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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 욥과 그 삶
욥기 1:1~5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욥기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부족한 이 사람을 기도로 도와 주셔서 욥기에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 알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희비가 엇갈립니다. 기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구약성경의 아가서라면, 곤고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은 욥기입니다.
그 동안 저는 목회를 하는 동안 삼일기도회에서는 대개 성경 중의 한 책을 택해서 강해설교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로부터 ‘욥기 강해’를 한 번 해 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받아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그 정도로 곤고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욥기는 42장으로 되어 있는, 성경에서 가장 긴 책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 책을 이해하는 데는 깊은 학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욥기가 가르치는 중요한 내용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문학으로도 걸작입니다. 세계적인 명작이라면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극작, 괴테의 파우스트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이러한 명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글입니다. 칼라일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세계 최대의 글이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성경”이라고 대답하고 나서 “성경 중에 최대의 것은 욥기”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욥기를 낭독했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읽는 동안에, 그만 심취가 되어 칼라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고 스스로 욥과 같은 기분이 되었으며, 듣는 사람들도 마치 욥이 직접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칼라일 자신도 어디까지 읽었는지 알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서론적인 말씀을 길게 드릴 정도로 시간이 여유있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욥기 1장 1절을 다같이 한 번 읽어보십시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이 살고 있던 지방은 아라비아에 위치한 우스 땅이었는데, 그곳은 유프라테스강 가까이에 있었고 또 갈대아 지방으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아마 그곳은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갈대아 우르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우스 땅에 욥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우스 땅의 자랑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욥이 어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그가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욥은 순전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그는 완전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장성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것을 명령합니다.
2. 그는 성실했습니다.
그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이 성실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교활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위선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재능보다 성실입니다.
3. 그는 흠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서 6장 4절에 보면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있나?”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흠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욥이나 다니엘은 흠이 없이 살았습니다.
4. 그는 정직했습니다.
욥은 내적으로는 순전하고 외적으로는 정직했습니다. 안팎이 다른 것이 아니라, 안팎이 같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할 때 그 행위는 사람들에게 공의롭게 나타납니다. ‘정직’이란 말은 본래 ‘곧다’는 것입니다. 죄의 길은 구부러진 길이요 정직한 길은 곧은 길입니다. 그는 양심대로 살았습니다.
5.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도덕의 근본이 됩니다. 종교가 없는 도덕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습니다. 욥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노예가 주인을 두려워하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에게 갖는 두려움, 다시말해 신뢰와 사랑을 수반한 두려움으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성도들의 두려움은, 고통이나 재난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시 89:7).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참된 용기와 인내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6. 그는 악에서 떠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악한 마음, 악한 행위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을 피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사실 어떤 때는 선을 행하는 것보다 악을 피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악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악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러한 유혹에 굴하지 않고 모든 악에서 떠나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말씀한 것처럼 우리 성도는 모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잠언 4장 14~15절에서는,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라고 합니다.
그의 손과 발뿐만 아니라 눈까지도 악을 피했습니다. 욥기 31장 1절에서 그는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고 말합니다. 총각이 처녀에게 주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지만 유부남이 처녀에게 주목하는 것은 악한 일이지요.
욥이 완전하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에 있어서 완전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욥은 이 세상에서 크게 형통했고, 자기 나라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욥은 세 가지 면에서 번영과 풍요를 누렸습니다.
1. 욥은 자녀의 번영을 누렸었습니다.
본문 2절에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라고 합니다. 요사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만, 구약 시대에는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을 인간의 번영과 행복의 요소로 생각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표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의 외적인 번영의 첫째 요소로서 자녀를 꼽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욥은 그의 행복은 많은 자녀를 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들을 성결한 자들로 성장시키는 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그에게 있어서 매우 큰 위안이요 축복이었습니다. 욥의 자녀는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었습니다. 남자의 수와 여자의 수 그리고 그 합계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일곱이란 수와 셋이란 수는 완전을 나타내는 것이며, 열이란 수는 많은 것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리고 욥의 아들의 수가 딸의 수보다 많은 것은 그의 자산의 증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2. 욥은 많은 재산을 가졌었습니다.
