치게 과도한 인내로 인하여 한번 고삐가 풀렸을 때 사람들이 쉬 죄를 범하지 않도록 적절한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러나 극도의 준엄 속에도 역시 적잖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범하고 또 그의 계명을 깨뜨리는 죄인들에게 자신의 자비로우심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고 선포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대한 우리의 증오와 혐오감을 고무하고 또 그 죄의 유혹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싫은 용어들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비록 신실한 자들이 모든 경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양식으로 그 행위를 다스리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받아 마땅할 때에라도 죄의 용서가 그의 언약 속에서 약속하신 본질적 조항이기에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자비로우실 것이라는 요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그의 율법 안에서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우리가 행하도록 요구하신다면 율법 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용(無用)한 것일 것이고 또 그 요구도 결코 성취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로마서 4장 14절에서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라고 확증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들도 이러한 진리에 속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1-34).
7)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담대하여 자유롭게 범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언급된 것은 동시에 응징으로 그 응징에 의해 하나님은 그가 자녀들이 범죄하는 것을 미워하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마땅히 그들이 받아야만 할 징계에 대해 경고하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권고하십니다.
시편 89 편
그러므로 치료제로서 작용하는 이 아버지로서의 응징은 범죄를 유발케 하는 부당한 방종과 사람들을 절망으로 빠뜨리는 극단적인 가혹함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영감 받은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징계하실 때 사람들이 하는 방식처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실 것”으로 사무엘하7장 14절의 예언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방법을 따라 그의 백성들을 징계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아버지의 진노가 그 자녀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거나(다른 방법으로는 백성들의 선을 권장하는 일이 실패할 것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또는 징계의 과업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온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점을 말씀하신 그 속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떤 대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힘을 나타내시면 즉시 우리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은 그의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심으로 능히 행하십니다.
두 구절이 지닌 의미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신실한 신자들의 죄를 벌하실 때마다 그 벌에 자비로우신 절제를 지키실 것이 틀림없고 또한 이러한 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모든 형벌을 그만큼의 치료제로 여겨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이 점에서 교황주의자들은 터무니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의 참 목적과 그 효과를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보복을 가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만족이 일어나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시 용서와 방종으로 스스로 나아가면서도 이에 의하여 하나님의 손과 그 징계로부터 자신들을 건져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철저히 정화하신 후에 그들을 그의 사랑하심과 은혜로우심을 입을 수 있는 자로 새롭게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의 자녀들이 지닌 악을 교정하는 이외의 다른 일체의 의도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따르면 성도들이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확언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의 과중함으로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의 손길을 스스로 제지하시며 그들의 연약함을 충분히 고려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을 때에도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라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위한 유익과 구원의 목적으로 그들을 고치시는 중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 말씀 가운데 인칭의 변화가 있음을 주목합니다.
시편 89 편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라는 말씀이 있은 후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라고 덧붙이는데 이 구절에서 “그에게” 대신 “그들에게” 라는 복수의 형태가 쓰였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된 복수의 인칭이 곧 ‘자손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우리가 다만 그리스도 한분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비를 구하고자 할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밖에 없음을 아울러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절의 마지막 부분에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성실하실 것이라는 것보다 한결 강조적 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유효성을 띠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성실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이 진실하고 거룩하나 그 누구도 율법에 의해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면 율법 속에서 약속된 구원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 구절 중에 그가 신실하시기에 물론이지만 한편으론 그의 택하신 백성들이 그들의 변덕으로 인하여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심 때문에도 그의 언약이 확고하고도 변함없는 효력을 지닌 것으로 약속하시면서 우리를 더욱 가까이 인도하십니다.
2. 본문 34절은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참 지식이 오직 말씀으로부터만 얻어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그의 언약에만 일사불란하게 고정시키도록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그가 한번 택하신 후에는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는 말씀은 정녕 우리에게 한층 더 두드러지고 귀한 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리를 믿기는 그만큼 더 어렵습니다.
또 우리는 때때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며 우리를 유혹하고 의문을 품게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논란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혀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바라보고 그 언약 안에서 이미 주어진 구원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뚜렷이 드러내 보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충족한 것으로 여기고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지 않을 것을 가르치십니다.
