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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2)】 ‘내 마음 네 마음을 묶으면 참 마음."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20
내 마음 네 마음을 묶으면 참 마음
그러면 이제껏 키도 크기도 하고, 기능도 자라고 그러지요.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야, 그것만이 아니야, 그것도 자랄 표적에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우리 속이, 이 속이 뭔지 속이란 모르겠지만, 속이 차차 속이 들어간다고 할까? 속이 뭐 달랑한다고 할까? 어찌됐던 속이란 말이야. 그것이 사람의 사람 된 도리, 또 사람의 이 생명의 자란 소위가 거기에 있어요. 스물 돼도 서른 돼도 생각하는 것이 어린애 때와 다른 것이 없다면 뭐 자랐다고 그러겠어요?
바울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길 어린애같이 하고, 생각하길 어린애같이 하고, 행위를 어린애같이 했지만, 내 이제 와선 그런 걸 다 내버렸다, 그 이다음엔 얼굴과 얼굴을 대한다.” 고 그런 말이 있습니다만,
그럼 우리 생각하는 것이 더구나 어린애답지 않게끔 돼. 그 높이, 높고 넓고 깊고, 높고 넓고 깊다는 것은 또 뭐겠어요? 될수록은 나만 말고 남도, 사람만 말고 물건도, 가다가, 가다가 대우주 전체도, 또 시간도 이제만 말고 옛날도, 이다음에 미래도, 햇수만 영원히 영원한 것, 영원한 미래까지도 우리 마음속에 이렇게 놓고 생각할 수 있도록 되는 데가, 그게 사람의 사람 자란 점, 이젠 이다음에 이보다도 더 발달을 하면 뭣이 될는지 몰라요. 그건 예수님의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라 그런 델 가면, 하늘나라라 하는 지경엘 가면, 굉장히 이보다 더 하겠지만, 지금 적어도 상태에 있어선 자랐다는 표적이 속에 있어. 속에 능력이 어느 만큼 힘 있게 됐나? 속이 얼마큼 넓어졌나? 그런데 있어.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냐 그러면, 옛날에는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기 저 어느 산 위에 계신다든지, 저 알 수 없는 어느 세계에 계셔서 우리 하는 일을 모두 다 이렇게 감시해 보시고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렇게 알았는지 몰라요. 지금은 우리 맘이 훨씬 더 자라고 본즉 어, 이제는 그런 줄 알았다면 산이 여기 아니, 맘이 여기 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그렇게 알게 되는 데가 이전보다 훨씬 생각이 높아진 거 아니겠냐? 이제 말에 산소리가 나온 것은, 이제 이 말하면서 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 산을 내 쓴 글에 있기 때문에 그래, 산을 밖에만 있는 줄 생각하는 때는 그때는 어리석은 때에요. 산을 정말 알면 어드런가 하니, 산이 밤중에 가만히 내가 자리에 들어 누워 있어도, 들어 누워 있어도 저 백운대가 내속에 있고 말이야. 그래 내 베개 밑에 들리는 물소리, 물소리는 거기 가서 들어야만 듣는 거 아니라, 내 자리에 들어 누워 있으면서도 잘 생각하면, 내 베개 밑에서 물소리가 좔좔좔좔 들릴 수 있어. 들려. 그걸 능히 듣게 돼야 정말 산을 아는 사람이야. 산에 가서야만 물소리를 듣게 된다면 사람이랄 거 없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그때 났으면 나도 들을 걸, 지금 났기 때문에 아유 불행이야. 그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이 됐으면, 2천 년 전에 났어야만 듣는 거 아니라, 난 지금도 예수님의 말씀 소리가 아주 또렷또렷 들린다, 그런 자리에 가자는, 믿는 목소리, 그러니까 마음에 우리 사람의 생명의 목적은 마음이 자라서 자라서 시간 공간을 초월을 하는데 가리만큼 될 수 있다, 시간공간을 초월이란 것 뭐요? 다른 말 아니요. 그거 하나님이 우리 이 속에 계시다,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를 하면 틀림없이 들어요. 다른데 계시다면 못 들을 런지 몰라도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니까, 내가 얼마든지 기도하면 들으실 것 아니에요?
