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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 Andreasen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우리가 일일이 고하지 않아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자녀는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자리를 달라고 아버지께 조르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공급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심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어야만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가? 아버지께서 채워주실 것을 다 알면서도 무릎꿇고 비는 것은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닌가?
그에 대한 답은, 사람들이 기도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또한 그분은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똑같이 비를 내리신다. 마5:45. 아무도 무언가를 위해 빌어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편애함 없이 모두의 필요를 채우신다. 사실, 많은 경우 악한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보다 더 잘 산다.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를 허락하심이 틀림없다. 만일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에게만 복을 주시고, 악한 자들은 가난으로 저주하신다면, 어떤 이들은 단지 잘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이다. 그렇다면 복은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매수하는 뇌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생에서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에 대한 욕심 없이 선과 악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치우침 없이 대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데도 경제적으로 부요하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중에는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이들도 있다. 전자는 근면하게 일하고, 그들에게 있는 것을 잘 간수하며 하는 모든 일에 부지런하다. 후자는 부주의하고 나태하며 기도는 많이 하고 일은 거의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느낀다.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계시고 또한 도와주실 것이니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그리스도인 의사보다 열심히 준비한 믿지 않는 외과 의사가 더 좋은 기술을 갖고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해야 하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특별한 도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열심히 연구하고 일해야 한다면, 도대체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하는 농부가 믿지 않는 그의 이웃만큼이나 열심히 밭에서 일해야 한다면, 기도해서 더 좋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무신론자인 친구보다 더 나은 외과 의사가 될 수 없다면 왜 의대생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가?
고백에 대한 삐뚤어진 인식
이 모든 질문들은 전부 기도란 것은 일하지 않고도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낼 수 있는 방편이라는 전제를 기초로 한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성공하기 위하여 일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로서 일을 대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아니다. 기도는 행함이나 일, 혹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기도하고 회개함으로 용서받을 수는 있지만, 악한 행동의 결과를 바꾸거나 그에 따르는 형벌을 없이 할 수는 없다. 다윗은 그의 죄를 자백하고 깊이 회개하였지만, 그가 지은 죄의 결과들은 없어지지 않았다(삼하12:13~14). 이것이 바로 사람은 망각하기 쉽고 그러므로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여러 해 전, 나의 학생들 중 한 명이 중요한 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하였다. 그는 평균 정도 되는 학생이었는데 시험 결과가 너무 잘 나와서 B학점을 받았다. 얼마 후 그의 양심은 그를 괴롭혔고 그는 자신의 부정 행위를 깊이 뉘우치며 나에게 그것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다. 나는 그가 고백해서 기쁘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의 점수를 B에서 F로 고쳤다고 알려주었다. 그 학생은 내가 한 이 일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자백한 것의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결코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자백은 B학점을 얻을 만하지 았았던가? 그 학생은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치르지 않은 시험에 왜 내가 B학점을 줄 수 없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백한다는 것으로 그의 부정 행위를 고칠 수는 없으며 B학점이 요구한 공부를 대신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 학생의 자백의 결과로 그에게 B학점을 준다면 부정 행위를 한 다른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해야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정직하게 학점을 받은 모든 학생들에게 불공평한 일이 될 것이다. 상을 얻으려고 하는 자백은 진정한 자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자백하면 형벌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심으로 사람을 매수하지 않으신다. 순종하는 자에게 상이 허락된 것은 사실이나,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 하는 순종이나 자백은 거의 가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그런 순종은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까불지 않으면 사탕을 주겠다는 약속 때문에 얌전하게 순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욥의 경우에 바로 이 원칙이 걸려있었다. 사단은 조소하듯이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고 욥이 경건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하게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넌지시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울로 두르셔서 어떤 악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고, 그분께서 그 손의 일을 축복하셔서 그의 재물을 늘리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사단은 이야기하였다. 욥1:10.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1:11.
하나님은 사단의 불평을 받아들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하셨다. 이 시험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재물을 바라고 하는 것이라는 사단의 고소를 꺾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기적인 동기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 세상에 있음을 보이고자 하셨다. 비록 욥은 그의 결정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있어서 욥에게 의지하고 계셨던 것이다.
