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리만은 1822년 독일 북부 작은 마을에 태어나,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자랐어요. #고대사 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가 어린 슐리만에게 #그리스·로마이야기 를 들려주곤 했지요. 어린 슐리만은 어딘가에 트로이 유적이 묻혀 있을 테니, 발굴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는 14세에 식품점 직원으로 일하게 돼요. 어느 날 가게에 술 취한 손님이 들어와 '일리아스'의 일부를 그리스어로 낭송하는 걸 듣고, 잠시 잊고 있던 꿈을 다시 떠올렸지요. 이후 슐리만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일이 잘 풀려서 1845년 러시아에 무역회사를 세웠어요. #러시아 와 #오스만제국 이 #크림전쟁 (1853~1856) 을 벌일 때 군수물자를 팔아 큰돈을 벌었죠. 돈을 충분히 모았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고고학발굴 에 뛰어들었어요.
그때까지 많은 사람은 터키의 부나르바시 마을이 트로이가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슐리만은 그보다 북쪽에 있는 #히사를리크 일 거라고 봤어요. 그쪽이 호메로스가 묘사한 지형에 더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했죠. 히사를리크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 서쪽 끝에 있어요. 슐리만은 1871년 히사를리크 발굴에 착수했어요. 놀랍게도 이 지역은 한 시대의 유적 위에 다음 시대의 유적이 층층이 쌓여 있는 곳이었어요. 무려 아홉 층이 쌓여 있었지요. 그는 그중 두 번째로 오래된 층(기원전 2500~2200년 추정)에서 성벽과 성문 유적을 발견했고, 트로이 유적이라고 확신했어요.
지금까지 나온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진짜 트로이 유적이 묻힌 층은 슐리만의 생각과 달리 그보다 1000년 뒤에 형성된 일곱 번째 층(기원전 1275~1100년 추정)이었어요. 슐리만은 커다란 업적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고고학자 가 아니었어요. 그는 오로지 트로이 발굴에 몰두했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 까지 써가며 성급하게 땅을 파헤쳤어요. 그 바람에 일곱 번째 층에 있던 진짜 트로이 유적 상당 부분이 #파괴 되어 버렸지요.
그런 이유로 "슐리만은 #아마추어 였을 뿐"이라는 비판이 나와요. 발굴한 유물 일부를 빼돌린 탓에 #도굴꾼 이라는 욕도 먹지요. 하지만 그의 열정으로 수천년 잠들어 있던 유적이 빛을 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요. 지금도 #고고학의선구자 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871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굴에 성공하면서 전설로 여겨졌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이로 인해 트로이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신화이자 유명한 유적지가 되었으며, 트로이 주변에서 발굴된 동전과 도자기를 근거로 트로이 목마 모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총 9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유적이며 각 층은 시대별로 만들어져 있는 유적인데 트로이 유적이 있다고 추정되는 층은 하인리히 슐리만은 발견 당시 2층이라고 보았으나 1930년대 재조사를 통해 현재는 7층이라고 보고 있다. 1996년에 터키 역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난 후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심 산
유적 발굴 현장 ▼
B.C 13세기 트로이 전쟁▼
유적지 ▼
영화 트로이 전쟁 ▼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
헬레네는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트로이 전쟁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제우스의 딸이었다고 하며 어머니는 레다 또는 네메시스라고 전한다. 또한 디오스쿠오리 형제의 여동생이었고 아가멤논과 결혼한 클리템네스트라와 자매간이며 아가멤논의 동생 메넬라오스의 아내였다. 그러나 메넬라오스가 집을 비운 동안 그녀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인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도망갔다. 파리스가 죽은 뒤 그의 동생인 데이포보스와 결혼했으나 트로이가 함락되자 그를 배신하고 메넬라오스에게 돌아갔다. 메넬라오스와 그녀는 함께 스파르타로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또다른 전설에 따르면 과부가 된 헬레네는 의붓아들들에게 쫓겨나 로도스로 도망갔는데, 그곳의 여왕 폴릭소는 트로이 전쟁중에 죽은 남편 틀레폴레모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녀를 교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 스테시코로스는 그녀에 대한 2번째 이야기에서 그녀와 파리스는 이집트의 해변가로 쫓겨갔고 그곳에서 프로테우스 왕이 그들을 감금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트로이로 간 헬레네는 진짜가 아닌 그녀의 환상이며 진짜 헬레네는 남편이 전쟁 뒤에 이집트에서 구출했다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헬레네 Helene〉에서도 이러한 해석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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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파리스의 심판 ▼
페터 파울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32-1635, 오크에 유채, 144.8×193.7cm
주노, 비너스, 미네르바(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의 세 여신이 미를 겨루는 가운데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황금 사과를 들고 세 여신을 번갈아 쳐다보다 결국 비너스에게 사과를 건네는 장면이 펼쳐진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이 유명한 신화 속 이야기, ‘세계 최초의 미인 대회’ 격인 이 장면은 고전파 시대까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주제이기도 하다. 루벤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이 그림이 걸려 있는 내셔널 갤러리 29번 방에는 똑같은 주제를 그린 루벤스의 초기작이 또 하나 전시되어 있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단연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누드로 서 있는 세 여신의 존재감이다. 