그래 내가 아까 말씀, 우리 마음을 한데 묶어서, 내 마음 네 마음이 따로 있을 때에 그게 쓸데없는 마음이지만, 여러 가지 다른 생각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 네 마음 한데 묶는다, 그러면 그것은 그때에 정말 참마음이 됩니다. 내 것 네 것이라고 하는 거 다 없어지고, 그야말로 정말 심리 속에 참하나가 된다, 참 하나가 되려면 참 하나님다운데 가까이 가야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아요? 이 우연적인 조건이 있어가지고, 내 속에 성격이라든지 이따위가 붙어 있어 가지고는 하나 될 수 없을 거예요. 사람이 생각이 매양 하나 못되는 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이라 하는, 예수님이 내가 가지만 간 다음에 보혜사, 진리의 성령을 보낸다, 고로 우리가 아는 성령을 보낸다, 그 보낸다는 건 저기 있던 걸 보내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기 어디 가서? 거기서 야, 인간으로 내려가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가 거라, 그런 거 아니에요. 본래 우리 속에 있던 건데, 자기가 가시므로 인해서 이제 우리가 그걸 깨닫게 돼요. 그러니까 그걸 보내신다, 그렇게 말씀, 보내시지만 멀리 저기 거리가 보내는 거 아니에요. 있던 걸 말하는 거, 우리 속에 있던 것, 몰랐던 거 새삼스럽게 그러니까 가까이, 내속은 내속이지만 몰랐으니까 멀었지, 멀었으니까 온다고 그러지만, 지금 도리어 우리말로 한다면 우리 속에 계신 거, 우리 모르는 건데 발견했다, 그럴 거예요. 난 이점 아주 강조하고 싶습니다.
나는 영파(靈波)를 꽉 믿는다
하나님 저기 멀리 계신다하는 그런 생각만 말고 말이야. 말고, 하나님이 우리 속 다른데 계시겠지만, 더구나도 우리 속에 계시다, 우리 속에 안계시다면 다른데 계신 하나님을 설혹 우리가 만날 수가 없다, 필요하면 내 속에, 이제 생각을 하고 보니까 하나님이 여기 계셨구만! 그렇게 깨닫게 되는 데가 중요한 자리에요. 그것이 내가, 죽었던 내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우리 마음을 참 묶기만 하면 못할게 없다 그 말이야. 정말 그래요. 그 자리가 참 그 자리엘 가면 나타나질 않아도 무슨 난 그 점은 확실히 믿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이라도 아무 말 안하고 있더라도, 나의 욕심 생각 말고 순수하게 이 전체를, 그렇지, 부풀려 우주 전체, 시간으로 하면 역사 전체, 나 따로, 사람 따로, 물건 따로가 없는, 하나님 본래 마음 그대로를 될수록은 가자하는, 그 마음을 맑혀서, 맑혀서 나 그 마음을 이제 어떻게 어디 무슨 전기 보내는 모양으로 어디를 향해 보낸다고 그러지만, 틀림없이 갑니다. 틀림없이. 그게 이제 말이, 이따금 가다가 참 간절한 기도로 아주 그 놀라운 결과를 나타낸다 하는 게 그래 있는 일입니다. 나 그걸 믿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것도 그래 하셨을 거예요. 반드시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 말씀대로 나를 위해 그러는 것 아니라,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 그럽니다. 자기로 한다면 오실 필요 없어요. 오시지 않았어도 나사로 위해서 기도했으면 살아날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게 다 일이, 그렇게 이게 일이 이렇게 돼서, 이런 일이 모두 이렇게 일부러 나사로를 피해 죽으러 가는 것 아니지만, 하필이면 자기 없는 동안에 그렇게 됐는데, 그러나 걱정이 없다, 자기의 도를 믿으니까 그래 와서 그런 일 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여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바로 되기만 하면, 그래 다른 말로하면, 아버지께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기만 한다면, 참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다, 거의 그래 믿는 마음으로 하면 능치 못한 것 없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당장에 눈앞에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않지 말고, 그 점을 보이지 않더라도 믿는 게 그게 믿는 거야. 