시편 89 편
하나님은 앞 절에서 만일 다윗의 자손들이 “내 법을 버리며” 라고 말씀하셨고, 지금 이 구절에서는 주의 법에 대한 침해를 다시 암시하시면서 비록 다윗의 자손들이 그들의 불경스런 행위에 아무런 보상을 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보복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라는 구절 속에서 선포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에 합당한 방식으로 일관성 있고 끈기 있는 행동을 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 때문에 언약이 파괴되거나 그 효력이 소멸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의 죄악을 값없이 용서하심으로 그들의 죄악을 도말하시고 주의 언약에 손상되지 않게 즉각의 효과로 예방하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편에서 신실하실 것을 약속하실 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그의 의도하시는 길에 던져놓은 온갖 장애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께서 약속하신 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행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잇따라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라는 앞서 내세운 명제의 예증을 계속 추구하십니다.
다윗의 불충한 후손들 때문에 그의 선하심에 대한 열매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지않게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일 것을 말씀하십니다.
배은망덕과 반항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그가 지니신 성품이 완전한 불가변성에 바탕을 두기에 그 효력이 소멸되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죄가 하늘에 이를 만큼 흉악해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늘보다도 훨씬 높으신 것이어서 이 모든 죄악을 넘어서 반드시 이를 사해 주시는 법입니다.
3. 본문 35절은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말씀하셨던 바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사실을 맹세로 확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지 않은 일에 그의 거룩한 이름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므로 이 구절의 말씀으로부터 다윗에게 행하신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인지 잘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들이 곧잘 불신으로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구제책을 이토록 자비로우신 성품으로 제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비할 바 없는 사랑과 인자하심에 대한 한 징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실하고도 동요되지 않는 믿음으로 이토록 확고하게 증거 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리에겐 변명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시편 89 편
우리의 구원에 관한 깊은 관심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말씀에 완전한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맹세를 돌이키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단순한 약속을 우리가 충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해도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약속에 대한 서약으로 다시 맹세를 덧붙이시기까지 합니다.
“한번”이라는 부사는 이 맹세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약속에 대해 여하한 형태의 위약도 염려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으로 맹세하심을 확증하시는데, 그 까닭은 그 자신 외에 맹세하실 수 있는 더 위대한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맹세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으며 또한 본래부터 우리의 주권자이시듯 하나님을 우리의 주권자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스스로’ 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나의 거룩함으로”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한결 강조적인 표현방법입니다.
이런 표현이 그의 영광을 보다 효과적으로 크고 높게 할 뿐 아니라 믿음을 더 확고히 하는 것에도 한결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택하신 땅위의 거소(居所)로 돌아보도록 되부르는 것으로 성도들이 하나님을 먼 곳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기게 하십니다.
이런 연관 아래 우리는 “거룩함” 이란 말이 곧 성소를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두고 맹세하시고 다른 어떤 것을 두고도 맹세하시지 않는 것은 그분이 앉으실 자리로서 지정하신 성전을 가리킴에 있어서 결코 자신을 이탈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우리의 미흡한 이해력에 그의 언어를 적응시키기 위해 땅위에서 눈앞에 뚜렷이 나타나게 거하는 그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맹세의 생략된 형식에 관해서는 이미 앞 시편에서 이런 형태가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일반적인 맹세의 방식이라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고 불손하게 사용함으로서 하나님의 보복을 스스로 초래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합당한 사려없이 함부로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돌연하고도 끝맺음이 없는 표현 방식은 그들을 제지하고 반성할 기회를 부여한 일종의 굴레였던 셈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들의 통상 관습에서 어떤 것을 빌어쓰는 것은 드문일이 아닙니다
시편 89 편
4. 본문 36-37절은 “(36)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37) 또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 하셨도다” 입니다.
