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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환난에서 나온 큰 무리(20)
말씀: 계 7:9-17. 2024년 8월 4일 일요일 오후 2시
큰 환난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은 누군가? 이 주제는 크리스천들에게도 많은 관심의 대상이며 주목받는 주제입니다. 은혜시대에 구원 받은 성도와 교회, 그리고 큰 환난시대의 성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크리스천들은 말하기를, 모든 성도들은 믿기만 해서는 안 되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 끝까지 견뎌야 한다, 믿음을 지켜야 한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아야 한다, 등등의 주장을 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 해당되는 성경 구절들을 교회의 크리스천들에게 적용해서 나오는 해석이요 주장입니다.
교회가 큰 환난을 통과한다는 환란 통과의 교리는 많은 교회들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큰 환난 전에 교회가 들림을 받고 이 땅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구원 없는 이방인들만이 남게 되는 시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큰 환난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옮겨진 후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7년 동안 이 세상에 있게 될 일들을 계시록을 통해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가 큰 환난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계시록을 왜 공부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먼저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진리를 바로 알아야합니다. 주께서 공중 재림하심과 교회의 환란 전 휴거, 그리고 환란 끝에 이 땅으로 재림하셔서 죄악을 시판하심과 천년 왕국을 세우신다는 교리는 우리에게 복된 소망입니다. 7년 큰 환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우리는 이 땅에 반드시 곧 일어날 큰 환란의 일들을 왜 공부하는 것입니까?
1. 속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거짓 교사들이 큰 환난에 해당하는 말씀들을 가지고 와서 크리스천들을 미혹합니다. 거짓 대언자들, 거짓 교사들이 크리스천들을 속일 때 흔히 쓰는 방법은 불경이나 코란이나 철학서적들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가지고 옵니다. 그들은 성경에 없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가지고 그 말씀을 왜곡하거나 거짓되게 가르치는데 그 방법이 대상과 세대를 혼합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준 율법을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지키라고 하거나 대환난이나 천년왕국에 해당하는 말씀을 현재의 크리스천들에게 제시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교리, 거짓 가르침에 속지 않기 위해서 계시록을 분명히 공부해야 합니다.
2. 답변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 구원 받고 하늘로 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정말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사람도 있고 시비를 걸기 위해서 질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답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역사서이며 예언서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 그보다 한심한 일이 없습니다. 악한 현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우리는 미리 알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공중으로 들림 받아 주님을 만날 때 이 땅에 거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면 그 역시 문제입니다(벧전3:15). 성경적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등불이 없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3.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행하실 일들을 자신의 종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알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많은 말씀들이 신약 교회에 적용되지 않고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말씀들은 모두 계시록에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구약 성경의 예언과 성취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다고 하신 말씀이 언제 어떻게 성취될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책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4. 계시록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일이 현재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큰 환난 때 계시록이란 책보다 더 중요한 책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 필요한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큰 환난 때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고 믿음을 지킬 사람들을 위해서도 성경을 주셨습니다(눅21:36). 요한 계시록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 우리는 큰 환난 때 있게 될 일들을 이 책을 통해 자세히 알기 때문에 부지런히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다가올 재앙의 날, 심판의 날에 참여하지 말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주의 심판과 많은 재앙이 기록되어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복된 책입니다. 이 책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1:3). 우리는 큰 환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전에 주께서 공중에 오심을 소망하며 들림 받음을 기다립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행하고 지켜야 할 율법을 주셨듯이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는 교회의 규례를 주셨고, 큰 환난 때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되고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이 일 뒤에 내가 보니, 보라,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채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계7:9).
사도 요한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선별된 144,000명의 봉인된 무리들을 보았고 그 뒤에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이들은 144,000과 같이 특정한 수가 아니라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로서 그 수가 아주 많았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이방인들입니다.
성경에는 알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특별히 계시록에 나오는 일들은 미래에 있을 일들로 자세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정확한 결론을 가져 오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은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큰 환난에서 나오는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일 것입니다.
