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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23. [역경의 열매] 트루디 (1-30) 동양인처럼 생긴 나의 외모는 하나님의 빅 픽처?
갈색 머리 갈색 눈에 160cm 남짓한 키
한국으로 보내기 위한 최적의 신체조건
이 덕에 남편 김 목사 눈에 띄었을지도
트루디(왼쪽) 사모와 남편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2016년 극동방송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금도 사람들은 내게 “미국 사람인데도 동양인처럼 생겼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머리카락이 갈색인데다 체구도 아담하고 작아 동양적으로 보인다는 뜻인가. 지금은 익숙한 얘기지만 내가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땐 그런 점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로 말하면 오히려 작은 체구 때문에 친구들에게 ‘flea(벼룩)’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아담한 걸로 치면 코알라처럼 귀여운 동물도 있을 텐데 왜 하필 벼룩이었을까. 어쩌면 작은 체형 덕분에 빌리(김장환 목사) 눈에 띄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빌리는 내가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을 보면서 반했다고 말하지만 그 이면엔 외모의 영향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 게다가 160㎝ 남짓한 키는 어쩌면 한국에 보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맞춰주신 최적의 신체조건이 아니었을까.
내가 태어난 곳은 인구 1000여명이 되는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이다.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호숫가 마을에서 친척들과 이웃들이 모두 대가족처럼 어울려 살았다. 호숫가에서 헤엄도 치고 고무보트를 타면서 친구들과 놀았다. 대게는 예수 믿는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우리 가족들과 친척들은 모두 감리교회를 다녔다. 주일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서 같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정겨운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부모님은 대학 시절 시카고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만나 졸업 후 곧바로 결혼하셨다. 아버지 러셀 스티븐스는 퍼듀대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 전교에서 1등을 한 어머니 메리 톰슨은 맥머리대에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두 분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부모님은 평생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했다. 그 덕분에 나와 형제들도 신앙을 일찍부터 키울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동차 부속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늘 다정하게 나를 대해줬다. 고등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친 어머니는 “여자도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며 예의와 질서를 지키고 친구와 잘 지내야 한다고 조언해 줬다.
우리 4남매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사를 분담해 맡은 일을 했다. 저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기 용돈은 스스로 마련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한 두 분의 교육철학이었던 것 같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토요일에 하루 종일 옆집 아기를 돌봐주고 1달러를 받는 일도 했다. 깐깐한 아주머니의 매섭지만 장난스러운 눈빛이 지금도 생각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부모님에게 정식으로 용돈을 받기까지 나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 버는 재미와 일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약력=1938년 미국 미시간주 레이크뷰 출생, 1958년 밥존스대 교육학과 졸업,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와 결혼, 1959년 11월 세계기독봉사회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파송돼 수원에 정착, 한양대 수원대 아주대 영어 강사(1980~94), 중앙유치원 원장(1979~2017).
* [역경의 열매] 트루디 (1) 동양인처럼 생긴 나의 외모는 하나님의 빅 픽처?
* [역경의 열매] 트루디 (2) '내 안에 계신 성령' 만나고부터 천국과 구원에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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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역경의 열매] 트루디 (2) ‘내 안에 계신 성령’ 만나고부터 천국과 구원에 확신
독실한 부모님 따라 교회 출석은 했지만
십자가 사랑·영원한 삶 등 이해 못 하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서 첫 성령체험
트루디 사모가 학창 시절 미국 미시간주 레이크뷰에 있는 자택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어릴 때는 주일마다 교회에 꾸준히 가긴 했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부모님은 모두 신실한 신자였는데 어머니는 젊은 시절 선교사를 꿈꿨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엄마,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죠.” 이렇게 물을 때면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네 죄를 용서해주셨다”라고 설명해 줬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내 죄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왜 나를 한 번도 만나러 와주지 않으실까.’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사람이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건 목사님 설교나 어머니 조언만으로는 속 시원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목사님이 주일 예배 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문제를 해결 받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다”는 말씀을 하실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예수님 제가 영생과 천국을 먹을 수 있도록 제 마음속에 찾아와 주세요.”
그 후 몇 년 뒤, 중학생이 된 나는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 참석해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그때까지 성령체험이 없던 내게 하나님께서는 그레이엄 목사를 통해 말씀으로 성령을 부어주셨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혹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주님께서는 당신도 모르는 내면의 깊은 죄까지 깨끗하게 해결해 주십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설명한 뒤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외쳤다.
목사님의 그 한마디에 내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내 안에 성령님이 찾아오신 걸까. 이렇게 벅차오르는 내 마음은 뭐지.’ 나는 그 순간까지 내 안의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령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계셨던 것처럼 매우 친근하고 구체적으로 내 기도에 응답하고 계셨다.
‘트루디, 나는 네가 간절히 기도하기 전부터 이미 너를 알고 있었단다. 하지만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이 집회로 너를 인도한 거야.’
그것은 분명한 주님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순간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 설교를 끝낸 그레이엄 목사가 “예수 믿을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말하자 나는 주저 없이 단상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그레이엄 목사를 따라 영접 기도를 하고,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외쳤다.
그때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찬 감동과 기쁨으로 꽉 찼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기도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천국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3) 남학생들에게 인기… 데이트 신청 끊이지 않아
엄격했던 가정 교육 덕에 학교 생활 즐겨
채플 시간 목사님들 설교가 신앙의 토대
“공부에만 집중” 어머니 말 명심했는데…
트루디 사모가 밥 존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교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나와 형제들이 졸업한 밥 존스 학교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있다. 학교는 규칙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학교에서는 늘 성경 요절을 일주일에 3개씩 외우도록 했고 매주 드리는 채플에 늦으면 가차 없이 벌점을 줬다. 밥 존스 학생들은 한 학기에 벌점 150점을 받으면 제재를 받았다. 일종의 학사경고인 셈이다.
일거수일투족이 벌점과 관련이 있었으니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한 규율을 못 버티고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도 한 학기에 10%나 됐다. 나는 이런 규율과 관계없이 학교와 기숙사 생활이 즐거웠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밥 존스의 장점은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명문으로 소문난 학교였기 때문에 기독교 교육을 받기 원하는 유수의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채플 시간에는 당시 유명한 미국 목회자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들었던 설교가 내 젊은 날 신앙의 토대가 됐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지만 언제나 내 주변에는 남자친구가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미인이라거나 이성을 사로잡는 매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둘러보면 여자들보다는 남자가 훨씬 많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상급생인 올린 하틀리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당시 밥 존스 학교에는 이성 간에 걸을 때는 거리를 5인치 내로 좁히면 안된다는 것과 여성이 남성의 데이트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다. 나는 체구가 작은 올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트를 수락함과 동시에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일단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는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딴 생각 하거나 행실을 바로 하지 못하면 중간에 다시 데려올 거야.” 올린과는 교회나 음악회에 몇 번 간 것으로 그쳤다. 데이트를 하는 내내 어머니 말이 떠올라 제대로 말도 못 붙였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린든 플라워스라는 잘생긴 남학생이 내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린든과도 데이트를 오래 하지 못했다. 그의 누나가 사사건건 개입해 우리 둘을 갈라놓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밥 존스 3세(밥 존스대 재단 설립자이며 총장이었던 밥 존스 박사의 손자)를 만났다. 그는 당시 기지와 재치가 넘치던 아이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나 역시 밥 존스 3세가 싫지 않았다. 그와 매일 강당이나 식당에 함께 다니며 많은 얘기를 나눴고 음악회에도 여러 번 갔다.
