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북면 흑송리 마을회관 앞에서 前 里長 장성규님과 함께...... 11:01:57
흑송리 마을 회관 건립비
동방의 명문으로 덕망이 높고 높아 우족간에 정이 넘쳐 한 세기를 살아온 민족이다. 이 마을은 고려말 팽장군이 개척하니 유독장군과 관계된 바위며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류계공의 후예 통정대부 명자희자가 류등천에서 흑송마을로 이사하니 오순도손 서백여년이 지나 마을 어귀에 심어진 느티나무가 수호신으로 지키고 있다. 본래 예천군 화장면 흑송을 1914년 행정규역 개편에 따라 문경군 산북면 흑송리로 개편되어 지금은 문경시로 승격되어 지리적 조건에 따라 인화로서 보조금 4천만원과 자부담 2천만원으로 오늘에 마을회관 준공을 보게 되니 참으로 감계무량하여 주민들은 물론 출향인들의 온정을 못잊어 고향을 위해 선금을 모아 자손만대에 길이기 위하여 돌에 새겨 비를 세우노라.
2002년 8월 10일 흑송리 주민 일동
추진위원회
회장 이장 장성규, 총무 지도자 장남덕, 위원 장경덕, 장은덕, 최수진
산양면 위만리 마을 앞에 조성된 충의공 엄홍도님 공원의 정자에서..... 09:27:45
忠毅公 死六臣 生六臣 招待 사육신과 생육신의 글을 전시함.
사육신의 글
유성원 : 초당(草堂)에 일이 없어 거문고 베고 누워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꿈에나 보려터니 문전(門前)에 수성어적(數聲漁笛)이 잠든 나를 깨와라.
성삼문 : 수양산(首陽山)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 아모리 푸새엣 거신들 귀 뉘 따헤 낫다니.
박팽년 :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변할 줄이 이시랴.
하위지 : 객산문경(客散門경)하고 풍미월락(風微月落)할 제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시구(詩句)를 흩부르니 아마도 산인득의(山人得意)는 이뿐인가 하노라.
유응부 : 간밤에 불던 바람에 눈서리 치던 말가.
낙락장송(낙락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엇 하리오.
이 개 : 방안에 있는 촛불 눌과 이별 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 타는 줄 모르는고
우리도 저 촛불 같아야 속 타는 줄 모르도다.
생육신의 글
김시습 : 孟子見 梁惠王 하실 때 첫 말씀이 仁義禮智
朱文公 註에도 그 더욱 誠意正心 우리는 하올 일 없으니 孝悌忠信하리라.
남효은 : 그대를 보내려고 병든 몸 일으켜 홍인문 밖에서 여름 먼지를 들썼다오
오늘 저녁 이별하면 하늘가에 계시리 메밀꽃 앞에서 눈물을 삼킬 그대
동교에서 서남자(徐男子)를 전송하고 나면 세간 이야기 나눌 모용(茅容)같은 이 다시없으리
인의의 도가 설 땅이 없음을 안타깝지만 선생께서야 배 두드리며 인생이 한가로우리.
성담수 : 진종일 강가에서 낚시대 드리우고 맑은 물에 발 담그고 낮잠을 자네.
꿈속에서 갈매기와 만리 밖 노니다가 깨어보니 어느덧 석양비낀 하늘일세.
원 호 : 지난밤 울며 흐르던 여울, 슬프게 울면서 흘러가네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는 소리로다 저 물을 거슬러 흐르게 해 나도 울면서 가노라.
이맹전 : 집 언저리 맑은 옆 맑은 시냇물 찾아가는 꿈 많이 꾸었지
꿈에서 깨어 등 밝히면 내 집안 구대롤세. 슬프다 음성과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니
다만 늙고 병듦이 날로 더해지는 나날이라네.
조 려 : 대나무 고드다고 사육신 ᄀᆞᇀ을소냐 소나무 프르다고 생육신 비ᄒᆞ소냐.
어즈버 萬古忠義歌 대대손손 傳ᄒᆞ리 - 作 노춘수 -
충의공 엄홍도님 공원에 조성 된 시계탑, 엄홍도상, 위만리 마을의 유래, 정자, 사육신과 생육신의 글이 있다.
충의공 시계탑 (Chungui Goung Clock Tower. 忠毅公 時計塔)
1457년 12월 24일 酉時(유시,오후5:30~6:30) 단종은 세조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1457개 전체 벽돌은 1457년을, 4각탑의 12단은 12월을, 원형탑의 24단은 24일을,
기단 6각형은 6시(유시)를 상징한다.