오늘날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때에도 복음을 전하고 듣고 구원 받는 수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서양에서 그러했듯이 교회도, 성도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7년 큰 환난이라는 정해진 짧은 기간과 환경을 생각할 때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구원 받는 것이 쉽게 납득가지 않습니다.
그들에 관한 기록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활발한 교회 조직을 통한 복음사역자들이 일하고 있는 시기도 아니고, 더구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다 사라지고, 큰 환난 시기는 사람들이 더욱 완악해지고 자연재앙들과 적그리스도의 활동시기에 누구를 통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계시록 안에 성도들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은혜시대와 같은 왕성한 교회로서의 활동은 없기 때문에 기록된 말씀 안에서는 그들이 복음을 들은 경위와 믿고 구원 받게 된 내력들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없으므로 그들에 대한 추측이나 가설들이 난무합니다.
계시록의 흐름으로 본다면 휴거사건이 일어나고 큰 환난이 시작되기 직전 144,000 명의 하나님의 종들이 봉인되고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나 혹은 두 증인들(11장)에 의해서 복음을 듣고 그들이 믿었다는 추측 외에는 달리 그들이 믿은 동기에 대해서 추론해 볼 만한 기록들이 없습니다.
전에 2007년도에 곤지암 기도원에서 계시록 강의를 할 때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해서는 지금 은혜시대에 교회는 다녔으나 하나의 문화생활과 종교생활을 했을 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지 않던 교인들이 휴거사건과 더불어 주위에서 많은 이웃이나 가족들이 사라진 것을 보고 그간에 흘려들었던 설교나 성경이야기들이 사실로 들어난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고, 또 환난 사역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 받은 자들일 것이라고 설명한 것에는 지극히 제 개인 소견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를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적 관점으로 교회사를 볼 때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형태에서 그들(믿음 없는 교인들)을 환난 전 휴거의 낙오자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를 반영하는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 주님에 대한 열정이 식고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상태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을 대변해줍니다. 제발 여기에는 성경을 믿지 않거나 구원 받지 못한 종교적인 교인들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주님도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분께서 속히 그들의 원수를 갚아 주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 분명히 교회도 많고 성도들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반문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주께서 공중으로 오셔서 “이리로 올라오라.”하실 때에 들림 받을 사람들이 과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될까? 의구심도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볼 수 없어도 교회에 드나드는 교인들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갖고 있지는 아니하니라.”(살후3:2)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이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시대라면 휴거와는 벽 하나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주님께서 마지막이라 하신 바로 그 시점이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마지막 시기는 어떠합니까? [노아의 날들에 상황이 어떠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의 날들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눅17:26-27) 세상 사람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은 성경적 믿음과는 상관없이 잘살고 잘 먹고 복 받으면 그것이 믿음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시집장가 잘 가려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도 그와 같았으니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건축하였으나 롯이 소돔에서 나간 바로 그 날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같이 쏟아져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바로 그와 같으리라.](눅17:28~30) 이 말씀들은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날들, 진노의 심판이 쏟아질 날들이 지금 곧 임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교인들은 많되 진실로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말이며 그들이 한 귀로 듣고 흘렸던 진리의 말씀들이 그들 눈앞에서 일어나는 휴거를 보면서 결국 회개와 구원이 이루어져 큰 환난 가운데에서 구원 받는 자들이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오게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큰 환난 전 휴거되는 수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다시 9절입니다. [이 일들 뒤에 내가 보니, 보라,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채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9).
성경 본문은 큰 환난 때 이방인들 중에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선 사람들이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계4,5장에 나오는 24장로들이 대표하는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가운데서 은혜시대에 구원 받은 크리스천들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장로들은 앉아 있었지만 이들은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서 있습니다.