하지만 밥 존스 3세와의 교제도 그리 길지 못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미시간주에 있는 집에 두 달 동안 다녀온 사이에 밥 존스 3세가 다른 여학생과 교제를 하게 된 것이다. 그와의 교제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빌리(김장환 목사)에게 데이트 신청 편지가 온 것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의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4) 첫 데이트 후 “우리 함께 기도하자” 빌리의 말에 감격
지역 학생들 사이 다방면에 스타인 빌리
영어 선생님 도움받아 러브레터 보내와
신사적인 매너, 깊은 신앙심에 반해
트루디(왼쪽) 사모와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밥 존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데이트 중에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빌리(김장환 목사)는 학교 내에서도 항상 유명했다. 그는 동양인이었지만 축구부 주장이었다. 웅변대회 상도 언제나 빌리의 차지였다. 지역대회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대회, 전국 웅변대회까지 휩쓸었다. 한국인 유학생이 고등학교 웅변대회에서 최고의 상을 받는 건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빌리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스타 중에 스타였다.
밥 존스 고등학교에서는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땐 반드시 편지를 먼저 보내야 한다. 규정상 교내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이나 음악회는 남녀가 함께 봐야 했기 때문이다. 여학생들은 공연이 있는 날이면 누구에게서 초청장이 올지 다들 궁금해했다.
나는 보통 초청장을 5장쯤 받았는데 빌리도 내게 편지를 보낸 남자들 중 하나였다. 나는 빌리의 이름이 적힌 초청장을 보면서 가슴이 설렜다. 친구들이 말하길 “그 편지는 빌리가 여학생에게 보낸 최초의 편지”라는 것이다.
‘식당에서 서빙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어. 나와 함께 음악회에 가지 않을래.’
편지를 통해 빌리가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렇다면 왜 진작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걸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빌리는 영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 러브레터를 썼다고 했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음에도 가난한 동양 남학생한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짐작해 편지를 망설이고 있다가 나를 보고 용기를 냈다고 했다.
음악회에 가는 날, 나는 벨벳 드레스를 한껏 차려 입고 빌리 앞에 나타났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빌리에게 선택을 받았으니 다른 여학생들에게 얕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침 일찍부터 치장했다. 빌리 역시 멋지게 차려입었지만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키 166㎝에 불과한 빌리는 내 키가 자신보다 더 크진 않을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빌리가 키가 작다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빌리가 공연장에 들어갈 땐 나를 먼저 들여보내줬고, 안에서도 의자를 빼주는 등 신사다운 매너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에 외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음악회가 끝나고 헤어질 무렵 빌리는 기숙사 앞에서 내 앞을 턱 가로막았다. 그 또래 아이들은 보통 “잘 자라”라고 말하고 헤어지는 게 고작이었던 터라 나는 좀 긴장됐다.
‘혹시 5인치 거리 규정을 어기고 키스라도 하려나.’
나는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빌리의 시선에 얼굴이 빨개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다가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헤어지기 전에 함께 기도하자.”
우리라는 말에 가슴이 더 뛰기 시작했다. 기도 내용은 단순했다. 음악회에 잘 다녀온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빌리와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키스를 할 것이란 내 순진한 예상과 달리 첫 만남을 하나님께 감사 돌리는 빌리의 모습에 나는 감격했다. 그때 나는 ‘이 남자의 신앙과 인격이라면 앞으로 계속 만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5) 사랑에 빠진 트루디, 빌리의 어린 시절 궁금해져…
한국전쟁 중 우연히 만난 미군 따라
어머니 반대 무릅쓰고 미국행 유학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게 돼
6·25전쟁 중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를 하던 시절 김장환(오른쪽) 목사와 칼 파워스 상사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빌리(김장환 목사)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에서 간증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때 신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주말마다 선배들과 시골로 전도집회를 다녔다. 나 역시 빌리가 강단에 선 모습을 몇 번 봤는데 학생들에게 그의 강연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떤 날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 남부에 있는 아칸소 주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유명세가 퍼지자 빌리는 대학교 3학년 때쯤엔 이 도시 저 도시로 불려 다니는 유명 강사가 돼 있었다. 빌리가 바빠지면서 주말에 나와 함께 지낼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서운하기 보다 마치 내가 빌리의 일을 하는 것인 양 뿌듯함을 느끼곤 했다.
“빌리는 한국에서 어떻게 자랐어요?”
한 번은 빌리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서 물어본 적 있었다. 빌리는 한국전쟁 때 우연히 어떤 미군의 눈에 띄어 하우스보이가 된 사연과 어머니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까지 오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빌리는 당시 칼 파워스라는 미군 상사를 통해 미국 유학을 오게 됐다. 칼 파워스는 당시 크리스천이 아니었는데 한국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자신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환갑이었던 빌리의 엄마는 10년이라는 유학 기간 동안 아들을 보지 못한다는 말에 미국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단호한 모습에 결단을 내린 그는 아들이 미국으로 가기 전날 옷에 부적도 달아주고 흙 한 봉지도 싸줬다. 아들의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한국의 풍습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중에 “만약 빌리가 미국에 오지 못했다면 이렇게 유명한 전도자가 될 수 없었겠죠”라고 물었다. 빌리는 옅은 미소를 띠면서 이렇게 답했다. “물론 트루디도 만날 수 없었을 테고.”
어린 소년이었던 빌리는 겁도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미군을 따라갔지만 나는 그 이면에는 그를 미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가 계획돼 있었다고 믿는다. 전쟁통에도 방과 후에는 나무를 하러 뒷산에 가야 했던 어린 소년, 그의 앞날을 내다본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미국으로 보내셨던 것은 아닐까.
나는 미국에 있을 때 빌리의 한국 이름 대신 영어 이름을 불렀다. ‘김장환’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발음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장’과 ‘환’이란 글자가 모두 입을 오므렸다 펴야 하는데 ‘billy’는 그냥 휘파람 불듯 부르기 쉬웠다. 빌리는 가끔 그런 내게 “김장환, 김, 장, 환 이렇게 발음해 봐”하며 내 발음을 두고 놀렸다.