天元地方 사상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누렇다”에서 원형탑과 4각탑의 표현이며.
天地玄黃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에서 원형은 검은색, 상단의 4각은 황색으로 표현.
3단의 노루는 엄홍도가 단종 시신을 메고 눈덮힌 동을지산의 무덤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노루가 놀라서 도망간 자리에 눈이 없어서 그 곳에 시신을 묻었다고 노루를 상징.
시계탑 계기판의 글자는 충의공이 남긴 遺訓 즉 僞善被禍 吾所甘心
(위선피화 오소감심 :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과
嚴忠毅公의 12 글자를 표현.
앞면의 글자 배열은 글자의 하나하나에 시계 숫자가 있다.
당시 백성들 대부분이 嚴忠毅公과 뜻은 같았지만 밖으로 들어내지 못한 것을 표현.
忠 善 心 甘 爲 吾 被 毅 公 所 禍 嚴
12 1 2 3 4 5 6 7 8 9 10 11
덕계리 버스승강장에 주차 후 지내2리로 들어 선다.. 지내교 왼쪽 길은 덕계리.. 09:35:35
池 內 橋
총연장 13m 교폭 8.0m 설계하중 DB 24 Ton
공사기간 1995.6.14.~1996.8.10. 시행청 문경시청 시공자 삼융건설(주)
설계자 지방토목주사보 김한창 감독자 지방토목주사보 김한창
준공검사관 지방토목주사 김창모
건너편 산소는 農業技正星州都公洞燮之墓 配平山申氏淑澈女史 祔(부: 합장하다)
※ 농업기정(서기관)
지내2리 마을 입구 왼쪽에 백산 김재영선생 기념비가 있다.
三山義塾 白山 金在英先生記念碑
이 자리는 抗日志士 白山金在英先生의 生家이다 三山義塾의 搖籃이든 夜學堂의 遺墟이다. 先生의 諱는 在英이요, 字는 松鶴이며 白山은 그 號이다. 貫은 安東으로 忠烈公二十三世孫 主事公 玄黙의 長男으로 西紀 一九一五年 乙卯 正月 二十四日에 誕生하셨다. 夫人平山申氏 와 사이에 長男 大會가 있다. 先生이 一九三五年 乙亥八月初五日 他界하시기까지 實로 짧은 生涯에 우리들 後學이나 門第들이 길이 잊지 못할 足跡을 남긴 분이다. 先生은 聰明과 決斷 이 남에게 뛰어나서 普通敎育을 越班과 首席으로 履修하시고 獨學으로 專門檢定考試에 合格한 秀才로서 少年時節인 十六歲에 하마 이 民族의 起死回生의 進路를 깨닫고 民衆啓蒙과 人材養成에서 그 實相을 示範하다가 二十一歲의 芳年으로 天折하셨다. 三山義塾은 이러한 白山先生의 抱負와 示範體로서 一九三0年 池山新塾이란 夜學堂으로 開設되였든 그 뒤를 이어 一九三一年에 民族敎育의 本格的인 殿堂으로 거듭 發展되였든 私學이니 그 理念은 先生께서 直接 作詞하신 民族歌에 잘 나타나고 있다.
白頭山 精氣 받아 半島 三千里 무쇠 같은 팔다리에 힘이 솟으니
빛나노라 나의 祖國 三千萬 民族 나의 祖國 내 疆土는 내가 지키세.
여기에 祖國과 民族에 대한 꿋꿋한 사랑이 抗日精神의 絶叫로 메아리치고 있었음을 볼 수가 있다. 於間에 있어서 先生에게 加한 倭警의 迫害는 尤甚(우심)하여 多數의 書籍이 被奪燒却(피탈소각)되고 屢次 連行되어 가진 脅迫과 苛酷한 進學妨害의 等等 事例로 苦憷 끝에 終乃(종내)는 致明의 原因이 되고 말았음도 十分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한 先生께서는 生前에 小毫(소호)도 挫折하시지 않고 全國獨學徒들에게 檄文을 보내 救國同志會를 構成하는 等 抗日의 선봉에 나서셨다. 이에 三山義塾은 一九三一年에 문을 열어 白山先生 在職 五年만에 逝去하시니 首門生 素坡 黃永光이 遺志를 받아 後學에 傳授하였으니, 거센 倭政의 波浪에 밀리어 開設 八年만에 門을 닫게 되었다. 噫(희)라 이제 先生이 가신지 半世紀에 이르러 우리 門弟後學들이 微誠(미성)을 모아 先生의 잊을 수 없는 足跡을 길이 기념하고자 돌을 깎아 이 글을 색이노라.