장로들은 왕관과 자리(왕좌)가 있지만 이들은 둘 다 없습니다. 24장로들은 큰 환난 전에 들림 받고 하늘에서 이미 상급을 받았지만 이들은 큰 환난에서 고난을 다 겪고 나온 자들입니다. 장로들은 온 땅에 임할 시험의 시각으로부터 피했지만 이들은 그 시각을 통과해서 나왔습니다. 장로들은 왕과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종들입니다.
계시록 5:9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께서는 그 책을 취하여 그 책의 봉인들을 열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으며](계5:9). 크리스천들은 그들(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나온 분리된 자들이지만 이들은 그들(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144,000명의 유대인도 아닙니다. 144,000명의 유대인들은 단일 민족으로 지파가 있고 이마에 인을 받았지만 이들은 아무런 인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큰 환난 때 구원받는 이방인들입니다(사60:1-3). 이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말씀은 예정론 자들이 말한 대로 미리 선택된 자들의 특정한 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정된 자, 선택된 자의 수만 구원 받는다는 헛소리는 지금이나 큰 환난 때나 아무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땅에 있는 자들은 큰 환난의 재앙이 갈수록 더 커지고 마지막에는 “그분의 진노의 큰 날이 왔으니 누가 설 수 있겠느냐?”하더라.(계6:17)라고 외치지만 흰 예복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는 큰 무리들이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기쁨을 표현할 때 쓰는 나뭇가지입니다. 장막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출애굽의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습니다(요12:13). 천년왕국 성전을 지을 때 사용되는 유일한 나무가 ‘종려나무’인데 세 번이나 나옵니다(겔40-41).
이들은 온전히 큰 환난에서 구원받은 기쁨을 종려나무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큰 무리들이 입은 흰 예복은 계시록 3:4-5, 18절에 나옵니다. 흰 옷은 이기는 자가 입는 옷입니다. 이 옷은 주님께서 친히 제단 아래에서 목 베인 자들의 혼들에게 주신 옷입니다(6:11).
이들은 큰 환난에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않았으며 자기를 더럽히지 않았으며 이긴 자들입니다. 흰 옷은 성도들의 의입니다(계19:8). [또 내가 왕좌들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그것들 위에 앉아 있고 그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더라(크리스천, 신약성도). 또 내가 예수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목이 베인 자들의 혼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자기 이마 위에나 손 안에 짐승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더라(환란 성도).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하였으나](계20:4).
본문에는 신약 성도들과 환란 성도들이 함께 언급되어 있습니다. 환난성도들은 큰 환난 때 목 베임을 당하고 죽었다가 부활해서 천년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이 땅을 통치합니다.
10절입니다.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구원이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하더라.](계7:10). 큰 환난에서 나온 큰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기를 “구원이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라고 합니다.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은 곧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왕좌 오른편에 계신 분인데 천년 왕국 때 이 땅에서 왕좌에 앉으십니다(마19:28).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주십니다(눅1:32). 주님께서 이때를 “......다시 태어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 (마19:28)라고 하셨고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 속에서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왕좌에 앉아”(마25:31) 민족들을 심판하십니다. 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 사역을 하십니다(히1:3, 딤전2:5, 롬834).
큰 환난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이 있다고 큰 소리로 외치는데 이는 저 하늘에서 선포된 구원 간증입니다. 환란 성도들이 외치는 말과 은혜시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외치는 말을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 죄들에서 우리를 씻으시고”(계1:5)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환난 성도들은 “구원이 왕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계7:10) 은혜의 복음을 온전히 믿지 않던 자들이 뒤늦게 깨닫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5:9에서는 “......주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셨으며”(계5:9)라고 합니다. 신약 성도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그분의 피와 죽으심이 나옵니다. 반면 큰 환난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의 외침에는 어린양의 피와 죽으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외쳤습니다. [내가 그에게 이르되, 장로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와 자기 예복을 씻고 [어린양]의 피로 그것을 희게 한 자들이니라.](계7:14).
