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여행의 백미는 암괴 위에 웅크리고 있는 시기리아 왕궁 터다. 워낙 예상치 못한 기이한 풍광이라 세계7대 불가사이에 덧붙여 8대 불가사이로도 불리며,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연중 관광객을 부르는 경이로운 볼거리다. 담불라에서 15km 거리로 대로변에서 황토 길로 잠시 직진하여 매표소에서 미화 30불이라는 비싼 입장료를 내고, 악어를 키워 외적의 침범을 막았다는 해자를 건너 나지막한 성벽을 지나면 ‘물의 정원’이다.
연꽃이 소담하게 핀 연못에는 백로(?)가 쉬고 있고 진입로 양쪽으로 균형을 맞추어 조성된 정원을 지나 돌로 만든 낮은 턱(원래는 담으로 분리되었을 것으로 짐작됨)을 넘어서면 여름정원으로, 둥근 연못에 고여 있는 탁한 물에는 나무 그늘이 투영되어 있다. 가로, 세로가 700m와 500m 라는 평지의 정원과 지금은 폐허가 된 옛 왕궁이 얹혀 앉은 암괴사이로 큼직한 바위가 여기저기에 서있는 ‘돌의 정원’이다. 이 바위들 역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유사시에 바위사이를 석축으로 막으며 방어선이 된다.
322m 높이의 시기리라 바위 궁정
돌의 정원을 지나 있는 ‘테라스 정원’도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런 큰 바위에 움푹 들어간 바위굴은 왕궁이 건축되기 전에는 승려들의 수행 처로 알려져 있다. 정원이 끝나는 곳부터 절벽에 설치된 철제계단은 영국식민지 시절에 만들었다는데, 고소공포증환자는 어지럼증을 피하려면 아래를 보지 말고 계단을 오르는 자기의 발만 보고 올라야한다. 쉼터에서 숲으로 펼쳐진 전망을 잠시 즐기고 철망으로 막은 원통 계단을 지나면 ‘시기리아 미인도’라고 불리는 프레스코 벽화가 잘쑥한허리와 땡땡한 가슴을 들어 내놓고 춤추고 있다.
아비를 죽인 왕이 부왕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 하니 추파라는 표현이 맞지 않겠지만, 여인을 멀리해야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추파(秋波)로 보이지 않았을까? 원래 500점이 넘었다는 이 현란한 프레스코가 현재 18점만 남게 된 것은 바위산 왕궁이 폐쇄되어 승려들에게 환원되면서, 뇌쇄적인 그림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고의로 훼손했기 때문이라 하며, 이어지는 거울 벽이란 이름의 흙벽을 지나 만나는 곳이, 가파른 계단을 헐떡거리며 올라온 사람들이 쉬고 있는 300 여 평쯤으로 보이는 꽤 넓은 공간인 ‘사자(獅子)의 광장’이다.
본격적으로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인 돌계단 양쪽으로 높이 6m에 폭이 4m가 됨직한 사자의 앞발에는 2m 높이의 날카로운 사자발톱 3개가 위협한다. 사자의 목구멍으로 불리는 이 계단은 “내 목구멍으로 들어온 자는 살아가지 못한다.”는 적에게 보내는 미친 왕의 경고장이다. 예전에는 사자의 머리상도 있었다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음산한 문을 지나 철 계단을 다시 오르면 예전의 유일한 접근로였다는 계단이 80도 경사의 절벽 곳곳에 파져있고 굵은 쇠기둥도 여기저기 보인다. 물론 안전망도 있었겠고 보조 쇠줄도 있었겠지만 절벽에 계단을 만들면서 명을 다한 적잖은 석공들은 왕을 원망했지, 하늘을 원망했겠는가? 자신의 업보가 죄 없는 석공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5세기 타밀의 침략으로 싱할라 왕조는 수도를 빼앗기고 27년 간 그들의 지배를 받다가 다투세나라는 용자가 출현하여 타밀을 쫓아내고 수도를 되찾고 왕조를 계승했다. 그에게는 평민시절에 결혼한 평민부인과 왕위에 올라 결혼을 한 귀족출신부인 사이에 아들이 한명씩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평민이 왕이 되면 신분에 맞는 신부를 구하고, 왕위계승을 목전에 둔 이복형제는 서로 간에 등 뒤에서 칼을 겨누게 마련.
싱할라 왕조의 왕위는 장자상속이 관례였으나, 귀족출신인 둘째 부인의 아들인 이복동생 목갈라냐에게 왕위를 계승하려는 부왕의 속마음을 전해들은 카사바 왕자는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왕에게는 왕위와 재화 양도까지 요구했으나, 부왕은 “왕위는 힘으로 얻어 지는 게 아니라 백성에게 베풀 줄 아는 자가 앉아야 하는 자리이며, 내가 가진 곳은 백성을 먹여 살리는 저수지 밖에 없다.”는 말에 흥분하여, 부왕을 죽이고 동생마저 죽이려했으나 동생은 탈출하여 남인도로 줄행랑쳤다.
이 후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왕위 찬탈 뒤 5 년 만에, 동생이 쳐들어 와도 방어가 가능한 곳을 찾다가 승려들이 수행 중이던 시기리아 바위를 찾아내어 철옹성을 건축한다. 해자를 만들어 악어를 풀어놓고 돌의 정원과 테라스 정원을 조성한 뒤, 322m의 바위산 위에 궁전을 완성하여 왕도를 옮겨 생활하기 14년이 흘렀을 때, 타밀 원군의 도움을 받은 이복동생 왕자가 바위궁전으로 쳐들어오자, 최후의 결전에서 패한 카사바왕은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동생은 수도를 아누라다푸라로 다시 천도하고 시기리아는 수행자의 수도처로 환원되었다가 점차 역사 속으로 잊혀졌다. 이렇게 숨겨진 벽화와 망각의 세상에서 1400년을 잠자던 바위궁전이 발견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은 영국인 장교 겸 고고학자가 망원경으로 바위산의 경관을 살피다가 바위 그늘에 가려져 멀리에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춤추는 선녀들의 프레스코가 우연히 망원경 속으로 들어오면서부터라 한다.
계단이 위험하고 가팔라 이 바위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이 지쳐 밀리니 천천히 오를 수밖에. 쉬엄쉬엄 오르니 계단 끝이 정상이다. 옛 왕궁의 폐허와 역사의 무상함을 한 눈에 들어오고, 물이 고여 있는 큰 저수지에는 벽돌공들이 벽돌담을 복원하고 있고 나머지 작은 저수지들은 바닥을 들어내고 있다. 바위 아래의 시기리아 저수지에서 우수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을 동원했다고 하나, 아직도 고증은 되지 않는다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재미난 것은, ‘이 비극의 현장이 지금은 스리랑카 제1의 관광지가 되어 끝이지 않는 외국인 관광객을 모우고 있다.’
뇌쇄적인 춤을 추는 선녀 프레스코
사자 발톱이 웅크리고 있는 광장
첫댓글 와우! 여기 한번 가보고 싶네요...
직접 가서 본 듯한 섬세함 느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