그러고 문제는 어떡하면 우리마음을 될수록은 순수하게 할 수 있나? 그게 속에 빛이라고. 세상에 빛이라는 거 순수, 속 빛이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 우리 속에 빛이라는 거. 하나님이 빛이기 때문에 너도 빛의 아들노릇해라, 빛 가운데 걸어라, 그러는 것은 어두움이 아무것도 없어. 어두움을 뭐라 그랬지요? 요한서에 어두움이 다른 것이 아니고, 빛 가운데 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 미워하면 그게 어두운 생각이다, 그러면 대개 빛이 뭐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빛은 아주 절대 능력, 못할 것이 없어요, 못갈 곳이 없어요, 능치 못한 것이 없어요.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한테 기도하면, 기도하는 동안에 우리 마음이 어디로? 그래, 그러니까 나 늘 하는 말입니다만, 부정을 해서 감이 형편없는 일입니다마는, 그 점만은 나 혼자 가만 앉아 생각을 하더라도, 그 생각하는 것이 무슨 중앙방송국에서 이 방송해 보내는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 무전파로, 전파가 아니면 참 영(靈)파라 그래. 사방으로 간다고요. 난 그거 꽉 믿어요.
그리고 그것이 아주 내가 순수하게 보낼수록 될수록은 멀리가고, 멀리 갈 거고, 그 힘이 강해. 힘이 강할 거예요. 어디 가서 반드시 무슨 작용을 한다고. 뭐 지금 당장 안 나타나도 아무 때 가서라도 그럴 거라고. 그리고 꽉 한 가지 믿는 것은, 나라하는 사람은 뭐냐? 나라하는 요 인격이 내 마음이라는 게 뭐냐? 내거 아무 것도 없어요. 이거 전 이렇게 믿으니까 그럽니다. 과거의 그전에 살았던 하나님이, 하나님이 나를 내셨지. 하나님이 내셨다는 말은 우리 인간적인 말로 번역을 하면 이렇게 된다, 그 말이야. 제 생각을 하면 전에 살았던 모든 내가 이름을 다 알 수도 없는 허당, 억억 만만의 사람들이 무슨 기도하다 기도가, 그 어느 기도가, 어느 한 점에서 어떻게 모여 와서 그게 요거, 지금 나라는 거야, 또 어느 시기에 오면 이렇게 진화하는 거야. 어느 시기면 또 이루어지고, 우리 마음이라는 거, 그런 거란 난 그래요. 난 아주 그걸 꽉 믿습니다. 그러고 내가 지금 앉아 생각하는 요 보이지도 않는 생각, 이 생각도 다 어디 가서, 어디 가서 이다음에 어느 인간이, 어느 생명이 나타날 거기 무슨 참여해서, 어느 하나의 작용을 하고 있다고 그래요. 미신이라고 생각하겠으면 미신이라 마음대로들 하라고 그러세요. 현대, 나는 이 현대과학의 사상에 반대되지도 않는 줄 압니다. 이다음엔 과학으로, 이런 게 증명이 되는 때가 올 겁니다. 지금 벌써 전자가 상당히 발달돼서 이 속에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전자가 자고 있는 사람이 꿈을 꾸는지, 안 꾸는지, 지금 알지 않습니까? 꿈을 꾸면 여기 전류가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과학이 이만큼 되지 않았소? 그래서 지금 말로 꿈꾸어가지고, 뭐 8분 이내에 깨어버려야 꿈 기억이 되지, 8분이 지나가도록까지 깨지 못하면, 그다음엔 그 꿈 기억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얘기 의사가 합니다만, 하여간 전류로 자고 있는 사람이 꿈을 꾸고 있는지, 안 있는지 그걸 알아요. 그런다면 우리 생명의 신비에 관해서도 좀 더 알 줄 압니다만, 그런 강연 오늘 강의하자는 거 아니라,