西紀 一千九百八十四年 三月三日 門下生 一同
지내2리 버스승강장... 삼거리에서 왼쪽은 월천리, 직진은 흑송리...
고향마을에 농막을 지은 지인의 주택....
앞쪽의 삼거리에서 왼쪽은 월천리~산북소재지, 직진은 흑송리... 우측 길은 지내1리...
폐교된 월지초등학교로 내려 가는 월천 방향의 고개에서.... 09:59:49
학교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짚덩이가 쌓인 장소가 폐교된 월지초등학교 운동장...
김기자가 초임(1972.5.8~1978.2.28) 근무지였던 추억이 장소로 당시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폐교 전 월지초등학교의 넓은 터(李永漢님의 寄附地 )와 길가 정자....
비석이 땅에 약간 묻혀있고, 글씨가 있어 뒷면을 보려고 넘기고 있다... 10:09:30
慶州 李永漢 敎育事業 褒功碑 (경주 이영한 교육사업 포공비)
(뒷면) 계양재 이영한선생 !
先生의 功績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有限한 人生인지라 歲月도 가고 先生도 가셨지만 그 뜻은 길이 빛나고 後生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先生의 本貫은 慶州 이름은 永漢 字는 문서 號는 계양 新羅始祖 自明功臣 알천양산村長 아찬 알평公의 後裔라. 先生은 卓越한 性品과 獨特한 意志로 少時로부터 勤儉節約하여 赤手成家로 모은 私財 田畓 二千餘坪을 本校에 寄贈하여 오늘의 기틀을 잡아 주시고 後進敎育에 至大한 貢獻이 있음으로 그 當時 本郡의 郡守와 敎育監으로 부타 表彰狀을 받았으며 地域社會로 부터 높은 讚揚과 깊은 欽慕를 받았음으로 先生의 높은 뜻을 萬의 一이라도 後進의 記憶에 심어 記念코저 석자 碑石에 그 功績의 大略을 새겨 永遠히 後世에 傳하고저 하는 바입니다.
(측면) 檀紀 四二八九年 八月 十五日 (서기 1956년)
月池國民學校 父兄 一同
校長 吳 錫 鍾 建立
※ 이영한님의 교육공적비가 길가에 묻혀 있어서 매우 안타깝고, 부끄러웠다.
교적비도 보이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흑송리 넘어 가는 길에서 본 월지초등학교 전경..... 10:22:42
고개를 넘는 오솔길이 보여 고개를 천천히 올랐다...
고갯마루에서 내려서니 흑송리 가는 길이 뚜렷하고, 바로 아래에 태양열발전소가 있었다... 10:27:58
태양열방전소가 비탈을 메우고 있다....
인동장씨 집성촌인 흑송리의 산소가 후손들의 정성으로 잘 조성되어 있다... 10:40:11
흑송리 넘어가는 언덕을 오른다...
흑송리 언덕의 밭에서 마을의 윗 부분을 배경으로... 10:47:07
흑송리 마을의 중심 부분을 배경으로...
깨끗한 흑송리 마을길은 옛 정취가 남아있다.. 10:49:27
흑송리 전 이장이었던 장성규님을 만나서 10:55:02
1972년~1977년 사이 월지초등학교에 근무한 본인의, 당시 학부모님, 학생들의 안부를 물으며 담소했다.
골목길의 담벽에 닥나무 속대와 껍질을 말리고 있다.
흑송리 "98마을공동 농기계 보관창고" 관리를 위한 작업 광장이 잘 조성되어 있다... 시내버스 돌리는 장소...
마을 앞에 "소규모 공공하수처리장"이 설치 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 오래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 되어 있다. 11:10:13
보호수
품격 : 읍·면나무, 고유번호 : 11-26-6-8 시행일자 : 1982.10.26.
수종 : 느티나무 수 령 : 약 450년 소 재 지 : 산북면 흑송리 122
흑송리 우측에 박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지금은 4가구는 흑송리 본동으로 옮겨가고,
1가구만 산다고 주민이 알려주었다... 11:17:41
흑송리 버스승강장에서 간식도 즐기고 휴식도 하면서 ....