하지만 빌리도 영어를 썩 잘했던 건 아니다. 각종 웅변대회에서 상을 타긴 했지만 빌리는 영어 발음이 약간 이상한 데다 문법이 틀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점이 오히려 더 귀엽게 느껴졌다. 발음이 이상한 게 빌리의 매력 중 하나라고 이야기하면 친구들은 내게 “빌리한테 푹 빠지긴 빠졌다”며 나를 놀렸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6) 나의 청혼에 “대학부터 졸업하라”… 증표로 반지 교환
졸업 후 한국 돌아갈 것 같은 조바심에
같은 해 대학 졸업을 목표로 공부 전념
한 남학생과 만남 본 빌리, “헤어지자…”
밥 존스 대학교 재학 중 교제하던 시절의 트루디(오른쪽) 사모와 김장환 목사.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빌리(김장환 목사)가 대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우리는 정식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빌리에게 “결혼하자”고 제의했다.
“난 대학 졸업 안한 여자와 결혼 안 해.”
나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빌리는 내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러면서 “나와 결혼하고 싶으면 대학을 졸업하라”고 말했다. 빌리가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은 조바심 때문에 꺼낸 말이었지만, 사실 나는 한국에 가서 살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국은 너무 먼 나라이기도 했지만 아직 결혼할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마운 것은 빌리가 내 말을 흘려듣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고등학교 졸업 반지를 서로 바꿔 끼면 어떨까. 그럼 우리가 서로를 믿고 있다는 증표가 될 테니까.”
빌리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서로 교제하고 있으면서도 정식으로 사귄다는 생각이 안 들었던 터라 그의 배려가 어떤 확신을 주는 것만 같았다.
이후 밥 존스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교육학을 전공했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교사를 하셨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빌리와 같은 해에 대학을 졸업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공부에 전념했다. 학기 중에는 최대한 수강 신청을 많이 했고 방학 때는 서머스쿨(계절학기)에 다녔다. 집에서는 어머니에게 라틴어를 배워 학점을 채웠다. 어머니는 교사 자격증이 있으셨기 때문에 수업을 받으면 정규 과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게는 밤 11시까지 공부하고도 새벽에 일어나 또 공부했다. 어떤 날은 3시간만 자고 공부했던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평일에는 식당에서 서빙을 했고 토요일에는 세탁소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빌리가 대학교 3학년 때 나도 같은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4학년 과목을 상당수 이수한 상태였고 나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빌리와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빌리와 함께 졸업하면 정식으로 프러포즈 받을 수 있을 거야.’
부푼 마음으로 매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가 찾아왔다. 도서관에서 가끔 마주치는 돈이라는 남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빌리가 오해를 한 것이다. 나는 돈 옆에서 빌리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는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가버렸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하며 걱정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그날 저녁 빌리는 기숙사까지 날 찾아왔다.
“그 남자 누구야.”
“돈은 도서관에서 알게 된 친구예요.”
내 대답을 들은 빌리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주면서 말했다.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역경의 열매] 트루디 (7) 4개월 만에 화해… “다신 헤어지지 말자” 약속
빌리와 헤어짐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축구 응원 핑계 삼아 먼저 손 내밀어
다시 반지 교환하며 결혼까지 예감
김장환(왼쪽 첫 번째) 목사가 밥 존스 대학교 재학 시절 축구부 주장으로 활동하던 모습.
내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빌리(김장환 목사)를 보면서 나는 큰 오해가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 순간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해봐야 변명 밖엔 안 될 것 같았다. 조용히 빌리의 반지를 돌려줬다. 빌리가 감정적으로 동요된 상태이고 나중에 화가 풀릴 것이라 생각해 일단 위기 상황을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빌리는 나와 만나지 않기로 이미 결심한 것 같았다. 방학이 되고 내가 미시간에 가 있는 동안에도 빌리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나 또한 빌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거의 넉 달 동안 연락이 끊겼다. 4년 동안 사귀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서로 자존심 때문에 그랬던 듯 싶다. 개학하면 빌리가 자연스럽게 화해하자며 찾아오리라 생각했지만 나만의 착각이었다.
11월 마지막 주에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는 축구 대회가 열렸다. 나는 올해를 넘기면 이대로 헤어지게 될 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를 찾아갔다. 축구부 주장인 빌리를 응원하면서 자연스럽게 화해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빌리에게 다가갔다. 빌리 또한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는데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오늘 이길 자신 있죠.”
“물론.”
단답형인 빌리가 야속했지만 나는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목적을 꼭 달성하길 바래요.”
“고마워.”
어색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대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경기는 시작됐고 나는 응원석에서 빌리 팀을 응원했다. 결과는 빌리 팀의 승리.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빌리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 빌리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빌리는 저녁 무렵 나를 찾아왔다.
“우리 다시 사귈래요.”
“우리가 언제 헤어졌어.”
빌리의 말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마음을 알아보려고 반지를 빼서 준 건데 너도 반지를 돌려줘 네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했어. 개학하고 나서 네가 그 남학생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다시 찾아가지 못했어. 낮에 나를 먼저 찾아와 줘서 고마워. 우리 다신 헤어지지 말자.”
빌리는 반지를 다시 내밀며 속마음을 털어놨다. 나는 “헤어지지 말자”라는 빌리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앞으로 우리가 결혼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빌리는 1958년 5월에 대학을 졸업했다. 나는 남은 과목을 이수하느라 그보다 3개월 늦은 8월에 졸업했다. 내가 졸업 전 빌리에게 “이제 프러포즈 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라고 묻자 “날짜를 잡아 놨다”고 대답해 깜짝 놀랐다. 빌리도 오래 전부터 나와 결혼할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8) 어머니, “가난한 한국에 시집 못 보내” 극구 반대
태어날 2세·딸 걱정에 반대하던 어머니
“빌리만한 신랑감을 찾기는 어려울 것”
밥 존스 대학 총장의 강력 추천에 승낙
트루디(왼쪽) 사모와 김장환 목사가 1958년 8월 8일 미시간주 그린빌 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빌리(김장환 목사)와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일주일 만인 1958년 8월 8일 저녁 8시, 미시간주 그린빌 감리교회에서 결혼했다. 결혼식 당일 한국에서는 아무도 오지 못했다. 칼 파워스 상사가 빌리의 들러리 역할을 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시댁 식구 누구에게도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한 셈이다. 빌리는 나와 결혼을 결심한 뒤 한국에 ‘미국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편지를 써서 결혼을 알렸다. 개인 전화도 없고 한국에 다녀올 여건도 못되니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빌리와의 결혼이 마냥 호락호락했던 것은 아니다. 시어머니 같은 파워스 상사의 험난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빌리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데려올 당시 그의 어머니에게 “빌리를 공부시킨 뒤 반드시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약속했기에 미국 여자인 나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혼하면 한국으로 돌아가기 어려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워스 상사는 광산촌이 있는 버지니아주 깊은 산골에 살고 있었다. 그는 광산촌으로 시집 오는 처녀가 없어서 결혼도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 여자가 가난한 한국으로 시집갈 리 없다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파워스 상사의 부름에 나는 테스트를 받는지도 모르고 음식 준비와 집안 청소를 열심히 했다. 거리낌 없이 집안일 하는 나를 보고 파워스 상사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트루디 같은 여자가 있었다면 나도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
파워스 상사는 빌리와의 결혼을 축하해 줬다. 하지만 더 큰 난관은 따로 있었다. 우리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빌리를 반대하면 결혼하지 않을 작정이었기에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빌리가 제 남편감이 아니라면 이 결혼을 막아주세요.”