하여간 내 마음이라는 건 거저 된 것이 아니고, 과거에 알 수 없는 어떤 무슨 마음들이 맺혀서, 그건 뭐 반드시 선만 아니고 악만, 여러 가지일겁니다. 무슨 그런 그게 어느 순간에 맺혀서, 요거 모여서, 그러니까 나라는 건 뭐냐? 말할 수 없는 허다한 생명의 한 초점이라 그 말이야, 한 초점, 요거 한 초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또 그 대신 여기서 쫙 나갈 수 있어. 광선이 나갈 수가 있어. 여기만 있으면 뭘 해. 들어와 가지고 나가자는 거지. 그러니까 사람이 앉아서 요 잠깐 동안이라도 생각 하나 좋게 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있고, 나쁜 생각 하나 하는 것이 크게, 그러니까 내 생각에서 나쁜 생각이 났다가도 아휴, 왜 이 끔찍한 생각했다, 아이고, 난 근래에 오다가는 공산당 놈들 다 죽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이제는 안합니다. 하지만 그전에는 했던 생각을 하면 그래도 끔찍해. 아휴, 그런 생각하면 안 되지, 아무리 미워도 누구를, 누구를 저분은 제했으면! 죽었으면! 그런 생각하면, 그럼 그 사람이 반드시 뭐 죽는 걸로 나타나지 않아요. 죽는 것으로 나타 날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 어디가 떨어져서 엉뚱한 딴 데가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알 수가 없어요. 이거 미신입니까?
반드시 좋은 일로 나타나리라
난 정말로 그래요. 그걸 안 믿고는 이 믿는 사람의 교통이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걸 믿기 때문에 한사람만 아니라, 될수록은 몇 사람이 왔으면, 우리 마음을 묶어보자, 묶어서 딴 생각 말고, 이 시간엔 한 생각을 해가지고, 제발 요런 일이 없게 해 주십사! 쓸데없는 평지풍파를 일으켜 가지고, 다소 온 젊은 애들 괜히 일으키고 때리고 쏘고 이 끔찍한, 그것이 우리 몸뚱이가 다르니까 저애들 저 남의 일 같지만, 남이 다 남이 외국이 돼서 본다면 뭐라겠소? 한국 사람들 무슨 그동안에 좀 잠잠한 것도, 또 무슨 까닭에 저런 지랄을 하고, 지랄이라고 그럴 거예요. 원 저런 지랄을 하고 있을까 그럴 거예요.
이런 판국에 해먹긴 무엇을 더 해먹는다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에 대해서 미운 생각을 가지는 것보다는, 그래 하나님한테 빌어야 돼. 제발 이게 무슨 까닭인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에 사람인 다음엔 이럴 것 같지 않은데, 이 나라의 사람이라면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어째 이런 일이 납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제발 이제 뭣이 풀리게 하여 주십사! 그런 기도는 우리가 생각이 났다가도 잠깐만, 그만둬. 그걸 줄곧 그대로 힘 있게 기도를 하면 나중에 반드시 무슨 좋은 걸로 나타나리라고 믿습니다. 나 이점에선 믿습니다. 천당 지옥이 있는 건 내가 안 믿어도 말이야. 이 이점은, 이건 확실히 믿습니다. 그런 거 천당 지옥이 따로 있어요. 거기가 있는 거기지. 천당 지옥을 바깥에다 두기 때문에 그런 걸 안 믿습니다. 이다음에 죽은 담에야 만 천당을 가거니, 죽은 다음에, 죽어서야만 무슨 이다음에 가서 심판을 받고 그러니까 얘긴데, 죽길 기다릴 새 있어? 당장 생각이 지금 이대로가 천국이고, 이대로가 지금 지옥인데, 심판 이제 받고 있는데, 언제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 옛날보다는 훨씬 우리가 고도가 됐습니다. 이게 지금 물 타놔서 뭐 아무것도 없다니까, 저 사람들이 저렇게 마음대로 아귀한다, 그래서 종교가 무력해졌지만, 그것은 종교 가르치는 사람이 잘못 가르쳐서 그래. 이건 종교가 낮아진 거 아니라 높아졌어. 그전에 하나님이 산위에 있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있으니까 ‘이 자식아, 너 생각해봐!’ 잘 가르쳐 주면 아무리 악독을 하던 사람들에게도 제 마음속에 하나 알 수가 있어요. 그걸 인정하는 게 사람대접이지 말이야.
