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자, 알제 ?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행복할 거라고 믿는 제 남편은 책장을 넘기듯 하루 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며
새벽을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경상도 토박이하고도 뼛속까지 경상도 피가 흐르는 그런 남자라서
그런지 15년을 같이 살고 있지만, 사랑한다는 소리 한번 못 들어 봤답니다.
멋대가리가 없어도 너무 없다 보니 집에 와도, "내 왔다" "밥도" "불 꺼라" 세 마디 이상 들어본 적이 없고요
어제는 멍하니 tv만 보고 있는 남편 옆에서 과일을 깎으며 "여보… 요즘 회사 일은 어때요?"
라고 물어도, 제 얼굴을 한번 빤히 쳐다보고는 티브이만 보고 있더라고요.
그때 온종일 울려댈 줄 모르는 남편을 닮은 전화기가 울먹이는 소리에
냉큼 전화기를 들은 남편의 입에서 "어무이요! 밥 잡샤습미꺼?" "-----" "그 뭐시라꼬예.
돌아오는 토요일 지수 오매하고 내려가서 퍼떡 해치우겠심더." 하고는 전화기를 끊더니,
"들었제?"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더라고요.
저는 낮에 뜬 달처럼 어이가 없고 기가 찼지만,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기에 아내의 본분을 다하고자
과일을 들고 방으로 따라 들어갔지만, 본척 만척 티브이에 나오는 개그맨들이 내는 퀴즈를 들으며
웃음보를 잡고 있더라고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경상도 버전으로 다섯 자로 줄이면?" 남편은 놓칠세라 "사랑한데이" 라고
허공에 질러대는 소리에... "어 당신 잘 알면서, 어찌 나한텐 한 번도 안 해주나 몰라"라는
제 말은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다시 텔레비전에 몰입하던 남편은, "두 자로 줄이면?"
이라는 소리에 저는 "뭐지…? 뭘까...?" 라며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때,
남편은 큰 소리로 소리쳤습니다. "알제?. 아이가… 하하하~"
맞춘 자신이 대단하다는 듯 큰소리 내어 웃더니, 리모컨을 사정없이 눌러 꺼 버리고는 "불 꺼라."
집에 와서 제일 마지막에 하는 그 말을 어둠이 배어 있는 천장에 뱉어놓고 있을 때, 제 마음은 주머니
속 동전처럼 작아지고만 있었답니다.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라는 듯 멈춰서지 않는 시간들이 흘러 지나간 어느 날, 약속을 한 새끼손가락처럼
아침을 열고 나가는 남편의 입에서 "오늘부터 내 좀 늦을끼다."
"늦게까지 한다고 못 버는 돈이 더 들어오려나 몰라" 라고 빈정대는 제 말은 아랑곳없이 구름 속에 사연을
숨겨둔 사람처럼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계절이 머물다간 하늘 위로 햇살이 숨겨둔 물감이 나오는 가을을
따라 빽빽한 책장 한 장 넘긴 자리를 더듬어 찾아온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띠리리리." 아침 일찍 걸려 온 엄마의 전화를 안방으로 들어가 받고 있던 저는 빛을 향해 뻗어 가는 새순처럼 엄
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대롱대롱 눈물방울을 매달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옷소매로 눈물을 지우며 거실로 나온 제 가슴에 땅속에서 숨죽인 시간을 걸어
피어난 파란 새싹 같은 꽃송이를 한 아름 안겨주더니, "생일 축하한데이..."
회사를 마친 남편은 한 달여일 동안 엄마가 있는 병실로 찾아가 병간호를 하고 있었고, 돈이 없는 오빠 대신 퇴원
병원비까지 계산했다는 엄마의 말에 저는 남편의 가슴에 안겨 못다 흘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여보…. 고마워." "그게 고마운 일이가...? 당연한 일이제..."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내 남편이 오늘도 책장에 한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여보, 등때기가 와이리 무겁노?" "잠깐만.. 등 뒤에 뭘 이런 걸 부치고 다녀요?" 라며 흰 봉투를 떼어 열어본 순간,
제주도 여행권 두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니 여보~ 이게 뭐예요? 사랑을 사랑한 사람처럼 웃어 보이더니,
"아프셔서 칠순을 그냥 병원에서 보내셨는데, 당신이 모시고 제주도 여행 한번 다녀오라꼬~"
"여보… 정말… 정말.. 고마워요. 근데 당신 오늘 내 생일인데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갈 거예요?" 라며 배고픈 우체통처럼 내뱉는 저를 피해,
도망치듯 문을 열고 나간 남편이 다시 문을 빼꼼히 열고선 한마디를 뱉어놓고 있었습니다.
"알제?"
<김덕영 교장님이 주신 카톡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