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졸허수아비와 간솔불로 왜적 물리쳐…각왜동에 새켜 장흥읍 평장리 금안마을…각왜동(왜적을 물리친 골짜기) | | | ▲ 장흥읍 평장리 금(김)안리 뒷산에 있는 각왜동 |
「정유란(1597)때 의병 수천을 모아 밤을 틈타 도고동(道高洞)에 가짜 군사를 매복시키고 잡목이 우거진 숲에 수백 개의 등불을 켰다. 적이 그것을 보고 “군병(軍兵)이 오니 모두 물러나라” 며 혼비 백산하며 후퇴했다. 그 틈을 탄 의병들은 적을 추격하여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승전의 공을 기리기 위해 현(縣」의 관리가 돌을 세워 그 마을을 표(表))하기를 ‘각왜(?倭)’라 하였다.」장흥군 장흥읍 평장리 금안마을 뒷산 바위에 새겨진 각왜동(?倭洞)이다. 각왜동의 주인공은 김응원(金應遠, 본관:경주, 아호:五友堂) 선생이다. 김응원 선생은 선조 2년(1569) 경주후인 평사교리 김희련(호 石靑)과 숙인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서 7남매 중 3남으로 장흥읍 금(김)안리에서 태어났다. 김응원 선생이 24세 되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참혹한 현실에 다시는 되풀이 돼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고장을 지키기 위해 맏형인 훈련판관 응규(應규 호 松川)와 함께 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강진 구강포에 상륙하여 장흥지방을 삽시간에 삼킬 듯 수천의 병력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천여명의 의병으로는 중과부족이었다. 김응원 선생은 강진과 장흥의 경계인 도고동(현 장흥읍 평안리 금안리 뒷산) 일대의 높은 산에 밤마다 수 천개의 횃불을 나뭇가지에 일시에 매달도록 하고 크게 함성을 지르게 했으며, 낮에는 허수아비 병졸을 세웠다. 또한 조석으로 탐진강에 횟가루를 뿌려 수 많은 의병들의 취사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을 본 왜군들은 수천명의 의병이 있는 줄 알고 싸워보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김응원 선생은 싸움에 능한 용장만은 아니었다. 지혜를 모아 적을 혼란케 만들기도 했던 지장(智將)이기도 했다.
| | | ▲ 김응원 선생의 행적이 적힌 문서 |
김응원 선생은 인조16년(1638) 70세를 일기로 고장을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김응원 선생과 도고동 의병을 기리기 위해 1823년(순조 23) 「유명조선국성균생원참봉경주김공각왜비」라고 김응원 선생의 7대손인 김원주씨가 김응원 선생의 행적과 활약 내용을 비문으로 새겼다. 이러한 내용의 각왜비 건립(1823년)에 앞서 조선 정조임금에게 올린 ‘만언봉사’로 유명한 존재 위백규 선생의 부친인 영이재 위문덕(1704-1784년)선생이 기록한 비문의 당사자인 김응원 선생에 대한 행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문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내용으로 보여지며 정확한 행장과 비석에 대한 번역을 통한 규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각왜비는 장흥군지정 문화재5호로 등록된 상태이긴 하지만 안내판의 글씨가 때가 끼고 글씨가 흐릿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별도의 보호나 관리를 위한 조치가 없어 사실상 방치수준인 상태다. 과거 사람들이 살았다는 각왜동 암각자가 있는 골짜기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크고 작은 나무들로 우거져 흔적을 찾아내기조차 힘들 정도가 되어 있다. 각왜동과 각왜비와 관련하여 전라남도 김희태 문화재위원은 “영이재(위문덕)문집과 각왜비문의 내용이 비슷한데 각왜비 제작 전에 행장을 만들었고 문집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비문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며 “지역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상들의 국난극복사례에 대한 좋은 교육자료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각왜비 내용 유명 조선국 성균생원 참봉 경주김공 각왜비(有明 朝鮮國 成均生員 參奉 慶州金公 ?倭碑) | | | ▲ 장흥군지정 문화재 5호 등록된 각왜비(1823년) |
공의 휘는 응원이며 자는 이구이고 호는 오우당이라. 고(아버지)의 휘는 희련인데 대소과에 합격하여 6읍의 원님을 지내고 교리와 관서평사에 이르렀다. 조(할아버지)의 휘는 익환이며 직장 벼슬을 하였으며 비는 청주한씨와 괴산최씨 두분인데 한씨는 생 2남1녀하다. 공은 서기1569년 기사 3월18일 생하니 천성이 총명하고 성격 또한 지존하며 초장 기국이 특별히 뛰어나시었다. 임진왜란 때는 형인 판관공 휘 응규와 같이 수천인을 거느리고 도구동에 들어가서 밤에는 꿩꼬리같은 햇불을 사방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낮에는 가장한 병졸을 동구밖에 둘러 세워두니 왜구들이 대병이 둔결한 것으로 의심하고 감히 접근치 못하였으니 백성들이 공을 믿고 따라 신뢰하여 생명과 재산을 온전히 보전하였다. 부백이 진영의 소식을 조정에 전달 보고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침랑벼슬을 제수하였다. 고을원님이 그 마을 근처 계석에 각왜동 3자를 새겨두었는데 지금도 뚜렸이 나타나 있다. 인조 2년 갑자 이괄의 난을 당하여 공이 장흥창의도유사가 되어 군졸과 군량을 모아 행재소에 달려갔으나 적은 수급을 받고 난은 이미 끝났더라. 병자호란 때는 공의 나이 68세라 노병으로 참전치 못하고 시를 지어 창의제공께 보냈으며 그 시에 되놈의 전진이 눈을 가리고 여러 고을이 바람앞에 풀처럼 휩쓸리나 늙고 병든 몸으로 다시 무엇을 어찌 하겠는가 장하도다 군웅이 이 호남에서 일어났다 하셨더라. 판관공과 거처를 같이 하고 한솥밥을 먹고 항상 침상을 같이 하며 검술을 익히고 사기를 진작시켰으니 그 기개를 가히 알만하도다. 그 마을에 정사를 짓고 호를 오우당이라 하였으니 오우는 송매죽국아라 당시 토구동을 후세에 도고동이라 한 것은 아마도 공의 도고함으로서 그러한 것이리라. 배(아내)는 안동김씨이며 병약하여 후손이 없는 고로 판관공의 아들 휘 천길을 계자로 삼다. 서기 1638년 무인 2월28일 정침에서 졸하시다. 이제야 비석을 마련하여 약간의 사실을 기록하노니 우리 후손들이 이 비석을 보고 감흥하여 길이 빛난다면 참으로 다행하겠습니다. 서기 1823년 계미(순조 23년) 3월 15일 7대손 원주 근식 | | | ▲ 장흥읍 평장리 금안마을주민이 각왜동을 정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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