큰 환난에서 나온 이들 역시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예복을 씻은 자들입니다. 죄, 불법, 허물은 어린양의 피로만 깨끗하게 씻깁니다. 그럼에도 환란 성도들이 피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는 것은 어린양의 구속이 아닌 심판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환난은 어린양의 진노가 쏟아지는 심판의 때입니다. 그들은 제단 아래서 한 명의 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해 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죽인 자들에 대해 보복해 주시기를 구했고 속히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을 청원했습니다.
큰 환난의 주제는 어린양의 피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큰 환난에서 무사히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육체로는 고난과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구원은 죄로부터 혼의 구원이 아니라 큰 환난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자, 본문을 보십시오. 이들이 외치는 구원은 주의 권능, 주의 심판을 통해 땅에서 고통 받는 혼들이 속히 큰 환난에서 구원을 받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속히 재림하시면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 마귀들의 영들, 지하에서 올라온 짐승들, 하늘에서 쏟아 부어진 재앙들에서부터 육체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신약 성도들이 죄로부터 혼의 구원을 외치는데 반해 환란 성도들은 큰 환난으로부터 육체의 구원을 외칩니다. 구약 성경의 주제가 이것입니다. 그들은 늘 역병, 재앙, 기근, 자연 재해, 전쟁, 포로, 사망, 원수의 압제 등에서 구원을 외칩니다. 큰 환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1절입니다. [모든 천사들이 왕좌와 장로들과 네 짐승 주위에 섰다가 왕좌 앞에서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여](계7:11).
큰 환난에서 나온 무리들이 큰 음성으로 외치자 모든 천사들이 왕좌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모든 천사들이...”(11)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모든 천사들은 왕좌와 장로들과 네 짐승 주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좌 앞에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는데 천사들의 경배 시간입니다.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여 경배를 드리듯이 하늘에서 천사들 역시 왕좌 둘레에 모여 경배를 드립니다. 저 하늘에서도 성도들의 집회가 있고 찬양이 있고 기도가 있고 경배가 있습니다.
왕좌 둘레의 짐승들, 장로들 역시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천사들이 주께 경배를 드리는 형식은 얼굴을 대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경배란 기본적으로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서 주님 둘레에 모두 모여 주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형식은 앉아서 대표 기도를 듣고 찬송가 몇 곡 부르고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강력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더라.](계7:12). 하나님께 경배하는 천사들은 앞뒤로 아멘을 연발했습니다. 계7:12절에서 천사들은 주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계5:12절에서 천사들은 어린양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그들이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서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시도다, 하더라.](계5:12).
5:12절에서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 천사들이 경배합니다. 그러나 7:12절에서는 ‘죽임을 당하신’이 없습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께 경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5:12절에는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7:12절에는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강력”이라고 합니다. 거의 비슷한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찬송이라고 번역된 복(blessing)과 감사(Thanksgiving)가 다르고 “부”(riches)란 단어가 본문에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부”(부요하심)란 단어가 98회나 나오지만 아버지 하나님께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부요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언급됩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소유주이십니다. 주님은 “다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다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게 주셨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십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하나님께 일곱 가지(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강력)가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찬양하며 경배했습니다.
13절입니다. [장로들 중 한 사람이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흰 예복을 차려입은 이들은 누구냐? 그들은 어디서 왔느냐? 하므로](계7:13).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사도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까지 환란의 전 과정을 보고 기록하면서도 막상 장로가 묻는 질문에는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온 자들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들이 흰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 앞에 서서 노래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들은 어린양의 죽음, 피에 대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흰 예복을 차려입은 이들은 누구냐? 그들은 어디서 왔느냐?”(13) 사도 요한도 궁금해 하고 있는데 장로들 중의 한 사람이 요한에게 이들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은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구약 성도들이라면 요한은 쉽게 알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구약 성도들을 알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모세와 엘리야를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마17:3).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을 한 번에(눅16:23)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이 교회 성도들이라면 요한은 곧바로 답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사도였고 성도들을 섬겨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온 이방인 성도들이었기에 요한은 이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이들은 새로운 부류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큰 환난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14절입니다. [내가 그에게 이르되, 장로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와 자기 예복을 씻고 [어린양]의 피로 그것을 희게 한 자들이니라.]