욥의 재물을 뺏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단은 욥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는 그의 자녀들까지도 모두 빼앗았다. 그는 완벽한 일을 해냈다. 종들은 달려와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재앙들을 보고하였다. 갑작스런 재앙에 할 말을 잃은 욥은 나직이 아뢰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1:21, 22. 사단은 하나님께서 욥이 가진 것을 제하신다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욥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승이었다. 왜냐하면 사단이 이 시험의 조건들을 내세웠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동의하셨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 한 사람만큼은 이익을 얻고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사단은 패배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돌아와 말하기를 그가 진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몸에 손대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그의 뼈와 살을 치도록” 하신다면 욥이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하였다. 욥2:5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의 법칙을 바꾸는데 동의하시고,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2:7. 여전히 욥은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험을 그에게 허락하셨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지만 욥은 요동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결과는 첫 번째 시험과 똑같았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2:10.
시험은 끝났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주장과 고소가 허위였음을 증명하셨다. 욥은 이익을 얻고자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다. 욥은 다음과 같은 승리의 말로 그의 믿음을 표현하였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욥13:15(KJV).
왜 기도하는가?
왜 기도하는가, 라는 질문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는 거기에 따르는 이점이 있으며 만약 그러한 유익이 없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러한 생각은 기도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기도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교통하고 친구에게 하듯 그분과 대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친구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가? 우리 자신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고 함인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는 자체가 진정한 우정과 친교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고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가? 그들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답이 아닌가?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자신의 손익을 따지는 것은 그들의 목적과 멀다. 참으로 그러한 동기는 진정한 사랑에 치명적일 것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닌, 주는 것에 기초한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마찬가지로, 왜 숨쉬는가? 라고 물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다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교제가 있고, 기도가 있다. 다른 어떤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하냐고 묻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기도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 아이에게 왜 기쁘거나 슬플 때 엄마에게 달려가서 이야기하는지, 또 자기가 발견한 것을 엄마에게 보여주는지 묻는다면 그 아이는 틀림없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엄마 외에 누구에게로 아이가 달려가겠는가?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엄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엄마는 아이의 지혜의 샘이다. 엄마는 상처들을 아물게 하고 눈물을 마르게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 있다. 그녀는 이해한다. 때때로 아이는 단지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엄마에게 달려간다. 볼을 쓰다듬어 주고, 뽀뽀해 주고, “엄마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이 모든 것이 왜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는지를 설명해 준다. 아이에게는 왜 엄마에게 달려가는지 묻는 것이 유치하고 이상한 것이다. 그 아이는 아마도 어른들은 뭘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옳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가 왜 기도하는지 묻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고 그것을 받지만, 믿지 않는 그의 이웃 역시 기도하지 않고도 양식을 받는 것을 안다. 그는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참새와 악한 자들을 모두 먹이신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왜 기도하는가?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이 받는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조건에 응낙하기를 원치 않음으로 못 받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양식과 더불어 받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나면서, 아버지는 그의 자녀가 음식과 옷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할 것임을 안다. 그는 교제와 친교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는 이해심 많은 아버지의 조언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아들은 스스로에게 그러한 도움이 얼마나 필요되는지 모를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알며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그의 최선을 다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육신을 위하여 모든 이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또한 원하는 자들에게 정신과 영혼을 위한 양식을 주신다. 그분은 모든 이들에게 이것을 제공하시지만, 많은 이들이 육신의 양식은 받아들이면서 영혼의 양식은 거절하여 영원히 잃어버림을 당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이것을 제공하신다. 그분은 모두에게 그 손을 펼치시지만 오직 소수만이 하나님의 손을 잡는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인간이 그분께서 제공하신 것을 거절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너무나 슬프게 한다.
왜 기도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얻어내기 위함이 아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우정이야말로 만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사대주의자는 양의 가죽을 쓴 늑대에 불과하다. 우정은 절대로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왜 기도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무아적인 사랑에 기초한 우정보다 더 거룩한 것은 없다.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하늘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장에 넣어주신 사랑과 동정으로 충만할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친교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우정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4, 15.