본문 3절에서는,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땅에 사람이 많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소유로 하여 사고 팔고 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어느 곳이나 사용만 하면 되던 때여서 욥이 차지하고 있던 땅의 넓이로 그의 재산이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부와 재산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와 재산은 선한 사람에게도 주어집니다. 반면에 부와 재산이 가장 좋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와 재산은 악한 사람에게도 주어집니다. 성경에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욥은 부와 재물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누린 큰 번영은 그의 경건함에 빛을 더해 주었습니다. 사람은 다 약하고 부족해서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불행입니다. 그러나 욥은 그 많은 재산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빛나게 사용했습니다.
3. 욥은 귀한 명예를 가졌었습니다.
본문 3절 하반에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했습니다. 욥은 그가 거하고 있는 땅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돈이 많은 것과 존경을 받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많은 돈을 바로 사용해야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돈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이 다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많은 재물과 지혜로 인해 그의 나라에서는 그를 중요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욥은 의롭고 정직했는데도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정직과 경건은 번영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큰 집안을 거느리고 있었고 또 할 일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집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욥의 경건과 번영에 관한 이야기가 그의 큰 환난의 이야기보다 앞서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경건과 번영이 인생의 일반적인 재앙뿐만 아니라 특수한 재앙으로부터 사람을 구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경건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경건하게 사는 사람도 환난을 당합니다. “모든 일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으로 임합니다.” 번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돈이 있으면 어려움도 면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는 여왕처럼 앉아 있으니 슬픔을 보지 않게 되리라”라고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욥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에 눌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누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번영은 귀한 번영이요 참된 번영이었습니다. 그가 자녀를 통해서 위로를 얻고 있었던 일은 그의 번영을 말해 주는 하나의 실례였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정해진 어떤 날에는 서로 돌아가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녀들이 성장하여 이 세상에 정착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낙입니다. 그의 아들들은 결혼해서 분가했고, 딸들은 출가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일이 형통하고 각자가 배불리 먹을 뿐 아니라 잔치를 베풀고 돌아가면서 초대하여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 부모는 더없이 기쁜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 되는 것이 그렇게 좋기에 그렇게 되도록 바라며 힘써 도와줍니다.
더구나 가정을 이룬 형제 자매들이 늘 친하게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한없이 즐겁고 다른 사람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시편 133편 1절에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의 자녀인 우리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자녀들에 대한 욥의 관심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5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은 그 즐거운 잔칫날이 지나면 자녀들을 위한 특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도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가족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가정은 결코 복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지 않는 가정은 울타리 없는 정원과 같습니다. 가족이 모여서 함께 예배 드림으로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모를 공경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회심케 하는 은혜는 베풀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회심케 하는 은혜를 주시는 통로가 될 수는 있습니다. 모니카의 그 간절한 인내의 기도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인 성 어거스틴을 낳지 않았습니까!
욥은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힘썼습니다. 그는 그의 자녀들이 집에 금을 지니는 것보다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지니기를 원했으며, 이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기기보다 다음 세상을 위하여 거룩하기를 바랬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욥의 관심과 노력은 엘리의 무관심과는 대조가 됩니다.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자녀가 어린 시절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장성한 자녀들이 부모의 슬하에서 보호를 받지 않는 때도 부모의 기도에 의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자녀들을 성결케 하기 위해서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날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 첫 시간을 바쳐야만 합니다.
욥은 그 자녀들을 위하여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자녀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 가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부모는 그 집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세밀해야 합니다.
욥은 그 자녀의 명수대로 이름을 불러 가며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그들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가며 하나님께 기도드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기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기질과 환경과 시련과 유혹과 죄와 욕구 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속죄는 각 사람에 의해서, 특별히 각 사람을 위해서 수행되어야만 합니다.
욥은 그의 자녀들이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부인하지 않을까 하여 매우 염려했습니다. 욥의 자녀들은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들을 위해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생겼을 때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라도 발을 씻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와 믿음의 행위는 날마다 되풀이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범죄를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먼지는 묻자마자 닦아버리면 깨끗합니다. 내가 약하고 세상이 험해서 죄를 범하고 나면, 죄를 깨닫는 순간 하나님께 회개하면 됩니다. 오래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욥은 항상 그리고 매일 제물을 드렸고 꾸준히 헌신했으며 그것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정직하게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항상 섬겨야 합니다.
사람은 같은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항상 동일한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부패한 본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범하는 죄는 거듭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발을 씻는 생활을 합시다. 우리도 욥처럼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