하나같이 풍성하고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250년 후에 등장할 또 다른 누드의 대가 르누아르를 떠올리게끔 한다(실제로 르누아르 역시 67세 때인 1908년에 〈파리스의 심판〉을 그린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왜 옛날 화가들이 그토록 그리스 신화라는 주제에 천착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그리스 신화는 화가들이 눈치 보지 않고 ‘여성 누드’라는 주제를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실제로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에 그려진 그림들, 특히 미의 여신인 비너스가 등장하는 그림들을 보면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깜짝 놀랄 만큼 에로틱한 그림들이 적지 않다. 〈파리스의 심판〉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의 소유주는 루벤스가 죽은 후, 다른 화가에게 ‘여신들의 몸에 옷을 그려 넣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세 여신의 누드가 너무 적나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루벤스는 이 그림을 완성한 지 5년 후인 1640년에 63세로 고향 안트베르펜에서 타계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볼 때마다 늘 맨 먼저 느끼는 감정은 ‘이 화가가 그림을 참 잘 그리는구나’ 하는 감탄이다. 정말로 루벤스는 어떤 주제를 택하든, 어떤 크기의 캔버스를 대하든 간에 거침없이 그림을 그려 나간다. 그림의 구도는 늘 드라마틱하며, 색채는 풍성하고 표현력도 능수능란하다. 그의 특징 중 하나가 ‘윤곽선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인데 이는 화가가 미리 밑그림을 그려 넣지 않고 붓질을 하면서 등장인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뛰어난 솜씨 때문에 루벤스는 수많은 유럽 왕실과 귀족들을 후원자로 거느렸고 많은 제자를 키웠다. 반 다이크 역시 그의 안트베르펜 공방에서 일했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누드화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17세기에 어떤 여성이 루벤스의 모델이 되어 주었을까? 루벤스는 자신의 아내를 모델 삼아 이 세 여신의 누드를 그렸다. 풍만하고 당당한 몸매의 세 여성은 각각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을 관객에게 자랑하듯 과시하고 있다. 이 ‘각도의 장난’ 때문에 세 여신은 동일 인물을 모델로 해서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제각기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란히 선 세 여신 중 누가 비너스이고, 누가 주노일까? 맨 왼쪽의 여신부터 한번 보자. 그녀의 몸 옆에 있는 커다란 방패에 메두사의 얼굴이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여신은 미네르바다. 그녀는 파리스의 선택에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막 돌리고 있다. 가운데 선 여신, 파리스에게 막 사과를 받으려는 여신이 오늘의 승리자인 비너스다. 그림 왼쪽 하단에는 그녀의 아들인 사랑의 신 큐피드가 앉은 채 악동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이 표정은 다가올 비극, 즉 트로이 전쟁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여신, 맨 오른편의 여신은 몸에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공작을 거느린 모양새다. 여신 중의 여신인 주노다. 암소와 공작은 주노의 상징인데, 이 두 동물이 주노의 상징이 된 데에는 주피터(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의 지치지 않는 애정 행각과 그를 질투하는 주노의 길고 긴 뒷이야기가 있다.
목동의 모습을 한 파리스 뒤편에는 날개 달린 모자를 쓴 메르쿠리우스(헤르메스)가 나무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 메르쿠리우스 뒤편의 하늘에서는 멀리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선택으로 말미암은 트로이 전쟁이라는 재난을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왜 파리스의 선택이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일까? 세 여신은 각각 파리스에게 ‘나를 최고의 미녀로 선택해 주면’이라는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미네르바는 최고의 힘을, 주노는 소아시아를 다스릴 권력을 약속했고, 비너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노라고 했다. 파리스는 현명한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비너스에게 사과를 건넸다.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그리스의 헬레네였는데, 헬레네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비너스는 약속을 지키고자 헬레네를 빼앗아 파리스에게 주었고,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그리스 연합군을 구성해 파리스가 도망친 트로이를 공격한다. 이것이 길고 긴 트로이 전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전쟁이 단순히 그리스-트로이 간의 전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과 미인 경연 대회’에서 떨어진 주노와 미네르바는 그리스 편을 들었고, 비너스는 당연히 파리스의 나라인 트로이 편에 섰다. 이처럼 신들이 제각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양국의 편에 서서 대리전을 벌였기 때문에 트로이 전쟁은 질질 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 속에 숨어서 트로이 성 안에 진입했고, 그날 밤 일시에 목마 속에서 뛰어나와 성을 불 질러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파리스는 전쟁 중 전사하고, 헬레네는 원래 남편인 메넬라오스에게 돌아가게 된다.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헥토르 등 수많은 영웅들의 목숨을 앗아 간 이 10년간의 전쟁은 결국 ‘한 개의 사과’와 여신들 간의 질투라는 사소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전쟁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무대가 되었고, 르네상스 이후부터는 루벤스를 비롯해 다비드, 로랭, 앵그르, 르누아르 등 수많은 화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 되었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서는 〈트로이〉라는 영화로까지 재생되었으니 역사적으로 기원전 13세기에 일어났다는 트로이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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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황제 동전▼
발굴된 수도관▼
트로이 유적 ,1873년 독일 슐레만 발굴 ▼
트로이 유물 ▼
난공불락 성 ▼
파리스와 헬레네, 1788년 다비드작 ▼
파리스와 헬레네 ,피터폴루벤스 작 ▼
하인리히 슐레만<1822-1890>,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한 독일인 ▼
유물 ,황금 목걸이 ▼
황금모자 ▼
황금잔 ,러시아 푸쉬긴 박물관 소장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