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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고 요단강으로 / 김영대 목사
본문의 주인공 나아만이 걸렸던 문둥병은 간단한 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자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모든 삶의 희망을 꺾어 버리는 심각한 병입니다. 그는 아람나라의 장관이요,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요, 큰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병에 걸린 환자입니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화려한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고 있지만 그 속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썩는 문둥병에 걸려 있단 말입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기쁜 소식이 나아만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그 집에 포로로 잡혀와서 집안 일을 돕고 있던 하인 소녀가 있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 주인이 제 고향 땅 사마리아에 계신 하나님의 선지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문둥병을 고칠 수가 있을 텐데"하는 것입니다.
귀가 번쩍 뜨인 나아만 장군은 왕을 만나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요단강 물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하라는 말을 전합니다. 나아만은 그 말대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였더니 깨끗하게 나음을 얻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이렇게 순탄하게 치유 받은 것이 아니라, 하마터면 치유 받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 뻔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몇 가지 그가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적 생각과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과 잘못된 태도 때문에 본질을 잃어버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질의 중심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벗어야 할 오해와 편견, 선입견과 고정관념, 부정적 인식이 있습니다.
밤을 까먹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알밤은 참 맛있지만 쉽게 먹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먼저 찌르는 가시껍질을 신발로 조심스럽게 밟고 막대기로 정 가운데를 후벼서 가시 껍질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러나 가시 껍질을 깐 것으로 다된 것은 아닙니다. 까고 나면 딱딱하고 윤기 나는 알밤 껍질이 또 있습니다. 그 껍질을 칼이나 이빨로 벗겨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안되죠. 그 속에는 또 텁텁한 비늘 같은 속껍질이 있습니다. 그것까지 다 벗겨내야 고소한 알밤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알밤 같이 맛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벗겨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 어떤 껍질을 벗어야 할까요?
오늘 나아만을 통하여 세 가지 벗어야 할 껍질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신분과 지위의 껍질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제국 국방장관, 백전 백승한 용사의 지위와 신분에 맞는 영접과 대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단지 비서를 내보내 하나님의 말을 전합니다. 나아만은 자기의 기대와 생각이 무너지자 몹시 분노했고 감정이 상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신분과 체면을 앞세우므로 자기가 거기 왜 왔는지에 대한 본질을 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존경하는 장군님 어서 오십시오. 먼길에 얼마나 피곤하십니까? 들어오십시오. 위하여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소리를 나아만은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와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11절)
이 얼마나 잘못된 관심입니까?
그는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엘리사 -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인간 엘리사가 자기를 치료해 주고 자신에게 존경을 표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의 사람인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러 오면서 은 이십 달란트, 금 육천 개, 의복 열 벌을 싣고 왕의 친서를 손에 들고 말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누군가가 현시가로 계산해 보니까 5억-6억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력과 명함과 직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력서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 만큼 오래 믿었는데, 내게 이만한 직분이 있는데, 내가 이만한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데, 이만큼 많이 배울 만큼 배웠는데…'하는 자신의 직분과 신분 의식이 오히려 은혜를 받는데 장애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적인 방법과 자기과시가 활개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그의 은혜를 받는 것은 내 이력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공로가 아닙니다. 내 자격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는 용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계급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수레 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아닙니다. 훈장 달고 가는 것 아닙니다. 거창한 겉옷을 벗어 던질 때 오히려 하나님은 나를 만나 주십니다. 빈손 들고 벗은 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필요한 것은 병고침의 방법, 그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메시지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메센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저가 내게로 나와서…"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신분과 지위의 껍질 때문에 본질을 놓치고 그냥 돌아갈 뻔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이유는 교인들과 목사가 맘에 들질 않아서입니다. 여러분들도 목사에게 혹은 교회에 대하여 실망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 이유가 무엇이든 목사나 교회가 꼴보기 싫다는 이유 때문에 목사나 교회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까지 거부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메시지입니다. 메센저와의 인간 관계 때문에 메시지까지 버린다면 그것은 자기 손해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명백한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분명한 구원의 메시지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나 교회에 실망하여 말씀을 버리게 되면 구원의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문제는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로 나를 영접했는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꼴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화를 내면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만일 끝내 기분 나쁘다고 요단강에 내려가서 그 몸을 씻지 않고 돌아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목사가 불신되고, 교회가 불신되는 사실은 참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귀를 막는다면 그것은 더 큰 일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을 의식하고 살다가 상처받고 실망하여 오늘도 진리의 길에서 떠나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제2, 제3의 나아만들이 우리 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임하기 위하여 때로 우리는 엘리사의 냉담한 대우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따뜻한 사랑의 환경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찬바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 뜨거운 여름날 무럭무럭 자랐던 곡식은 가을 찬바람에 알곡으로 영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뜨거운 여름뿐만 아니고 차가운 겨울도 주십니다.