사람을 왜 수천 년 전 때 모양으로 말이야. 천당 지옥에 보내야 비로소 알리만큼 그렇게 어리석게 왜 안 낳았나? 남하고 바른 말을 해주는 건, 네 속에도 내 속에 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신 줄 안다, 그러니까 그런 걸 믿지 않으니까 말 안 해주는 거지. 저 따위가 사람이야. 그러고 말 안 해. 그것은 남을 아주 이렇게 깔고 깔봐. 아,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거야, 말 안하는 사람일수록 말이야, 나쁜 걸 보고도 말이야, 말해주지 않는 것이 그 사람 아주 미워하는 거야. 그 사람 깔보는 거야.
보시오, 내 자식이라면 그대로 둬? 내 자식이라면 안 그러거든. 안 들어도 안 들어도 또 해주고 잔소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뭐 이렇게 하면 밥 바가지가 떨어진다, 뭐 어쩐다, 그런 것과 결부시켜 가지고 결국 거기라면 안가. 그건 변명이 그거지. 그렇게 해서 도무지 말이 없는, 우리 사회 가능성이 있지. 고치면 가능성이 있지 말이야. 어찌해 그 마지막 순간까지, 마지막이 어디 있겠소만, 마지막 순간까지 가능성을 인정을 하여야 그게 하나님 믿는 겁니다. 그게 이 세상에 도리가 있는 걸 믿는 겁니다. 세상에 도리가 있다는 건 무슨 소린가 하니, 사람이 나는 누구든지 다 그 속에 하나님 가지고 있다, 제가 있는 줄을 몰라 그러지 하나님이 다 있다. 학생들에게 버스 탄 것을 유리창 두르고 그 속에다 저 철판을 쌓아 놓으면, 그 사람도 마음에 다 하나님이 있다, 채 깨질 못해 그렇지.
그러니까 고 깨어지면 되는데, 이제 고렇게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 행동이 훨씬 달라집니다. 공화당에 모여 앉아서 밤낮 어떻하면 삼선개헌인가? 그것만 꿈꾸는 사람들도 사실 그 속에도 하나님이 다 있다, 제 하나님이나 내 하나님이 틀릴 리가 없다, 하나님이라면 똑같은 하나님이지. 그렇게 인정을 하고 들어간다면, 우리 할 일이 자연히 다를 겁니다. 그런데 그걸 안 믿어. 예수 믿는 사람도 안 믿어.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요게 안타까운 거야. 그걸 믿는데 어떻게 말 안 해주겠냐 그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난 예수님 계시다, 꼭 말할 거라고, 사랑한다면 그러니까 내 이제 아까 그랬습니다. 시대가 다 달라서 안 그런 거처럼 그렇게 보이지, 그건 왜 그러냐 하니, 뭐 예수님 종교인이지 정치인입니까? 그때 그건 지금을 보고하니까 그렇지, 그때는 종교 정치가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이지. 그런 걸 이제 그때는, 그때 물론 그렇지 지금 모양으로 헌법이란 말도 없고, 무슨 선거란 말도 없고, 데모란 말도 없고, 인권이란 말도 그렇습니다마는, 그때는 종교와 정치가 둘이 아니에요. 하나로 있는, 모세 때는 물론이고 모세 때에는 지내서, 유대나라 많이 못돼서도, 그때도 상기 그 소위 대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요새로 말하면, 정치와 종교와 도덕을 다 차지해, 다 관리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그때 바리새교인 비판하고 헤롯당을 보고 욕을 하고 그랬다고. 정말 욕을 하고 그랬는지? 그건 그 다음 어디 다른 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 정말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헤롯당에게 그랬다는 얘기도 듣고, 또 세례요한에게 무슨 그런 얘기도 듣고, 이런걸 보면 정치에 관해 무관심해서, 시대가 다르게 둘이 한데 들러 붙어있으니까, 그래 요새 말하는 소위 정치얘기 그렇게 말이 아닐 뿐이지.