물론 빌리가 너무 좋긴 했지만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결혼해선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어머니는 역시나 “가난한 한국에 시집보낼 수 없다”면서 극구 반대했다. 무엇보다 결혼한 뒤 태어날 아이들 때문에 승낙하지 못했다. 혼혈아 신분으로 한국에서 살기 힘들 테고 나중에 미국에 와도 쉽게 적응할 수 없을 거라며 걱정했다. 아버지는 내가 예비 목사님과 결혼하는 걸 찬성해 두 분의 의견이 엇갈렸다.
“여기까지 와서 빌리와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거의 포기할 뻔했지만 주님은 빌리와의 결혼을 예비해두고 계셨다. 어머니는 고민 끝에 밥 존스 대학교 총장을 만나 빌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달라고 말했다. 총장이 “빌리 만한 신랑감을 찾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자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했다. 당시만 해도 국제결혼이 큰 이슈였지만 빌리와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별다른 어려움 없이 결혼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9) 남편의 한국행 결심에 “주님 뜻 이룰 수 있게…” 기도
“한국으로 가야겠소” 빌리의 폭탄선언 후
작별과 모금 위해 밥존스 출신 교회 순회
빌리 설교에 감동 받은 사람들 헌금 약속
트루디(오른쪽) 사모와 김장환 목사가 1958년 8월 8일 결혼을 기념하며 찍은 웨딩 스냅사진.
결혼한 뒤에도 우리 부부는 무척 바쁘게 생활했다. 남편 빌리(김장환 목사)는 주말마다 설교를 했다. 많진 않았지만 사례비로 월세와 식료품비, 대학원 학비 등을 낼 수 있었다. 남은 돈은 꼬박꼬박 저축했다.
허니문은 꿈같은 말이었다. 주변에선 “신혼을 좀 더 즐기라”고 말했지만 나는 불만은 없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빌리가 늘 다정다감하게 대해줘 행복했기 때문이다.
주의 일을 하는 남편을 따라다니는 사모의 행복을 그때부터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빌리의 이름이 알려지며 설교를 요청하는 교회들도 많았다. 빌리는 내친김에 박사까지 공부하려고 했지만 한국 가족들의 전도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듯 어느 날 내게 선포했다.
“한국으로 가야겠소.”
빌리의 소망은 하루빨리 늙은 어머니를 전도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폭탄선언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내가 빌리였다고 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모든 게 편리한 미국에 살면서도 그는 틈틈이 한국을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내 동의를 구하고 결심을 굳힌 빌리는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우리는 1959년 11월 한국으로 떠나는 배표를 샀다. 당시 남편은 내 수입까지 관리했는데 행여 내가 돈을 다 써버리면 한국으로 돌아갈 배표를 사지 못할까 봐 그랬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작별 인사를 겸함 모금 여행을 떠났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출발해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버지니아, 오하이오, 미시간,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등을 돌면서 모금했다. 남편과 나는 늘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매달 50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단체가 있다면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인 캔톤 침례교회에서 그 응답을 받았다. 교회 측에서 매달 50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매달 50달러 지원은 50여년 전 교회 입장에서는 매우 큰 결정이었다. 빌리는 이후 밥 존스 학교 출신의 교회들을 돌면서 여러 번 설교했다.
“저는 가난한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 미군을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오게 됐습니다. 피땀 흘린 노력 끝에 밥 존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주님을 모르는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반드시 복음으로 변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동의하신다면 선교 헌금을 작정해 주십시오.”
빌리의 말에 사람들은 감동했고 선교 헌금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가는 곳마다 우리를 반겨줘 빌리와 나는 용기를 얻었다. 우리는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주님 부족한 우리 부부를 사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나는 빌리 모르게 속으로 한 가지 기도를 덧붙였다.
‘저는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빌리와 함께 한국에 가서 제가 할 일을 알려주시고 낯선 곳에서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그 당시 내게 한국은 아프리카처럼 먼 이름이었지만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0) 날 껴안은 시어머니 “예쁘게도 생겼네, 꼭 한국 사람처럼”
독서와 한글 공부하며 17일 동안 항해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선 한국에 도착
8년 만에 본 아들 며느리 눈물로 반겨
트루디 사모가 1959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메이든 크리크 화물선을 타고 한국 인천항으로 오는 배 안에서 머플러를 머리에 두른 채 사진을 찍었다.
1959년 11월 우리 부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메이든 크리크라는 화물선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어릴 때 호숫가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놀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배를 탄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망망대해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배를 타고 오는 17일 동안 남편과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간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대화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부부는 크루즈 신혼여행을 한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지냈다. 대화 소재는 주로 한국에서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못쓸 텐데, 내가 한국말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돼요.”
“알고 보면 한국말 그렇게 어렵지 않아.”
빌리는 내가 한글을 하나도 모른다는 게 걱정됐는지 틈만 나면 한글을 가르쳤다.
“자 따라 해봐. 시어머니 안녕하셨어요.’”
미국에선 너무 바빠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남편은 그런 내게 자음과 모음을 가르쳤고 ‘가갸거겨’를 열심히 외우도록 했다.
17일간의 긴 항해 끝에 12월 12일 밤 8시에 부산에 도착했다. 밤에 도착해 한국의 전체적인 풍경은 볼 수 없었다.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불빛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불빛이 샌프란시스코와 너무 닮아 있어서 부산도 좋은 집이 많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아침에 갑판에 나갔을 때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아름답던 불빛은 알고 보니 수많은 오두막집에서 나온 것이었고 산은 황폐하기만 했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미국에서 가져온 짐을 인천행 배로 옮겨 실은 뒤 입국 수속을 했다. 남편과 다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탔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가족들은 어떤 분들일까. 만약 나를 환영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걱정과 호기심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남편은 갑판에서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오랜만에 만나는 어머니와 가족들이 어떻게 달라져있을지 궁금한 눈치였다.