이제 통치권의 권리는 항상 다윗의 자손들에게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뒤따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그 후손과 왕권이라는 두 가지 요소는 서로 결합된 것으로서 이러한 말씀에 의하여 왕국의 영원한 존속이 약속되며 따라서 이 왕국은 결코 낯선 이방 종족의 사람에게 그 왕권이 넘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해와 달은 여기서 증인들로 제시되는데 해와 달 역시 언젠가는 쇠하고 멸망하기 마련인 피조물이지만 그래도 지구나 공기보다는 한결 안정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은 모두 끊임없는 변화를 안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열등한 세계 전체가 끊임없이 동요하고 변화할 때 해와 달 안에서는 보다 확고한 상태의 일들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어쩌면 다윗의 왕국은 자연의 일반 질서에 따라 평가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왕위가 르호보암 시대에 뒤흔들렸던 일을 두고 앞에서 우리가 비평했던 것처럼 훗날 이 왕국이 부서지고 전복당한 일들을 보더라도 이 예언이 다만 다윗에게 국한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저 외적인 모습으로는 이 왕국의 위엄이 다시 재건될 소망이 없이 끝났을지라도 해가 낮에 빛을 발하며 달이 밤에 빛을 비취는 일을 멈춘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나아갈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지 않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새의 뿌리로부터 나온 가지들 안에서 이러한 말씀은 그 완전한 의미로 족히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시편 89 편
시89:38-45 그러나 주께서
본문 중 38, 39절의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국란으로 인하여 폐위 당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근심거리를 하나님에게 맡기는 극히 솔직한 타개(打開)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것은 그의 강력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본문 중 40-45절은 이스라엘 나라가 외국 군대에게 참패를 당하여 이웃 나라들의 조롱을 당하며 그 원수들은 의기양양하게 된 사실이 여기 진술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스라엘이 저렇게 불행하게 된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의 받는 재앙을 우연에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돌립니다.
1. 본문 38-39절은 “(38) 그러나 주께서 주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노하사 물리쳐 버리셨 으며 (39)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 입니다.
1) 기자는 왕국의 부패함 때문에 예언이 성취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불평합니다.
기자가 하나님에 대해 거짓을 비난하지 않고 우리를 가족처럼 대하시는 하나님의 가슴에 기자가 자기 근심과 슬픔을 허물없이 내맡겨 버리는 태도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합당한 것으로서 그 틀을 세운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당연하고도 꼭 필요한 것임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절망한다든가 반역적으로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린다든가 하지 않고 자신이 신의 은총의 모든 증거를 빼앗겼다고 비탄과 애통에 잠긴 사람은 도저히 어떤 당연한 한계를 넘어섰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불평을 한 뒤에 우리는 시편 기자가 이 시의 끝부분에서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평온한 순종의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복종에 의하여 선지자는 자신이 지닌 불평을 다스리고 바로 잡습니다.
이 시편 암송을 불법으로 주장한 유대 율법 학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심어주신 것을 정죄하는 어리석고 불경스런 불만에 이끌린 자들입니다.
기자는 감히 자유롭고 허물없이 하나님께 자신의 진정을 털어놓고 간청드리면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신의 마음 속을 품은 것을 털어놓음으로서 불신과 참을성 없는 자신의 성품에 대해 보다 효과적으로 항거하려는 이외의 다른 의도가 없습니다.
시편 89 편
“주께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노하사 물리쳐 버리셨으며” 라는 말을 헬라어와 라틴어 어법에 따라 비평한다면 세련되지 못한 어색한 문장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장 강조하고 싶은 말씀이 제일 먼저 나타나고 다음에 보다 강조점이 적은 말씀이 덧붙여진 까닭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이 점에 관해서는 우리들의 배열 방식을 따르지 않는 고로 여기서 사용된 순서는 히브리어의 관용구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세 번째 동사는 하나님이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왕에 대해 노하셨기에 그 왕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가르치면서 이런 변화에 하나님 편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어떤 이들은 선택받은 백성의 원수들이 흔히 그들이 하는 방식대로 몹쓸 조롱을 읊은 내용이 이시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견해는 이 시에서 나타나는 몹시 신랄한 불평을 전체 교회가 터뜨리는 불평으로 볼 때 일어나는 어려운 점을 회피하기 위해 채택한 의견으로 이런 의견은 동시에 그 때문에 이 시편 전체를 비난했던 앞서 언급한 유대 율법 학자의 견해에 대해 커다란 장애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사람들의 공통적인 감정과 이해에 입각하여 말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선지자는 한번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왕은 결코 하나님의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 속에 굳게 심어져 있었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2)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곧 이어지는 39절의 언약의 무효화에 관한 “주의 종의 언약을 미워하사 그 관을 땅에 던져 욕되게 하셨으며”를 같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을 경망하시고 변덕스런 분으로 비난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귀한 약속의 말씀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완전한 무(無)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점을 불평할 따름입니다.