시내버스가 마을 안으로 들어 갔다가 돌아 나와서 지내리 방향으로 갔다... 11:22:45
문화 산촌 지내 1리 표석 옆의 길을 따라 고개를 오른다... 11:51:33
능선에 오르니 오른쪽의 지내 2리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빈터는 주민이 떠난 자리로 밭으로 이용...
본인이 월지초등에 근무할 때 개포역~풍정리~지내리~월지초등으로 통하는 능선길.... 11:55:31
능선 길에서 마을이 내려 보이는 좌측에 경주 이씨의 입향조인 암계님의 유지를 받드는 巖溪亭 의 모습...
능선길의 끝 부분에 武科及第慶州李公壽鉉之墓가 있다...
지내 2리 마을 길의 골목을 나오는 모습... 12:03:32
지내(문경시) 보건지소...
주차한 덕계버스승강장에 도착 12:15:43
빨간색의 1인용 승용차가 지나간다....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충의공 엄홍도님의 仁을 실천하신 유지를 받들어, 산 역사교육의 현장을 늦게나마 조성되어 매우 기쁘고, 훌륭한 사업을 이루어 낸 마을 후손들과 담당공무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지내리의 백산 김재영선생은 선각자로서 후학 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신 훌륭한 분을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폐교된 월지초등학교의 부지를 희사하신 계양 이영한님의 교육사업포상비는 당시 학부모와 오석종교장님이 세웠는데 폐교 후 비석을 길가에 버려 놓은 것은 애석하고 부끄러웠습니다. 1972.5.8 초임지인 월지초등학교 근무 시절 첫 숙소로 이용한 산 아래 떨어져 있는 초가삼간(김점룡선배는 큰방, 본인 작은방)의 추억이 살아 납니다. 흑송리의 장성규 전 이장님을 만나 지난날의 담소는 즐거웠고, 지내리의 암계정과 골목길은 빈집이 많아서 세월의 변화를 실감했습니다. 즐거운 탐방 감사합니다.
산양면위만리,산북면 지내리을 처음으로 걸었다. 차만 타고 다니며 마을의 겉 모습만 보고 다녔는데 올겨울 마을 길을 다니면서 마을의 역사와 내력 인물들을 조금이나마 알게되어 기쁘다.
특히 마을의 역사와 내력 인물에 대한 자세한 안내와 설명으로 마을길을 더욱더 흥미롭게 다닐수 있게 해 주는 엄교장께 감사하며, 매번 우리들의 모습을 담고 올리고 자세한 설명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좋은 자료을 올려주어 추억을 새롭게해주는 두순님 늘 감사합니다.
聞慶의 東端인 月池初等의 흔적을 찾아서 첫 방문지인 渭滿里 입구에는 忠毅公 死六臣 生六臣 招待를 造成하여 感動을 준다.단합된 주민과 出鄕人의 노력이 있었기에 엄청난 사업을 한 것이라 思料된다.德溪里는 畸形的 구역획정으로 他郡이 되어 건너서 池內里에 당도하니 입구에 三山義塾 白山 金在英先生記念碑가 훌륭하다.흡사 沈熏의 常綠樹를 빼다박은 듯한 主人公의 一生과 모습이 선연하다.僻村인 까닭에 묻혀있는 史料와 큰 인물의 흔적이 너무나 많다.月池初等의 建物은 간곳없고 마당만 휑하니 남아 외롭고 校跡碑라도 찾을양으로 살펴보니 開校의 功勞者 李永漢 敎育事業 褒功碑만 길 가에 반쯤 묻힌체 버려져 있다.池內里는 慶州李氏 集姓村이라고 했는데 先覺者의 흔적을 왜 쉽게 버렸는지,안타깝기만 하다.옛길을 더듬어 醴泉쪽으로 돌출된 끝마을인 黑松里는 언덕너머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王衣山 줄기를 따라 背山臨水型의 마을이다.50여호중 仁同張氏가 大部分이고 朴氏 몇가구가 더불어 살고 있다.開豁地가 넓게 펴져 富村인듯 하나 애 울음소리 그친지 몇해였던가하니 暗鬱하다..池內里는 1,2리로 分洞되어 있으나 합해도 80여가구에 불과한 閑寂한 마을이다.保健診療所도 休館인듯 고요만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