12월 13일에 인천 앞바다에 화물선이 도착했다. 우리가 가져온 짐이라곤 픽업트럭 한 대와 작은 냉장고 그리고 가방 3개가 전부였다. 가방을 들고 부두로 나오는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있다. 얼핏 200명 남짓한 사람들이 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전부다 빌리 친척이에요.”
“아니 나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오늘 무슨 날인 건지도 몰라.”
남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보니 30명 정도는 수원에서 온 친척들이고 나머지는 미국 사람을 처음 보는 구경꾼들이었다.
“아이고 장환아!”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주름살 많은 할머니가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다. 시어머니는 8년 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남편의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 나왔다. 그다음엔 돌아서서 나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셨다.
“네가 장환이 색시냐. 예쁘게도 생겼구나. 꼭 한국 사람 같네.”
어머니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나도 한 식구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1) “국수에 생선이 둥둥…”하며 기겁하자 사람들 박장대소
오랜 여행 끝에 시장했을 거라 생각
잔치국수 권하자 반갑게 먹으려다가
육수로 낸 멸치를 보고 깜짝 놀라…
트루디(왼쪽에서 두 번째) 사모가 1960년 2월 시댁 친인척, 지인들과 함께 방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인천에서 본가인 수원에 도착할 때쯤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초가집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우리 부부가 들어서자 모두들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고등학생 때 미국을 떠난 빌리(김장환 목사)가 미국인 부인을 데려온 것이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는 시어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처음 입는 한복이라 그런지 저고리 매무새 등 모든 것이 어색했다. 한복을 입고 나오자 누군가 내가 배가 고플 거라고 생각했는지 국수를 권했다. 마침 오랜 여행으로 시장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상 앞에 앉았다.
“빌리, 포크는 어딨어요.”
스파게티처럼 생긴 국수를 마주한 나는 젓가락 사용법을 몰라 남편에게 물었다. 빌리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젓가락으로 이렇게 저어서 먹는다”면서 시범을 보였다. 어렵게 젓가락질을 따라 하면서 국수를 집어 올리는데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졌다.
“국수에 웬 생선이 둥둥 떠다니는 거죠.”
잔치국수에 들어간 멸치가 마치 살아서 헤엄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 기겁을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시어머니는 망설이는 내게 “어서들라”며 먹는 시늉을 했지만 도무지 국수에 손이 가질 않았다. 국물이라도 마셔보려 했지만 비린내 때문에 넘어가지 않았다.
난생처음 본 김치도 신맛 때문에 손도 못 댔다. 지금의 내 식성을 아는 분들이라면 웃음이 터질 일이지만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그랬다.
“자 따라 해봐. 어머님 여기 앉으십시오.”
시어머니는 건넌방으로 나를 불러 한국말을 가르쳤다. 그 방에는 시어머니 친구들도 모여 있었는데 어머니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나를 가르쳤다.
“어머니 여키 앉으시오.” 내가 어눌하게 말하자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그날 저녁에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같은 인사를 배웠다.
우리 집에는 큰형님 내외와 조카 9명, 시어머니, 우리 부부까지 모두 14명이 모여 살았다. 어머니는 방 3개 중 건넌방을 우리 신방으로 내주셨는데 미국에서 가져온 책과 가재도구를 풀어두니 누울 공간만 겨우 남았다. 어머니는 미국인 며느리가 추울까 봐 방바닥에 담요를 깔아두셨다. 자세히 보니 미국에서 선물로 보내드린 담요였다. 우리가 보낸 선물을 아껴뒀다가 다시 내놓은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시어머니께 사랑받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났다. 미국에서도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식사 준비든 뭐라도 도울 생각에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예상대로 맏동서가 혼자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려고 하자 “안 된다”며 만류했다. 결혼한 새색시는 며칠 동안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하지만 그대로 있는 건 어쩐지 염치가 없는 일 같았다. 어느 날 뭔가 할 일을 찾다가 진흙이 묻은 시아주버니의 바지를 솔로 털어냈다. 시어머니가 나를 말렸지만 어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배어있었다.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2) 한국 음식 적응 못해 “어머님, 고추장 맵고 김치 시어요”
시어머니 정성에도 불구 음식 입에 안 맞아
과자와 인스턴트커피로 배고픔 달래다
남편 설교하는 비행단 미군 식당서 해결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오른쪽) 목사가 1960년쯤 수원에서 어머니 박옥동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
“또 남겼네.”
시어머니는 늘 밥그릇에 밥을 가득 얹어주셨다. 반찬이 좀처럼 입에 맞지 않았던 나는 밥에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 나를 생각해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지만 들기름 냄새 때문에 먹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었지만 20여년 동안 입에 밴 식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기 어려웠다.
“어머님, 죄송한데 고추장이 맵고 김치는 너무 시어요.”
나는 집안에 있는 각종 과자를 찾아 먹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위해 센베이라는 과자를 사다 줘 그나마 먹을거리로 삼을 수 있었다.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하는 건 남편(김장환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한국 사람인데도 지난 8년 동안 입맛이 서구식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게다가 남편은 나보다 비위가 약해 시골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어느 날 남편이 나를 방으로 불렀다.
“당신 배고프지. 과자만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것 좀 마셔봐.”
향긋한 인스턴트 커피였다. 남편의 친구가 선물해 준 것이라고 했다. 비록 미국에서 먹던 것과 비교할 순 없었지만 설탕을 타서 마시니 제법 마실 만했다. 이후 커피는 센베이 과자와 함께 내가 한국에서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됐다. 처음에는 남편과 단둘이 몰래 마셨는데 시머니에게 들킨 뒤부턴 식후에 셋이서 함께 마시게 됐다.
‘이렇게 불편한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잠자리에 누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내 마음속에 있는 성령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트루디 나는 특별한 목적을 갖고 너를 한국으로 보냈다. 네가 조금만 참고 견디면 너는 한국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야.’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난 뒤 조용히 혼자서 찬송을 불렀다. 그러면 ‘이미 선교사로 각오를 하고 왔으니 불편한 것쯤은 문제가 아니다’라는 결연한 의지가 샘솟았다.
한 번은 수원 10전투비행단의 이경철 대령이 한국 파일럿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덕분에 남편과 나는 비행단 내 미국 군인 40여명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곳에서 먹었던 프라이드 치킨 맛을 잊을 수 없다. 그 뒤로도 우리는 가끔 비행단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커피나 아이스크림을 사다가 가족들과 나눠 먹었다.
한국에 온 지 한달쯤 지나면서부터 내 입맛이 서서히 한국식으로 적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먼저 환호했던 것은 갈비탕이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고기 국물을 먹으면 속도 풀리고 힘이 났다. 주말 저녁이면 친구가 선물한 전기 프라이팬으로 과자와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시어머니는 내가 만든 과자를 무척 좋아하셨다.