요한은 질문을 받았을 때 “장로여,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요한은 장로로부터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모르는 답변을 질문자에게서 얻을 수 있는 때가 많습니다. 장로는 요한에게 알려 주기 위해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물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지, 우리가 누구에게 답을 얻어야 하는지 알려 주기 위해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는 방법 중 하나가 이런 질문과 대답을 통한 ‘대화법’입니다. 질문은 무지를 일깨워주고 답변은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제자들이나 사람들에게 여러 번 질문을 하셨는데 이는 그들의 무지와 오류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함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장로는 요한이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하자 바로 답을 해 주었습니다.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와 자기 예복을 씻고 어린양의 피로 그것을 희게 한 자들이니라.”(14)고 합니다.
이들은 구약 성도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신약의 구원 받은 크리스천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왔습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이들이 크리스천인 줄로 알고 교회의 환란 통과를 가르칩니다. 신약 성도와 환란 성도를 구분하지 못하면 교회는 큰 환난을 통과한다고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라고(딤후2:15) 하셨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목 베임을 당하면 제단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즉시로 셋째 하늘에 주와 함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이나 목 베임을 당한 사도 바울이 제단 아래서 외치고 있다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으면 주와 함께 있을 것을 알고 확신했지(고후 5:8,9, 빌1:23) 제단 아래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큰 환난 전에 부활의 몸을 입고 들림을 받습니다. 장로는 이들의 정체를 큰 환란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요한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예복을 씻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서 입는 옷은 빛의 갑옷,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름을 받았고 영적 전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롬13:14). 성경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가면무도회를 보거나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서양문화를 따라 할로윈데이 같은 축제 때 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이한 옷을 입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로 옷 입고 싶습니까? 성경은 성도들에게 어떤 신들이나 천사들이나 죽은 성자들이나 영화나 만화 주인공들로 옷 입을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입어야 할 옷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도회나 명절이나 교회 행사 때만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속사람, 새 사람은 침례를 통해 이미 주와 한 영이 되었고, 그분으로 옷 입었습니다.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만약 누군가 이 땅의 성도들을 본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새 사람을 입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받았으니](엡4:24). 우리 속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거듭난 영을 말합니다. 이 영은 하나님의 말씀이란 씨앗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영은 성령에게서 난 사람이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 면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10).
“자기 예복을 씻고” 장로는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그것을 희게 한 자들입니다. [내가 {주}를 크게 기뻐하고 내 혼이 내 [하나님]을 기뻐하리니 이는 마치 신랑이 장식품으로 자기를 꾸미며 신부가 보석으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같이 그분께서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셨기 때문이라.](사61:10).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의의 옷을 주십니다. 구원의 옷, 의의 겉옷으로 입히시고 덮으십니다. 큰 환난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 역시 주님으로 옷을 입습니다. 그들이 받은 옷은 어린양의 피로 씻음 받은 옷입니다. 환란 성도들 역시 자신들의 옷을 씻음 받는 데는 어린양의 피 밖에 없다는 진리를 잘 알았고 그들은 어린양의 피와 증언의 말로 이기었습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겼으며 그들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어린양의 피로 자기 옷을 씻고 희게 했다는 말씀의 정확한 의미가 이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인해 마귀를 이기었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옷(그릇)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하느라 흘린 땀과 먼지, 씻지 않는 손, 각종 오물이 아닙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 속,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마15:20). 또 한 가지는 음행, 우상 숭배입니다. 쓴 뿌리는 다른 사람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히12:15).
그렇다면 사람을 이런 더러움으로부터 씻어 주고 깨끗하게, 희게 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린양의 피”입니다. 큰 환난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신들을 씻었고 깨끗하게 했습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란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왕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며 또 왕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리니](계7:15).