“너희는 나의 친구라.” 이것보다 더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이 있는가? 친구를 갖는 것 - 당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열 때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당신의 확신을 견고한 신뢰로써 누설하지 않는 사람, 당신이 갖고 있는 가장 거룩한 소망과 야심을 이야기할 때 마음속으로 비웃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 그 마음이 당신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고 당신의 감정에 반응하는 사람, 비록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다른 이들이 오해할 때 당신을 변호해 주고, 온 세상이 등을 돌려버릴 때 당신 곁에 서 있는 사람, 그 자리에 없거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라도 한결같은 사람, 당신의 약점을 알고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슬플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당신 곁에 있기 위해 대륙을 횡단할 사람, 절대로 당신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을 사람 -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우정인 것이다!
만일 당신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를 꼭 잡으라. 폭풍이나 태풍, 비바람, 눈보라, 물불이 닥쳐와도 그와 헤어지지 말라. 살든지, 죽든지 그에게 매달리라. 그와 대화하라. 그와 교통하라. 그를 사랑하라. 이러한 친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결코 그를 저버리지 말라. 그는 절대로 당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친교
기도는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 혹은 그분께 말하는 것,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친교요, 생명이다. 우정이나 친교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말하는 데 있지 않고, 말을 뛰어넘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데 있다. 진정한 친구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귀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두 사람은 조용하게 바닷가에 앉아 손을 잡고 침묵 속에 달콤한 교제를 즐길 수 있다. 두 사람은 숲속을 걸으며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연과,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헌신하며 하나님과 서로에게 자신들을 바칠 때에, 완전한 이해가 영혼에 깃들 것이다. 겉으로 드러남 없이 마음과 영혼의 교통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입으로 하는 말은 없을지라도, 사랑, 우정, 동의, 그리고 조용한 기쁨과 넘치는 행복이 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다음의 이야기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평생을 함께 한 친구 둘이 인생의 황혼이 가까워올 때, 어느 조용한 오후 둘이 함께 말 한 마디 없이 앉아있다가 저녁이 되면 한 사람이 둘 모두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늘 오후 우리 함께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구나.” 이러한 우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결코 “왜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지금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 천국은 단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지금 수마트라 섬 일만 피트 상공 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방금 고도, 속도, 기온과 날씨 상황 등이 방송되었다. 나의 귀중한 친구들은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처럼 그들의 사랑을 느끼고 즐거워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들이 나를 사랑함을 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안다.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나는 편안히 쉰다.
스바냐 3장 17절보다 더 아름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해 놓은 곳은 없을 것이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구절을 읽으면 어머니가 그녀의 어린 것을 품에 안고 기쁨에 겨워 노래하며 사랑으로 편히 있을 때 아이가 엄마에게 바짝 다가붙는 평화로운 그림을 떠올리게 된다. 평화, 만족,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예로 든 것이다. 어머니가 품 안의 아이에게 조용히 노래불러 주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노래 부르신다. 그분은 그 사랑 안에 쉬신다. 이것은 그 속성이 사랑이신 하나님께 평화와 만족을 드린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비할 데 없는 사랑으로 두르신 그분을 한번 쳐다보기만 한다면 어찌 우리가 그분과 교제를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도는 교제이다. 기도는 생명이다. 기도는 사랑이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귀향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크신 사랑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집에 돌아올 날을 열망하시며, 그 생각에 기뻐하신다. 지금도 그분께서는 이제 곧 되어질 일을 보며 즐거워하신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녀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세기의 사건을 준비하시며 하나님께서는 행복하시다. 오래지 않아 다가올 이 날은 하나님께도 어마어마한 날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본향에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열망은 우리의 것보다 더욱 더 크다. 그분께서는 이미 오래 동안 기다려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과 친교, 그리고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또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영혼의 만족감을 그분에게서 얻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기도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기 위해 기도한다. 그분의 마음을 바꾸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도록 기도한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계획을 바꾸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사 그분의 계획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시도록 기도한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견딜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신실하게 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고생이나 시련에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감내할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한다. 일감을 치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할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과 성도들의 교제를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란 진정한 감동 없이 해내야 될 일이고, 특권이라기 보다는 의무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뜨뜻미지근한 그리스도인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름있는 사람들에게도 기도는 습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경우, 이것은 사람들이 기도의 의미와 그 무한한 가능성을 희미하게 밖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를 말하고, 기도를 외울 뿐,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진수성찬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빵 부스러기만 주울 뿐이다. 그들로 하여금 기도와 기도의 가능성을 연구하게 하라. 그들이 기도할 때 묵상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친구에게 하듯이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들은 전에 결코 꿈꾸지 않았던 영역에 다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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