그땐 종교 얘기 말씀드리면, 지금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가 됐으니, 그래. 그건 왜 분리가 됐나? 오늘은 뭐 그 토론 하자는 건 아닙니다만, 간단하게 그 지역을 옮기면, 분리가 된 건 잘된 겁니까? 잘 못 된 겁니까? 잘된 거지요. 그건 잘된 거야요. 잘된 겁니다. 왜 그런가하니 아까 얘기대로, 이렇게 정도가 자라 올라가면, 생명이 자라 올라가면 자꾸 분화가 돼요. 씨대로 있을 땐 하나로 있다가 나무가 자랄수록 가지가 많아지고 잎이 많아지고 점점 더 많아져요. 더 많아지고, 그러니까 저 한마디로 잘라 말을 하면 말이야. 종교는 종교대로 정치는 정치대로, 제 할 역할을 저 할일을 좀 더 고도로 하기 위해서 갈라져, 그러니까 지금 말이 옛날모양으로 정치와 종교가 그대로 있다 그런다면, 한데 붙어있다면 폐단이 많을 거예요. 폐단이 많을 거야요. 아니 지금 종교는 관계없이 정치만 하는데 있어서도 선거 때가 돼 오면 교회사람 매수하려고, 불교사람 매수하려고 뭐 이거 해준다, 저거 해준다, 그러고 하는데 하물며 그때처럼 불교 기독교 맘대로 한다, 그래 보시오. 그 얼마나 썩어졌겠나? 그러니까 이런 거는 다 발달한다고 해서 분화된 겁니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 하면 어드런가 하니 사람이 참 제대로 이 악한 인간 사회니까 그렇지, 사람이 옳게 있는 사회라 그런다면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없어!
안 믿고도 잘 살아 간다
아담이 가령 타락하기 전이라 하는 시대는 어드랬는지, 그런 시대가 난 역사적인 실지 있었다고 생각을 안 합니다마는, 가량 믿긴 이론적으로 생각을 한다, 타락되기 전 시대라 한다면, 그런다면 반드시 뭐 정교가 분리 꼭 돼야 된다는 원인이 없어요. 실지 역사에 나타난 걸로 보면 뭐냐 그러면, 정치라는 건 뭐냐 그러면, 종교에서 이 사람들이 본래 살아가는 이 나라라 하는 것은 처음에는 종교가 했습니다. 그 다른 말로 하면 무슨 소리냐 그러면, 사람의 살림이 옛날에 올라갈수록 종교적이라고, 그때에는 종교가 생활의 일부분이 아니고 생활의 전체였습니다. 애가 날 때에도 종교가 있어야 돼. 옷을 해 입혀도 그래. 밥을 먹여도 그래. 자라도 그래. 죽어도 그래. 결혼을 해도, 일체가 뭐 기독교로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면 살 수가 없던 우리.