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눈도 비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이 찾아와서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길 원했을 때 그 여인을 개 취급하고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것까지도 감수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의 고백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고 하면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만 있다고 하면 주님을 만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개가되어도 좋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과 엘리사 선지자는 장군 나아만이 아닌 인간 나아만과 볼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겉의 문둥병보다 더욱 심각한 속의 교만의 치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기 위해서는 곧은 목을 꺾고, 화려한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벗어 던지고, 승전국의 장군으로서가 아니라, 한 죄인 된 인간의 자세로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세상 신분이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은 단 한가지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별이 번쩍이던 모자도 벗어 던지고 계급장과 훈장도 내려놓고 흙탕물 속에 뛰어 들어 갔다가 착 달라붙은 머리에 초라한 복장에 마치 물에 빠진 새앙 쥐 같은 인간 나아만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계급장으로 꾸며진 나아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선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이었습니다. 승리자 군대장관이 아닌 실패자 인간임을 발견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껍질을 벗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십니다. 용사 된 자신의 명함과 신분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위선 가지고, 가식 가지고, 껍질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껍질을 벗어 던지면 내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껍질을 벗어 던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 생각'의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나아만의 두 번째 껍질이 11절에 나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 할 단어는 "내 생각에는"이라는 말입니다. 나아만은 지금 병자로서 의사인 엘리사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나아만은 자기가 처방을 내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 안에서 구원과 치유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지금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의 처방을 말하고 확인하려고 온 것입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료의 처방을 듣기 위하여 온 것 아닙니까? 그는 이미 들어야 할 처방을 들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그러면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처방의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 할 때에 나아만은 이 말씀을 붙들고 감격하며 울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을 의식한 나아만은 상처받고 실망하여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풍랑의 원인자 요나, 문제의 원인자 나아만 - 그가 앓고 있는 병, 나병 )
나아만이 들어야 될 참된 하나님의 말씀,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이렇게 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 "요단강 물에 몸을 던져 씻으면 네 문둥병이 나을 것이다" 이 소리를 들으면 됐습니다. "네 죄는 이렇게 하면 사함 받을 수 있다." "너의 인생에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될 수 있다." "너의 육체의 질병과 마음의 고통과 인생의 온갖 문제들이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면 해결될 수 있다."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는 것이지 내 생각을 펼치고 내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종교를 크게 구분하여 보면 이성종교와 계시종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이나 상식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거기에 매여있지는 않습니다. 이성이나 상식을 초월합니다. 구원의 길이 사람의 생각이나 이성과 철학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나와도 예수는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책인 성경도 안 읽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생각'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생각과 계획입니까? 말씀에 집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불순종의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나아만이 부딪힌 문제는 12절,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요단강은 세례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세례는 곧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은 자기 생각과 경험을 내려놓고, 즉, 자기를 죽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단강에 들어가라. 그것은 곧 너의 신분, 체면, 생각, 경험 다 벗어 던지고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 하되 전적이 아닌 일부분만은 내 이성과 사람들의 이목에 맞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내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물질 문제만큼은 내 생각이 조금 있습니다. 사업경영에 문제는 제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내 자녀들 교육의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내 자식의 결혼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내 자식의 장래문제만큼은 내 생각이 조금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있기까지 그 순종은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부분적인 순종 - 체통과 품위에 맞는 순종 - 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지 진정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죽어도 좋습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바르발 강이 아니라 요단 강에 내 몸을 던지겠습니다. 깨끗이 순종할 때에 그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기적처럼 역사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말씀 앞에 깨끗이 우리 자신을 집어 던질 때에 그 말씀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나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요단강에 들어갔던 나아만은 흙탕물에 옷이 꽤재재 하게 되었습니다. 흙탕물에 젖은 옷은 진흙탕에 뒹구는 훈련병을 방불케 했습니다. 장군의 체통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하늘을 찌르던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내 위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사회적인 지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 받을 수 있는 길을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변화되는 길이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을 집어 던지겠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겠습니다. 삭개오의 심정 아니겠습니까? 군중의 뒷발에 차여서도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소경 바디메오의 절규가 지금 연상되지 않습니까? 주님은 껍질 모두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된 나아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내가 너를 만나주리라. 내가 너를 치료하리라. 나아만의 문둥병이 깨끗하게 될지어다.”
알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찌르는 가시 껍질도 벗고 딱딱한 껍질도 벗어야 하지만 텁텁한 비늘 껍질까지 벗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가시 껍질 벗었습니다. 딱딱한 껍질 벗어 던졌습니다. 폭이 넓어 보입니다. 가슴이 열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가서 보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맛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비늘 껍질이 그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영국교회의 거성 트루나이젠은 일찍부터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세상을 바꾸는 존재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바꿔 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마흔이 넘어서면서 그는 기도의 제목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던 기도의 제목을 포기합니다. 나로 하여금 세상을 바꾸는 인물이 되게 하십시오. 이 기도의 제목을 포기합니다. 오늘부터 기도를 바꾸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바꾸어 주시옵소서."
이 날부터 나는 세상을 바꾸는 인물로 쓰임 받기 시작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내가 변하면 가정이 변합니다. 부모가 변하면 자식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공동체가 변화됩니다. 오늘 성도들이 변하면 교회가 변화되어집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변하면 이 민족, 이 역사가 변화되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