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삼국통일 완성을 위해 전쟁을 벌였던 매초성 전투 당시 당군 20만여 명을 패퇴시킨 그 역사의 현장 매초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는 곳이 바로 이곳 양주산성 또는 대모산성이다. 경기도문화재 제143호로 지정되었으나, 1차 발굴시도 후 방치되고 훼손되고 있다.

양주 유일의 성곽인 양주산성이 곳곳이 무너지고 유물 수백점이 나뒹구는 등 훼손이 심각하지만 대책은 전무하다. 양주시가 예산과 관리인력 부족을 이유로 유지보수에 선뜻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양주산성은 제초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듯 사람 키만큼 자란 잡초에 가려져 성벽은 보이지도 않고, 게다가 곳곳에는 등산객들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쓰레기와 각종 오물이 흩어져 있었다. 또, 세월을 이기지 못한 석축이 허물어지면서 성벽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훼손됐다. 일부는 아예 산비탈을 따라 무너져 내렸다. 특히, 지난 겨울 폭설을 이기지 못한 나무뿌리가 뽑히면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수키와) 수백점이 땅 위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아무런 조치가 없다보니 노출된 문화재들은 등산객의 발에 치여 이리저리 뒹구는 실정이다. 시 관계자는 “양주산성을 복원하는데 최소 250억 원 정도가 필요한데 시가 직접 재원을 마련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올해 안에 전문가 자문을 받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 정부 차원의 복원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또 다시 나무가 뽑히면 문화재가 훼손될 수 있어 우선적으로 1000만원을 투입해 주변 나무들을 제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 2005년 시가 양주산성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 신청했지만 문화재청이 ‘초축시기 및 중심사용시기를 명확하게 밝힌 후에 다시 지정을 추진하라’고 반려한 바 있어 철저한 고증이 되지 않으면 사실상 국가지정은 어려울 전망이다.

대모산성은 일명 양주산성(楊州山城)이라고도 하는데, 해발 213m 대모산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다. 이곳은 북서 방향의 유일한 통행로인 광적면 일대를 굽어볼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의정부 쪽으로 내려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4km이며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나 북문 터 좌, 우측과 동쪽 등 3개소에 약 70~80m 정도 잘 남아 있다. 성벽의 높이는 4~5m이고 아랫부분의 폭은 주변의 지세에 따라 가파른 남쪽은 6m, 완만한 북서쪽은 8m쯤 된다. 성벽은 표면이 잘 다듬어진 할석으로 경사지게 들여쌓기 하였으며, 성벽 하단부 바깥쪽에는 보축 성벽을 쌓아 성벽의 안정성을 높였다.
이러한 축성방법은 주로 5~6세기 중엽의 신라성에서 많이 발견되며 아차산성, 삼년산성, 명활산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문은 3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다락문인 현문식(懸門式) 구조로 신라성에서 주로 발견되는 양식이다. 성 내부에는 군창(軍倉) 터를 비롯하여 10여 개소의 건물 터로 추정되는 평지가 여러 곳이 있으며 우물이 5곳 있었다. 유물은 대부분 건물 터 내부와 추정 저장공, 문 터 주변에서 출토되었는데 무기류, 농기류, 마구류, 건물부재, 일반 생활용구 등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건물터 하층의 풍화암반층 주변에서 반월형 석도나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백제, 신라계의 유물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출토유물 중에는 덕부사(德部舍), 국(國), 부(富), 대부운사(大浮雲寺) 등의 명문 기와가 발굴되어 주목된다. 삼국 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유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다. 현재의 석축 성벽은 삼국 시대 때 신라에 의하여 쌓아져 고려, 조선 시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문 터 북쪽에서는 백제계 토기가 많이 출토되어 석축(石築) 성벽이 축조되기 이전에 이미 이곳에는 토루나 목책 등의 방어시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삼국시대에 이 일대는 5세기말까지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6세기까지 고구려에 속하였고, 6세기 중반 이후는 신라의 소속이 되었다. 즉 삼국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접전이 벌여졌던 곳이다. 따라서 산성에서 발견되는 유물이나 유구 역시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백제, 신라계의 유물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유물은 희박하다.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 유물이 고루 분포하고 있어 이 산성이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관방시설로 이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산성이 삼국사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매초산성인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2차에 걸친 발굴의 목적도 삼국시대 대당전투에서 결정적인 전공을 세운 곳인 매초성의 흔적을 찾고자 함이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에 남아있는 성벽은 신라에 의해 축성되었지만, 그 이전 백제시기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요충지로서 이용되었음이 밝혀진 것도 이곳이 매초성지라는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양주 대모산성의 발굴조사는 1995년 동문지, 1998년 서문지에 대하여 각각 실시되었다. 조사결과 동서문지의 외곽구조는 성의 외부에서 보았을 때, 성벽중간에 요(凹)자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다리 등의 보조시설이 없으면 출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벽의 경우 체성 내벽은 생토를 판 후 비교적 큰 활석을 막쌓기 하여 축조하였으며, 외벽은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를 품(品)자형으로 단을 맞추며, 비교적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렸다. 그리고 체성 외벽에는 체성과 비슷하거나 약간 작은 크기의 장방형 석재로 쌓은 보축이 있는데, 체성 외벽의 정확한 구조는 보축 때문에 자세히 확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동문지와 서문지, 그리고 체성에서 최소한 1~2회 이상의 개보축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발굴조사 중 동서문지 주변에서 수습되거나 출토된 토기류는 크게 뚜껑, 高杯, 臺附鉢, 盒, 盌, 鉢, 甁, 壺, 盤, 시루 등 11종을 비롯하여 기대, 벼루, 손잡이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밖에 덕부, 덕부사, 부부 등의 명문이 양각된 기와편과 청자편, 백자편이 발견되었고, 화살촉, 낫, 도자, 못, 차관 등 다양한 종류의 철제유물이 발견되었다. 이와같은 조사결과를 통해 대모산성이 삼국시대에 초축된 이래 여러 번 보수와 개축을 거쳐 늦게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아울러 신라시대의 대당항쟁 이래 대외 항쟁의 주요 거점으로서 대모산성이 가지는 민족사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
첫댓글 한림대학교가 경기도 양주 대모산성 발굴에 참여해 국가사적으로 승격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그 과정에서 양주시 학예연구사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