성도들이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시13:1, 79:5).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44:23) 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그 언제라도 이것이 잊어버리기 쉬운 성품과 잠든 상태를 하나님께서 처하신 상태로 읊은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성도들이 그들의 육체와 정감이 자신들에게 소리치는 온갖 유혹의 시험들을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드러내 놓음으로서 그로 인해 그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연약한 상태로부터 하나님께서 속히 구해 주시기를 간청하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그토록 무섭고 처절한 황폐가운데 처하여 이런 환경에서라면 인간의 본성이 너무나도 이끌리기 쉬운 허약한 마음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이나 또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아직 명백히 실현되기에는 너무도 모든 것이 멀리 격해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 등이 모두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시편 89 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선지자 역시 그토록 비참하고 혼란으로 점철된 광경 앞에서 동요함이 없이 버틸 수 있을 만큼 강한 심장을 가진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허물없이 들어감으로 해서 선지자는 그가 슬픔으로 완전히 압도당하여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구제책을 찾고 있는데 만일 그가 이러한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면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하나님을 비난하기만 하고 이런 방식의 구제책을 아주 도외시해 버렸을 것입니다.
이 구절의 끝에 덧붙여진 “그 관을 땅에 던져” 라는 말씀은 ‘왕관을 땅에 던짐’으로서 왕국의 분할과 해체를 의미하려 한 것 같으며 그렇지 않다 해도 르호보암 시대에는 적용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뒤에 곧이어 언급된 내용들은 훨씬 더 흉측한 재난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일 이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면 이 시편의 기자는 성사(聖史)에서 그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 네 사람의 지혜자들(왕상4:31)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에단이 아니고, 어떤 다른 사람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이렇게 애매하고 곤란한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는 각자가 자신이 보기에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는 추리를 택하도록 맡기고 싶습니다.
2. 본문 40-41절은 “(40) 저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보장을 훼파하셨으므로 (41) 길로 지나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 입니다.
울타리를 부수고 무너뜨리며 파괴하는 것을 다른 어떤 원인으로부터 쉽사리 찾을 수도 있었을테지만 선지자는 경건하고 거룩한 감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이 이 재난의 장본인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이 하나님이 진노하심에 불을 붙이지 않는 한 인간들이 그들 마음대로 이 왕국을 멸망시킬 수는 없다는 믿음이 선지자의 가슴 속에 굳게 심어져 있는 까닭입니다.
은유적 어법의 말씀에 이어 선지자는 이 왕국이 마치 울타리가 무너진 밭이나 들판처럼 모든 지나가는 사람들의 희생물로 노출되었으며 약탈자들이 함부로 그로부터 취할 수 있도록 드러낸 땅같이 되었다고 하소연합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너무 비통스러운 이 재앙이 더욱 악화된 상황에 대한 통분함이 그에 따르는 굴욕, 곧 왕이 “그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라는 구절 가운데 드러납니다.