“미국 사람들이 왜 부자인지 알겠다. 밀가루를 가지고 별걸 다 해먹는구나.”
한국 사람들이 수제비나 부침개, 국수를 해먹는 게 고작인 반면 미국 사람들은 과자와 빵을 만든다며 신기해하셨다. 미군 부대에서 구해온 닭고기와 버섯으로 크림, 버섯 수프를 만들어드리면 “죽을 이렇게 끊일 수 있다니 신기하다”며 매우 맛있게 드셨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3) “인부 구해주세요” 밤마다 기도… 모범수들 건축 도와
14명 대식구와 선교 공간 마련하려
최소한 비용으로 집 짓기 시작하자
남편 설교하던 근처 교도소서 지원
김장환(오른쪽) 목사가 1961년쯤 수원 인계동에 새롭게 지은 집 앞에서 첫째 아들 요셉군을 안고 지인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봄이 되면서 남편은 우리 부부가 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초가집은 14명의 대식구가 살기엔 너무 좁았고 무엇보다 선교를 하기 위해선 조금 더 넓은 집이 필요했다. 남편은 미국에서 올 때 친구들이 모아준 500달러로 땅을 보러 다녔다. 지금이야 500달러는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상당한 액수였다.
남편은 시댁에서 도보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인계동에 땅 1200평을 샀다. 현장을 둘러보니 주변에 집이 단 한 채도 없었다. 지금은 수원의 중심이 된 인계동은 당시만 해도 땅 한평 값이 30원에 불과했다. 남편은 만약 나중에 미국에서 후원금이 오지 않으면 과수 농사를 지어 선교비를 충당할 계획으로 땅을 사둔 것이라 했다.
돈을 최대한 줄여서 집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남편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했다. 설계도는 설계에 일가견이 있다는 선교사의 조언을 듣기도 했다. 나는 밤마다 방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집 짓는데 사람이 너무 부족해요. 인부를 살 돈도 없으니 주님께서 적당한 사람을 보내주세요.”
나의 이런 기도 내용을 들은 시댁 식구들은 “무슨 수로 그 많은 인부를 구할 수 있겠느냐”며 터무니없는 기도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교에 쓰일 집을 짓는 데 두 팔을 걷고 나서주셨다. 당시 남편은 시댁 옆에 있는 수원 교도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위문품을 전달하곤 했는데 우리가 집을 짓는다는 소식을 들은 교도소 소장이 모범수들에게 건축을 도울 것을 지시한 것이다. 모범수들이 마을의 모내기를 도와주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우리 부부는 모범수들의 도움을 받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 주님 감사합니다.’
모범수들이 몰려와 집 짓는 걸 도와주는 모습을 본 맏동서와 시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트루디 기도가 이뤄졌다”며 축하해 줬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지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오산의 미군 부대에 근무하는 댄 스튜어트 상사 덕분에 수세식 화장실을 마련했다. 남편의 지인인 스튜어트는 일본 출장길에 변기와 세면대, 펌프를 사와 우리에게 선물했다.
우리 집에 전기가 들어온 건 1966년이었다. 그전까지는 촛불을 켜거나 어두워지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우리가 돈을 들여 전봇대를 세우자 비로소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 일이 생기면 1시간 거리인 기독회관까지 가야 했다. 그러다 80년이 돼서야 집에 전화를 마련했다.
70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비로소 수원에도 비포장도로가 생겼다. 집이 몇 채 안 되는 우리 동네엔 10년 동안 버스도 안 다녔다. 70년에 겨우 용인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생겨 하루에 한두 번 우리 동네를 지나갔다.
남편이 가끔 출장이라도 가면 나는 혼자 남아 있어야 했다. 남편은 미국으로 출장 가면 세 달씩 체류할 때도 있었다. 외로움을 견디는 것은 내 숙제였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4) 울타리 없는 서양식 집… 부자로 착각 거지·도둑 줄이어
“가난 벗고 주님 의지하게 해 주세요”
거지 찾아오면 돈보다 쌀 주며 기도
도둑맞은 뒤에도 도둑 위해 기도해
트루디(왼쪽 첫 번째) 사모가 1961년쯤 첫째 아들 김요셉군을 안고 남편 김장환(왼쪽 두 번째) 목사, 지인들과 함께 수원 인계동의 집 문 앞에 앉아서 사진을 찍고 있다. 트루디와 빌리라고 적힌 대문 문패도 세워져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 남편은 돈을 아끼기 위해 울타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거지가 찾아올 때도 많았다. 농촌마을에 서양식 집이 떡하니 자리했으니 부잣집인 줄 알고 구걸하러 온 것이다. 어떨 때는 하루에 10명 넘게 온 적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돈보다 쌀을 주면서 손을 붙잡고 기도를 해줬다.
“하나님 귀한 형제가 가난을 벗게 해주시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세요.” 그럴 때면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고 불쾌하다며 돌아선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호적이었다.
그중에는 나병 환자들도 있었다. 딸 애설이와 단둘이 집에 있으면 가끔 거실에서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곤 했다.
“애설아 무슨 일이야. 어머.”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다급하게 뛰어나온 나는 거실 유리창을 통해 나병 환자가 얼굴을 가깝게 대고 애설이를 보고 있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코와 눈썹이 없어서 보는 어른도 놀라는데 아이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남편이 없을 때 도둑이 들어 집안 물건을 집어 간 적도 많다. 한번은 지인에게 받은 하이파이 음향기기를 잃어버려서 무척 속상했다. 또 다른 도둑은 남편의 가방을 뒤져서 선교비를 훔쳐 갔다. 외국에 나가려고 준비해둔 2000달러를 몽땅 들고 간 것이다. 그 돈은 남편이 외국에 나갈 때면 유학생들에게 100달러씩 주기 위해 선교비로 열심히 모은 돈이었다. 아침에 도둑맞은 사실을 알고 남편과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도둑과 내가 직접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는데 도둑이 시어머니 시계를 들고 황급히 달아났다. 한번은 아이들이 거실에서 자고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났다가 도둑과 마주쳤다.
“쉿 조용히 하쇼. 떠들지만 않는다면 나도 조용히 나갈 거니까. 우리 피차 엄한 꼴 안 당하도록 합시다.”
나는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 역시 겁을 먹었는지 물건만 들고 조용히 대문으로 나갔다. 도둑이 나간 뒤에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다. 이후 남편은 3년 만에 울타리를 만들어줬다.