그런데 지금은 뭐지요? 지금은 종교는 생활의 일부분이야. 일부분이야. 결코 전부가 아니에요. 예수 믿는 사람, 불교 믿는 사람만 믿는다고 그러지, 안 믿고도 잘 살아가지 않아요? 뭐 현대사람 살아가는데 무슨 종교 없으면 뭐이고 콩팥이 작아진답니까? 무슨 뭐 간장이 작아진답니까? 아무 상관이, 하여튼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이 이럴까? 그럼 이게 왜 이렇게 됐나? 본래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래 하면 사람의 살림이 온통 종교적이었다는 건 뭔가 하니, 사람이 하나님 떠나서 살 수 없다, 하나님 떠나 살 수 없다는 건 무슨 소리야요? 사람이 살면 제생명의 근원되는, 그 근원 돌아볼 그건 모르고 근원에서 떨어져서는 못산다, 그것을 집안에서하면 내 조상이라고 그러고, 국가살림에서하면 임금이라고 그랬고, 내 이 마음에서하면 내 속에 무슨 혼이라고, 여러 가지 말로 발표가 됩니다만, 어찌나 생명의 무슨 계속해 근본 되는 데가 있어. 거기 한데 하나로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 점이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 줄기, 너희는 포도나무 가지라, 가지가 줄기에서 떠나선 못산다, 그 종교는 뭐야? 종교는 다 전부 이렇게 해서 저 끄트머리까지 나오면 다 맥이 통해서 하나로 살아갈 수 있겠끔, 사실 그래서 옛날에 밭에다가 씨를 심을 때에도 하나님, 김을 맬 때에도 하나님이 없으면 제사 드리고 해. 추수할 때도 제사 드리고 해. 그 찔 때에도, 밥을 해 먹어도 제사 드리고야 먹어, 없인 못해. 그런 것이 옛날 살림에는 일체 하나님 내놓고는 살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의 살림이 하나로 이끌게 됐었습니다. 불안, 물론 죄도 있긴 있는 시대입니다마는, 비교적 세상이 괜찮게 지내갈 수, 그것이 사람 입을 만나기만하면 옛날엔 안 그랬는데, 옛날엔 안 그랬는데, 그런 말도 옛날엔 다르다는 그게 뭔지 모르게 우리 맘속에 이렇게, 이렇게 이전이 돼 와서 플라톤의 말대로 한다면, 우리의 영혼의 저 본향을 그리워하는 그 본성에서 그런다, 그랬습니다만 그랬나?
그러나 그게 나쁘냐? 발전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그건 발전하는 동안에 어디서 잘못이 되게 생겼나 그러면, 이 주먹 센 놈에게서 잘못이 있냐? 하면, 꾀 많은 놈, 주먹하고 꾀하고 둘이 맞붙어가지고, 종교가를 집어치우기 시작을 했어. 뭐 저것들만 주냐? 뭐 우리 저거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 것이 고렇게 처음에는 주먹이 센 놈, 그다음엔 꾀가 있는 놈이, 반드시 주먹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의 주먹을 빌려오기도 하고, 주먹이 모자라면 무슨 기계를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시작하는 게, 소위 이 임금이라는 거, 나라라는 거, 그런즉 옛날에 있던 그 종교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러니까 자꾸 그 종교가들 권력을 빼앗고, 빼앗고 또 종교가 나쁜 짓 많이 했으니까, 그래 싸워오고 싸워온 것이 이날까지 온 역사요.
그게 썩 잘해서 이제 17, 8세기까지 나왔다고 그럴까? 이제 오면 아주 그냥 완전히 무관이 세속국가야. 종교가 상관이 없어. 옛날에는 종교가 전부였는데, 거의 다 뺏기고 그래 한다는 게 신교의 자유라, 그러는 걸로 형식에 조금 허락을 해줄 뿐 실지 사람 죽이고 살리고, 옛날에는 사람하나 죽이고 살리고 할 때, 하나님한테 고하지 않고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감히 그래? 한데 지금은 정치라는 걸 아주 세속국가라 하는 거, 종교와는 상관이 없는 국가라 하는 걸 자랑으로 하리만큼, 그만큼 종교가 타락이 돼 미신화 해버려. 그 대신에 그렇기 때문에 참 종교하고 한데 혼동을 해가지고, 아유, 종교 없어도 살아간다, 이렇게 돼. 인심이 오늘날 여기에 오질 않았어요?