속되고 불경스러운 이방의 불신자들이 이 선지자 앞에서 마치 그들이 무척이나 바라던 기회가 닥쳐온 것처럼 이때를 놓칠세라,
시편 89 편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왕인가? 천사들보다 뛰어나고 그 왕위가 해와 달이 존재하는 동안 계속된다는 그 왕인가?’ 라고 조롱을 퍼부었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욕설이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므로 선지자는 택하신 왕의 위엄과 신분이 하늘의 기름부음으로 인준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당하는 뼈아픈 조롱과 욕설에 대하여 하소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3. 본문 42-44절은 “(42) 주께서 저의 대적의 오른손을 높이시고 저희 모든 원수로 기 쁘게 하셨으며
(43) 저의 칼날을 둔하게 하사 저로 전장에 서지 못하게 하셨으며
(44) 저의영광을 그치게 하시고 그 위를 땅에 엎으셨으며” 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왕의 원수들 편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의 근거는 어떤 이들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허약한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뜻이 아니고서는 원수들이 택한 왕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선지자가 명백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백성에게 내려진 재난의 수(數)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증거의 수와 비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는 한 온 세상이 그들의 온갖 음모와 힘을 다한다 해도 이 왕국의 안전을 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대적들이 승리를 얻었다고 표현했더라면 진술 자체는 타당하고 진실한 것이겠지만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기 위한 의도로는 합당한 표현방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표현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대적하여 원수로서의 길을 달음박질하여 마침내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고, 또 심지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까지도 대적하여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세우신 이 왕국이 그토록 비참한 상태로 파괴되고 몰락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반성합니다.
4. 본문 45절은 “그 소년의 날을 단촉케 하시고 저를 수치로 덮으셨나이다” 입니다.
우리가 선지자의 마음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한 개인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이 왕국 상태를 한 인간의 일생과 비교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상황에 관한 선지자의 하소연은 하나님이 왕국을 성대케 하시고 왕국이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끝내는 쇠퇴케 하신 장본인이시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시편 89 편
이 왕국의 운명을 이제 한창 그 힘과 활력이 증대하고 있는 꽃다운 젊은이가 갑작스럽고도 급격한 죽음으로 요절을 당하고 마는 것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사점에 근거를 둔 비유는 지극히 적절한 것입니다.
당시 왕국이 처했던 상황을 하나님의 약속과 비교할 때 아직 채 꽃잎을 완전히 피지 못하고 초창기의 여명 속에 꽃눈을 맺고 있던 왕국이 비통하게 갑작스럽게 썩고 허물어져 그 신선함과 아름다움이 시들어 버리고 마침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비유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앞서 이야기한 바를 마음속에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가 현실의 상황이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하지 않으며 또 약속의 말씀으로 그 택하신 백성이 품도록 한 소망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하소연할 때 선지자가 이런 상위(相違) 때문에 하나님을 거짓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런 명백한 차이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앞서 내세우려는 것임을 명백히 인지(認知)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되새기면서 보다 굳센 믿음과 신뢰와 담대함을 지니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격려하려는, 아울러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처한 이와 같은 믿음의 곤경을 털어놓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스스로 신실하심을 드러내 보이시지 않을 수 없다는 깊은 믿음과 신뢰를 지니고 있음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들이 당한 슬픔을 삼켜 버리고 그 슬픔을 간직하고만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기도로부터 어떤 은혜를 이끌어 내기를 단념해 버린 탓입니다.
반대로 진실한 신자들은 더 솔직하고 친근히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 하나님께 간구드릴 때 더 담대히 자기 마음속에 도사린 불신과 대항해 싸울 수 있고, 또한 은혜로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소망 안에서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시편 89 편
시89:46-48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시인이 앞에 진술된 비참한 이스라엘의 실정에 비추어 간곡히 기도를 드립니다.
(1) “여호와여 언쩨까지니이까”(46절) 란 간곡한 질문(시13편).
(2) 인생이 “허무” 하고 연약함을 알아 주시므로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는 애소 (47, 48, 시103:13-16).
1. 본문 46절은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입니다.
슬프고 비참한 교회 상태에 하소연 한 후 기자는 스스로 기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기자가 지금까지 토한 애통과 비탄의 말들은 비록 육체적인 감성에서 우러나온 것일지라도 믿음과 결부된 것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불신자들 역시 때대로 걱정으로 뒤흔들린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한 것은 어떤 것을 불문하고 모두 거짓된 입술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의 하소연과 기도를 함께 결부시킴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약속의 진리를 믿는 그의 확신을 결코 잃지 않는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와 같은 표현 방식은 79편 5절에서 처럼 이것이 길고 계속적인 재난의 연속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라고 직접 어법으로 하나님을 향GO 물음으로 선지자는 암암리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비로우신 얼굴로 대하게 되면 그때 즉시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 구절의 뒷부분에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택하신 백성을 아버지로서의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지 않으시는가에 대한 이유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언급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견뎌내야 할 모든 고통이 우리의 죄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응징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2. 본문 47절은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입니다.