우리 집은 자잿값만 들여 어설프게 완공한 집이라서 처음부터 말썽이 많았다. 구들장을 제대로 놓지 못해 겨울에는 가족이 연탄가스를 일곱 번이나 마셨다. 기적적인 건 남편이나 아이들 모두 단 한 번도 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차고를 개조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학생들과도 함께 지냈는데 그들 또한 연탄가스에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니 하나님이 지켜주셨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하거나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즐겁게 생활했던 기억이 난다. 시댁에 있을 때 요리를 배우지 못한 나는 여학생들에게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신 요즘 뭐가 그렇게 신나.”
남편은 음식 만드는 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묻곤 했다. 그러면 나는 혼잣말로 “시댁에서 미처 몰랐던 식도락을 여기서 알게 됐다고요”라고 말하며 웃곤 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5) 유명세 타고 언론 집중조명… 궁리 끝에 공군병원 입원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통역 맡은 후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기진맥진한 남편
“주인공은 나 아닌 빌리 목사”라며 겸손
김장환(왼쪽) 목사가 1973년 6월 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 집회에서 설교를 통역하고 있다. 이날 전도 집회에 11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남편은 언론에 나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방송사 사장이기 때문에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데 익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미국과 국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건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통역을 맡고부터였다.
그전에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설교를 하고 YFC 국제회의도 참석했지만 빌리 목사의 여의도 전도대회 광경이 미국 전역과 국내에 TV로 방영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시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많이 받았다.
“인터뷰 요청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을 지경이야.”
거절을 잘 못하는 남편은 인터뷰하느라 매일 기진맥진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남편이 내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잠깐 몸을 피해 있는 게 어떨까요.”
나와 남편은 궁리 끝에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공군 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했다. 당신 공군 병원 박경화 원장과 남편은 1962년 수원 비행장 기지 병원에서 근무할 때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입원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군 병원에 입원한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대회는 빌리 목사가 인도한 대회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내가 아닌 빌리 목사요. 유명세라는 건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허망한 건데 인기를 얻고 유지하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나는 그런데 소망을 두지 않아요.”
나는 남편이 유명세 속에서도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후 남편이 인터뷰를 피해 피신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 역시 “참 겸손한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의 요청을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편에게도 “처리할 일은 빨리 처리하고 거절할 일은 냉정하게 거절하세요”라고 조언한다. 남편이 피신해있는 동안 가족들도 편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갔다. 기자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기독회관으로 전화가 걸려와 한동안 불통이 된 적도 있다.
때론 남편이 바쁜 와중에 다른 사람의 무리한 청을 들어주는 일만 덜하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편은 대게 청이 많아지면 일단 몸을 피하고 보는데 간혹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도무지 안되는 일이라면 남편도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일부 사람들은 남편을 의지하며 집요하게 괴롭히는 일도 다반사다. 나는 요즘도 하루 종일 파김치가 되도록 일을 하고 온 남편이 옆에서 곤하게 잠든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기도하곤 한다.
“주님 분주한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을 내도록 도와주세요.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이끌어주세요.”
‘내가 한국에서 너를 들어서 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성령님의 음성은 결코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나 또한 남편과 함께 한국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6) 강의 시간을 전도 기회로 삼고 말씀 묵상 시간 가져
기독교 몰랐던 학생들 신앙 가지게 되고
성경 속 ‘백부장의 믿음’ 실천한 경호원
기도한 후 “어머니 폐렴 나았다”며 연락
트루디 사모가 1980년쯤 한 대학교의 강의실에서 대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모습.
나는 1962년 한국말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수원여자중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공부했다. 그때 내 나이는 24세였는데 나 말고도 만학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생활은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10여년 차이 나는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국어 실력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학교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 시간을 전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 50분을 전후해 말씀 묵상을 하는 것이 내 교육방식이었다.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6장…”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강의가 지루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 마태복음은 무슨 음식인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인가요.”
학생들은 내 발음 때문에 ‘마태복음’을 ‘마태볶음’으로 알아들었다. 그때만 해도 내 한글 수준은 쓰기와 발음이 각각 달라서 한참 먹고 성장할 나이의 학생들이 내 발음을 듣고 요리를 연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행이었던 건 기독교를 모르는 학생들이 거부감 없이 성경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때 예수를 처음 믿고 신앙생활을 한 아이들 중엔 지금도 연락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에 왔을때부터 강의나 강연 요청도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여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남편이 청와대 경호원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나까지 덩달아 영어를 가르치게 됐다. 경호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뒤 10분 정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도록 했다.
어느날은 한 경호원이 내게 물었다.
“사모님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백부장이라는 사람이 참 흥미롭네요.”
성경 속에서 이 백부장은 하인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고쳐줄 것을 간청한다.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면 하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경호원들에게 “여러분의 기도가 가족과 친구, 동료들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길 바란다”고 말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며칠 뒤 수업을 들었던 한 경호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벅찬 감정을 주최하지 못한 그는 “저희 어머니의 폐렴이 나으셨다”면서 내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전후 사정을 몰랐던 나는 “제가 한 일이 없는데요”라고 말했다.
“사모님께서 병든 사람을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면 낫는다고 하셨잖아요. 그 말을 생각하면서 밤마다 저희 어머니 건강을 놓고 기도했어요. 매일 병원에서 받은 약만 드시면서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안쓰러웠거든요. 그런데 기도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기침을 전혀 안 하시는 거예요. 폐렴이 깨끗하게 나으셨어요.”
나는 경호원에게 “백부장 못지않은 훌륭한 믿음을 갖고 있다”라고 칭찬해줬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성경공부를 시작했던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치유의 은사까지 받았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나는 간증할 기회가 있으면 그 경호원의 고백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눈다. 그의 간증을 통해 주님이 하시는 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묘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7) “왜 내게 돈 안 줘요” 물음에 “미국 도망갈까 봐” 농담
돈 관리 항상 남편 몫… 필요할 때 받아 써
돈 없이 살다 보니 절약하는 법 배우게 돼
긴급 상황 땐 주께서 어떻게든 채워주셔
트루디(아랫줄 왼쪽 첫 번째) 사모가 교회 성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선교 초기에 남편의 수입은 미국 기독봉사회에서 보내주는 선교비에서 약간의 급여를 떼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외국에서 오는 선교비가 점차 줄어들었다. 외국에서 오는 선교비 총액은 줄지 않았지만 한국 화폐 가치가 높아져 원화로 환산할 때 금액이 줄어든 것이다.
남편은 1966년에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했지만 사례비는 80년대부터 받기 시작했다. 극동방송 사장으로도 일하고 있지만 남편은 월급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여보 나 생활비 좀 줘요.”
나는 돈이 필요할 때면 남편에게 조금씩 받아서 썼다. 신혼 초에는 시장에 갈 때마다 500원,1000원씩 받았고, 서울 갈 때는 그보다 조금 많게 받았다. 우리 부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남편이 돈 관리를 해왔다.