그러고 본즉 종교의 분리라 하는데 당연히 그래. 점점점점 살아가서, 사람의 이 생활 내용이 복잡해가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면도 있고, 거기 정치하고 종교하고 권력다툼을 자꾸 하는 여기, 사람의 개인이 혼자에서 하면 내 속에 있는 착한 마음으로 내 이 지식이라, 지식이요, 지혜, 꾀라하는 거, 이 주먹이라 하는 것도 이게 둘이 문제가 서로 갈라져, 그런 문제를 근본에서 말한 게 에덴동산의 문제일겁니다.
본래 저거 다 먹을 수 있는 건데, 요걸 왜 먹으라고 그러지 말라 했냐? 한 이유는 요렇게 하는 게 요 사람의 지능이 발달이 돼 가지고, 근본에 대해서 반항을 하기 시작을 했다, 그런데다가 그 손을 써가지고 따서 먹었다고 그러지 않아요? 이게 점점 기능이 발달이 돼 가지고 기갈하고, 이렇게 해서 이 문명이 이렇게 됐습니다만, 그러면 이렇게 갈라져, 그러나 그래서 사람이 종교적인 이 문제,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내에서 이속에 문제, 또 아까 얘기대로 전체의 한 각 분자가 다 하나로 얽혀있는 그 문제, 거길 떠나서 살 수가 있나?
일이 급해질 때 종교가를 부른다
그건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그런 데가 현대의 고민이 있는 데야. 어떻게 하면 종교 같은 거 실지 아무 상관이 없이 무시하고도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래 그렇게 하고는 안 되는 얘기지. 그러니까 일이 급해질 때가서는 이제 종교가들을 불러요. 세상이 잘 말을 안 들으면 아, 목사님들 만찬 대접하겠습니다. 스님들 대접하겠습니다. 이렇게 하곤 해선 어떻게 이 시국을 좀 어떻게 좀 해주시오. 운운하는 건 어려운 때가서 그러지만, 평상시에 그렇지 않을 땐 무시하고, 문제없이 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무지, 여기가 이제 내 왜 그런 말씀 기다랗게 했는가? 그러면, 오늘 본 데 그 문제가, 난 정치하고 종교하고의 문제, 11장 45절 이하인데,
마리아를 위로하여 왔다가 위문하러 왔다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것은 이제 이런 말을 보면 인간이 믿었다고 그래도, 이 믿은 사람들이 예수님 깊이 이해했겠어요? 그런 의미는 아마 못 될 겁니다. 하지만 하여간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용을 하는, 그런 정도는 들어갔을 거예요. 그다음에 조금 내려가서 보면 예수님 또 오신다니까 호산나, 호산나 그러고, 야단을 부르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니 뭐 예수님이 만일 하자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무조건 복종을 하리만큼 맘이 그렇게 돼버려. 그런데 민중이란 이걸 보면, 일반 민중이란 그대로만 둬두면 판단을 결코 잘 못 아니 한다, 누가 옳은 사람인지? 누가 그른 사람인지? 어느 말이 믿을 수 있는 말인지? 어느 말이 믿을 수 없는 말인지? 아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믿었다,
그러나 그 중에 몇 사람은 바리새인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행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요건 의미가 달라요. 같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보았지만, 솔직하게 그렇게 이렇게 인간의 일로 받아들여서 아유, 참 저 사람 좋은 분이다, 그러고 그에게 전적으로 이렇게 내 마음을 허락을 하는, 여기 한마디로 믿는다, 그러는 것과 그 하는 일을 보지만, 내 속에 뭣이 들어앉은 것이 있어. 더구나 그 들어앉았다는 것이 이해관계가 될 때에, 그게 무서운 거야. 요 사람들은 그래 가서 바리새인 사람들에게 가 보고하지 않았어요?
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행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사람들이 회의를 소집하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많은 기적을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11;46~48)
이게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볼만한 말입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으로 그 해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만 아무 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11;49~50) (녹음20, 3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