시편 89 편
1) 전체 교회에 내려진 준엄하고도 애통할 재난들에 대한 원인이 교회 자신의 죄악 대문임을 고백하고 나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굽어 살피시도록 하나님께 보다 더 효과적인 간구를 드리기 위해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인간의 생명이 너무나 짧은 것임을 호소합니다.
그와 동시에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한다면 우리 인간들은 무익하게 창조된 것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통한(痛恨)의 정이 이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을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절의 마지막 구절인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라는 말씀을 먼저 생각함으로 생각을 더듬는 것이 좋습니다.
이 질문 중에 신실한 선지자는 하나님이 친히 아버지로 인간들에게 나타내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그들을 이 세상에 두셨다는 확고한 제 1 원리를 제시합니다.
또 하나님의 선하심이 심지어 들의 가축 떼와 모든 종류의 저급한 짐승들에게까지 뻗치고 있는 마당에 그 서열에서 짐승들보다 한결 차원이 높은 인간이 단 한 순간이나마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완전히 물리치심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진실을 그 반대로 가정한다면 우리 인간은 끊임없는 슬픔 속에서 스러져 가느니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 시에서는 우리 인생의 단촉함이 명백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너무 짧아서 하나님이 그의 은혜에 대해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서둘러 적시(適時)에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의 삶이란 너무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어서 영영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 절이 말하고자 하는 취지가 이런 연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먼저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하나의 대원칙으로 제시되고 이 원칙으로부터 만일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아버지로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면 우리 인생들은 결국 헛되이 태어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 인생의 과정은 너무나 짧은 것이기에 하나님이 인간들을 서둘러 복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 인간의 삶은 곧 지나가고 마는 것이어서 영원히 기회를 누릴 수 없게 된다는 논증이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성도들이 일할 시간을 하나님께 청구함에 있어서 너무나 오랜 시간을 얻으려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89 편
다음은 우리가 땅위 순례자 상태에 있는 동안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실지라도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무익하게 창조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계속 소망을 지닌 생활이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땅에서 우리들로부터 가려져 있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그들의 기도에 빨리 응답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촉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겸손한 한계를 지키고 그들의 역정이 지나치지 않도록 절제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이와 같은 태도가 결코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두 번째 요점에 관하여 우리는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의 생활을 이끌어가야 하지만 만일 하늘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연다면 이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주는 풍요로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틀림없는 진실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런 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지나친 연약함을 생각할 때 먼저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이 현실 생활 가운데 먼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않고서는 결코 이런 일을 할 수 없음이 확실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 밖에 내는 하소연을 어떤 완전한 원칙에 따라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들 백성이 정립(鼎立)되고 동요되지 않는 마음 상태로부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들의 마음속에 작용하는 애정의 소용돌이 또는 그 격렬함으로부터 야기되는 다소간의 과도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현존하고 있는 사물의 상태로부터 측량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거짓된 결론으로 이르게 되는 기준에 의해 판단하는 것임을 인정합니다.
이 점에 관하여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히12:6)라는 구절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에게 실제로 자신의 은혜 체험 증거를 무시하지 않을 만큼 그들에게 준엄하신 분이 아니므로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그 생활이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은 항상 진리입니다
2) 절 뒷부분은 우리 기도가 단일적 획일적 과정에서 흘러나온 게 아니라 때로는 과도한 슬픔 때문에 배역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과도한 슬픔이나 공포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그 마음을 완전히 점령해 버릴 때에는 성도들이 점차 그들을 좀먹어 들어가는 심각한 부주의와 소홀함을 체험하게 되고 한동안은 그들의 마음을 장차 다가올 생명에 대한 생각에 집착시키지 못하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시편 89 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념에 잠긴 그 순간에 즉시 하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짙은 안개가 끼었더라도 만약 우리가 하늘을 주의깊게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우리의 시야를 가리지 못하지 않느냐 입니다.