큰 환난에서 나온 큰 무리들은 지금 하늘의 하나님의 왕좌 앞에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6장에서 이들은 땅의 제단 아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는 환란 성도의 부활입니다. 이들은 부활하여 하늘로 들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깁니다.
주목하십시오. 새 예루살렘에는 밤이나 낮이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도 없습니다. [또 내가 그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전능자]와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라.](계21:22).
크리스천들은 새 예루살렘에 살게 되는데 거기는 밤낮으로 그분을 섬겨야 할 성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환란 성도들과 신약의 크리스천들과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그분과 함께 거하며 안식을 누립니다. 그분과 함께 다스립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신다고 하면서 거룩한 예루살렘을 보여 주셨습니다. [......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여 주리라, 하고는 영 안에서 나를 크고 높은 산으로 데려가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저 큰 도시 곧 거룩한 예루살렘을 내게 보여 주었는데] (계21:9하-10)
그러나 환란 성도들은 그분의 성전에서 그분을 밤낮으로 섬긴다고 말합니다. 신약성도들과 환난 성도들은 신분이 다르고 거처가 다릅니다. 어린양의 신부와 성전에서 섬기는 자의 차이입니다. 구약에서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 외에는 성전에서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천년 왕국 때는 환란 성도들에게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주십니다. 은혜의 시대에 구원 받은 크리스천은 현 시대나 다가올 시대에나 성전과 상관없습니다.
“또 왕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리니”(15).
하나님께서 그들 한 가운데 거하시는데 이는 구약에서 성막이나 성소가 이스라엘 한 가운데 거했던 것과 같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환란 성도와 신약 성도들은 사는 곳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신분이 다릅니다.
16절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굶주리지 아니하고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며 해나 어떤 열기도 그들 위에 내리쬐지 아니하리라.](계7:16).
큰 환난에서 나온 큰 무리들은 이 땅의 큰 환난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해나 열기가 내리쬐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모든 환난을 그대로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 중에도 큰 환난 중에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음으로 사거나 팔지 못하기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그러다 잡히면 옥에 갇히거나 목이 베입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나 해가 그들을 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가 그들을 인도하되 물 있는 샘들 곁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라.](사49:10). 이 구절이 바로 본문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큰 환난 때, 이들이 주리고 목마를 때, 감옥에 있을 때, 호의를 베풀어 준 자들은 민족들을 심판할 때, 주님께서 양의 무리로 분류하시고 보상해 주십니다(마25:35). 큰 환난 때 이들을 외면하고 도리어 괴롭힌다면 이들은 그에 따른 보응을 받습니다(마25:42). 주님은 큰 환난 때 성도들을 대하는 것 하나 하나를 자신에게 하시는 것과 동일하게 처리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 144,000명은 환난 때 사역자로 봉인된 수이지 구원 받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광야로 도망간 자들도 있고 산으로 피한 자들도 있고 떠도는 자들도 있고 감옥에 갇힌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7년 동안 끝까지 견딤으로 구원 받습니다. 이들 역시 큰 환난 성도들입니다.
17절입니다. [이는 왕좌의 한가운데 계시는 [어린양]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살아 있는 물 샘들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 하더라.](계7:17). 어린양께서 이 땅에서 주리고 목말랐던 그들을 먹이십니다. 그들을 살아 있는 물 샘들로 인도하십니다. 부활한 성도들의 몸은 영적인 몸이지만 뭔가를 먹고 마신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17).
성도들의 삶이 이 땅에서 눈물 젖은 삶이란 사실은 모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많은 고통과 눈물로 간구하셨고 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자주 눈물을 흘렸습니다. 눈물은 구약, 신약, 큰 환난을 거쳐 저 하늘에서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특별히 고난 가운데 구원 받은 환란 성도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늘에서 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까? 크리스천들이 저 하늘에서 눈물을 흘릴 일이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성도들이 흘리는 눈물이 두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한 번, 계21:4절에 또 한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며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계21:4).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마다 주님은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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