신자들이 믿음의 생기를 잃는 것과 믿음이 완전 소멸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또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고 또 갖가지 시험에 직면하여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영적 생활에 자신의 마음을 바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지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라는 질문이 참된 원리로부터 유래한 것일지라도 무언가 범과(犯過)를 저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비록 가장 잘 짜여진 기도에서조차도 우리는 항상 용서의 필요를 지니는 법입니다.
과도함에 대해 비난의 여지가 있는 말이나 감정이 언제나 우리의 입에서 스며 나올 수 있는 고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굽어 살피시고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3. 본문 48절은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입니다.
이 절은 인간 생명의 짧음에 대해 이미 언급했던 내용에 대한 확증을 내포합니다.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조속히 나타내시지 않으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결코 오래 존속치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이라고 번역된 גבר(게바르) 는 ‘그는 강하였다’ 또는 ‘그가 우세하였다’라는 의미의 동사 גבר(가바르)에서 파생된 것으로 시인이 여기서 아무도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없다는 진리를 보다 강력히 표현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시편 89 편
시89:49-52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본문에서 계속되는 시인의 기도는 신앙 이론으로 나타납니다.
(1) “다윗에게 맹세하신” 것을 기억해 주시기를 원하는 애원(49절, 시89:35).
(2)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 해 주시기를 원하는 진정(陳情) 등 입니다(50, 51, 계2:9)
1. 본문 49절은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이전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입니다.
선지자는 그의 추론처럼 하나님이 결코 하나님답지 않으실 수 없으며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열조들에게 나타내셨던 선하심이 이제는 끝난 것일 수 없다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옛 기억을 회상하면서 자신을 격려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심이 옛 구약시대 때 열조들을 대하듯 온유하시지 않으심을 알게 되었을 때 이들 사이의 대비는 정녕 경건한 자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고, 동시에 다른 생각들이 그 마음을 사로잡게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며, 또한 은혜를 베푸시는 과정 속에서 약화되시는 법도 없습니다.
이 절의 뒷부분을 어떤 주석가들은 관계사의 위치를 달리 삽입하여 ‘주께서 맹세하셨던 주의 이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라고 풀이하며 이런 해석으로 앞 구절과의 연결을 꾀합니다. 이러한 해석상의 견해를 우리는 이의 없이 받아들입니다.
관계사가 생략되어도 그 뜻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주신 말씀의 진실성에 분명한 증거들을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그의 약속과 지금까지 체험할 수 있었던 약속의 많은 유익한 열매를 나타내 보시게 합니다.
“성실”이라는 표현 속에서 그들 신실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열조들에게 내려주셨던 관대하심에 대한 모든 증거들이 이제 그들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임을 보다 큰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분이며 모든 시대를 통하여 다윗의 자손들에게 인자하심을 베푸실 것이라고 맹세하셨던 고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열조들이 누렸던 만큼이나 그들에게도 미칠 것을 기대하는 변함없는 근거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시편 89 편
2. 본문 50절은 “주는 주의 종들의 받은 훼방을 기억하소서 유력한 모든 민족의 훼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입니다.
1) 신실한 성도들은 다시금 불신자들이 그들을 조롱하고 있음을 하소연합니다.
이런 하소연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도록 그를 감동시키시는데 매우 큰 효능이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우리의 인내심을 조롱하면서 하나님은 그가 하신 말씀에 신실하지 못하신 분이라고 우리를 속여 믿게 한 다음 우리를 절망으로 빠뜨려 버리는 온갖 사악한 시험들이 비통하고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하나님은 우리들의 연약한 마음이 그 시험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 주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원수들의 비난과 조롱이 단순히 그를 견딜 수 없게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믿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신자들의 믿음과 인내를 조롱하는 원수들의 오만을 제지해 주셔야 한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뒷부분에서 선지자는 자신이 ‘많은 민족들에게서’ 또는 ‘큰 민족들에게서’ 온갖 종류의 비난과 모욕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앞에서와 똑같은 감정을 한층 더 고조시킵니다.
여기서 쓰인 히브리 원어 רבים (라빔)이 ‘큰’ 또는 ‘많은’ 이란 뜻을 갖습니다.
2) 하나님의 종들에 관해 일반적으로 이야기한 후에 선지자가 복수를 단수의 형태로 바꾼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들 개개인이 개별적으로 보다 더 기도의 의무에 충실하고 열중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입니다.
곧이어 “내 품에 있사오니” 라는 표현 역시 대단히 강조적 입니다.
이 표현을 보면 사악한 자들이 먼 거리에서 비방과 욕설을 퍼붓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욕설들을 면전에서 토하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온갖 욕설을 가슴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이토록 야비한 언동을 끈기 있게 참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완악한 모습이기도 하며 이와 똑같은 교의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불손하고 오만한 자들로 가득 차 있을뿐더러 이들이 우리를 제물로 삼아 조롱과 비방으로 자신들의 즐거움을 삼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이런 종류의 사악한 수사법을 악한 자들에게 교사(敎唆)하는 일에는 가히 뛰어난 스승이어서 교회가 당하는 갖가지 재난들은 곧 그들에게 그 흉측한 입놀림의 기교를 부릴 자료를 제공하는 셈입니다.
어떤 이들은 “품”이라는 말을 가슴속의 은밀한 애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지나치게 세련된 해석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시편 89 편
3. 본문 51절은 “여호와여 이 훼방은 주의 원수가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훼방한 것이로소이다” 입니다.
1) 시인이 확증한 것은 사악한 자들이 그들의 오만불손한 말로 성도들을 괴롭힌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심지어 하나님까지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런 진술을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지닌 단순함이 그로 인해 경멸을 받는 온갖 능욕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 하나님께 자기 스스로의 동인(動因)을 지키시도록 청원하는 것이 교회라는 인격체 안에서 하나님이 손상을 받는 때문에 청원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은혜를 입을 수 있는 훨씬 더 강력한 탄원인 까닭입니다.
이는 이사야가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니라”(37:23) 라고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악한 강도 랍사게는 자신이 덤벼들었던 비참한 유대인들을 향해서만 조롱했다고 생각했고, 또 그들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곧 항복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조롱을 두고 자신이 그 사악한 자가 직접 능욕을 퍼부은 대상이 되셨던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선지자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주의 원수” 라고 부릅니다.
흉포한 적개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가운데 교회가 그의 보호하심 아래 존속하는 하나님의 위엄에 능욕을 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2) 뒷부분 중 ‘메시아의 발걸음’(칼빈 ;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행동 - 한글) 이란 이사야 52장 7절에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는 구절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뜻합니다.
히브리어 עקב (아케브)는 간혹 ‘뒤꿈치’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다른 많은 구절에서와 같이 ‘발바닥’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낱말을 ‘한 걸음’ 혹은 ‘걸음’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이는 역시 같은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걸음걸이’는 발을 나타내기 위해 취한 제유법입니다.
이에 대해 ‘발’은 비교적인 환유법에 따라 그리스도의 오심을 의미합니다.
사악한 자들은 유대인들이 구속에 대한 소망을 굳게 간직하고 또 구원이 그들에게 약속되었기에 모든 역경을 인내하고 견디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치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선지자들의 모든 증거가 다만 우화에 불과한 것처럼 오만한 태도로 신실한 자들의 인내를 조롱하였습니다.
시편 89 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한번 오셨고, 그 결과 하늘의 영광을 받으셨는데도 지금까지 여전히 이 더러운 개들은 마치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시며 그의 교회를 잊어버리신 것처럼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다만 하나의 기만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의 소망을 비웃습니다.
4. 본문 52절은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입니다.
우리는 일부 주석가들이 마치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말이 한 편의 시편이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그 시편을 끝맺을 때는 적절치 않은 것이라 한 양, 이 절이 본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언하면서 필사자가 이 시편을 기록하면서 덧붙인 구절로 생각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이 시편에서 교회의 재난들을 몹시 슬퍼한 후에 이제는 그의 슬픔의 비통함을 진정시킬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찬양의 말을 한다고 믿습니다.
“아멘 아멘” 은 이 책을 구별하기 위해 쓰였다는 견해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든지 이런 기쁨의 말씀에 기자가 의도한 바는 자신이 처한 힘겨운 고통 속에서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구원에 대한 보다 생동적인 소망을 지니려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