“왜 돈을 나에게 주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물으면, 남편은 “당신이 미국으로 도망갈까 봐”하고 우스갯소리로 답하곤 한다. 하지만 워낙 준비성이 철저한 데다 내가 한국 물정을 잘 모르니 자신이 관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게 남편의 속내일 것이다.
하지만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얻어 쓰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편이 해외에 나가면 돈이 없어서 시장에 못 갈 때도 있었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돈을 필요할 때 조금씩 타서 쓰는 아내는 대한민국에 나뿐일 거예요. 한 번에 좀 많이 줘 봐요. 그래야 다급할 때 쓸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항의를 하면 남편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교회에 통장을 맡겨놨으니 꼭 필요하면 얼마씩 찾아 쓰도록 해요.”
그 말을 들은 즉시 부리나케 교회 사무실로 찾아가 돈을 달라고 했다. 직원은 내게 3만원을 건넸다. 평생 복권을 사 본 적 없지만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기분이 아마 이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이야 3만원은 애들 용돈 수준이지만, 나에겐 그야말로 일확천금에 버금가는 돈이었다.
한 번은 미국에서 어머니가 오셔서 직원에게 돈을 좀 더 찾아 달라고 했다.
“사모님 죄송한데 이달엔 3번 다 찾아가셨기 때문에 더 드릴 수가 없어요.”
알고 보니 남편은 그 직원에게 “한 달에 3번 이상은 주지 말라”고 당부해뒀다. 남편은 매달 10만원씩만 맡겨뒀는데 나는 2만원씩 3번, 즉 6만원만 찾아 쓴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매달 10만원을 다 찾아서 썼다. 조금씩 인상을 요구해 요즘은 10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받고 있다. 실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교인들이 이것저것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돈 없이 살다 보니 알뜰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한 달에 내가 쓰는 돈은 교통비, 미용실 비용, 교회 헌금이 전부다.
요즘은 물질에 메인 사람들이 많아서 사모들조차 돈에 예민하게 반응할 때가 있다. 살림을 이끄는 아내로서 목사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조력자로서 물질적인 어려움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돈이 많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주님이 채워주신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8) 혼혈아에 대한 편견에… 열 살 아들 “사는 게 힘들다”
“목회자 자녀가 특권 누려선 안된다”
남편, 외국인학교 대신 공립학교 고집
아이들 학교서 친구들에게 놀림 받아
트루디 사모의 첫째 아들 김요셉(왼쪽), 막내 요한 군과 둘째 딸 애설 양이 어린 시절 소파에 앉아 기도 손을 하고 사진을 찍고 있다.
요즘은 외국인을 차별하는 일이 덜하지만, 예전에는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무척 심했다. 2남 1녀 세 명의 자녀들을 키우면서 다른 한국 아이들처럼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쳤지만 아이들 나름대로는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비교적 잘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선 결코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첫째 요셉은 늘 외국인 엄마에 대해 이중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는 다정한 어머니로 믿고 따랐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인과 한국인의 외모를 조금씩 닮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지만 내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사람들이 쳐다보면 손을 놓고 싶은 적도 있었고, 학교에 데려다준다고 하면 차마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 엄마와 함께 갔었다는 말도 했다. 또 한 번은 어릴 때 뾰족한 코가 싫어서 납작하게 만들려고 방바닥에 코를 대고 잔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으니 난 꽤 무심한 엄마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요셉은 집에 오면 늘 명랑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였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요셉은 서울 외국인 학교에 다니길 원했다. 하지만 남편은 목사 자녀이기 때문에 교인들의 자녀가 다니는 공립학교에 함께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목회자 자녀가 비싼 돈을 들여 외국인 학교에 다니며 특권을 누린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루는 요셉이 학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 뒤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남편에게 “학교에서 아이들 놀림이 심한가 봐요” 하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요셉은 엄연한 한국인이요. 그러니 공립학교에서 교육받는 게 당연해요.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나는 요셉이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의 확고한 뜻을 확인한 뒤 요셉에게 잘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너는 한국 사람이야. 그러니 한국 학교에 다녀야 해.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놀림을 많이 받았단다. 그리고 엄마도 한국에 와서 놀림당했어. 하지만 네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분명 친구들의 마음을 되돌려 주실 거야.”
며칠 뒤 요셉은 현관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 이유를 몰랐지만 아침에 챙겨둔 도시락이 그대로 남은 걸 보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요셉에게 도시락 메뉴로 샌드위치를 싸준 것이 발단이었다. 처음 보는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진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셉은 혼혈아니까 그렇다’고 받아들이고는 점심까지 굶었다고 했다.
요셉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사는 게 참 힘들어요. 난 도대체 한국 사람이에요. 미국 사람이에요”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아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내 가슴은 얼마나 아팠겠는가. 요셉은 다음 날부터 등교 전에 미리 도시락을 확인하고는 햄이 한쪽이라도 들어 있으면 들고 가지 않았다.
한국 반찬 만들기에 소질이 없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 요리책을 보고 한국 음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19) 혼혈아 아픔 극복한 요셉 ‘축복의 도구’로 쓰임 받다
아버지 따라 큰 집회 다니며 자신감 업
미국의 도시 돌며 한인 청소년들에게
“국제적 인물로 성장하라” 용기 심어줘
트루디 사모의 첫째 아들 김요셉 목사가 1997년 6월 15일 미국 시카고 지역 한인교회협의회에서 주최한 전도대회에서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남편은 요셉을 엄하게 다루면서도 큰 집회에는 꼭 데리고 다녔다. 혼혈아인 아들에게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남편은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마지막 날에도 요셉을 서울 여의도광장에 데리고 갔다. 요셉은 아버지가 수많은 군중 앞에서 통역하는 모습을 보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정부에서 보내준 리무진을 타고 아버지와 고급 호텔로 가면서 몹시 즐거워했다. 아버지가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고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다.
성인이 된 요셉은 아버지와 함께 해외 집회를 다니면서 한국인 교포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이 혼혈아로 겪은 아픔을 미국에서 방황하는 교포들에게 똑같이 느낀 것이다. 한 번은 요셉이 미국에서 한국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집회를 한 적 있었다. 연일 2000~3000명이나 되는 청소년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청소년 교포들은 미국인의 용모를 한 한국인 설교자의 말에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요셉이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일을 꺼내자 강당은 울음바다가 됐다. 요셉은 교포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지만 뿌리는 한국인입니다. 제일 중요한 건 천국 시민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들은 어디서든지 강한 민족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민족을 섬길 수 있는 국제적인 인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의 도구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요셉은 그 집회를 통해 일약 스타가 됐다. 유명 강사의 반열에 올라 24세의 나이에 미국 각 도시를 다니며 한인 청소년 연합 집회를 인도했다. 1990년까지 요셉은 청소년 수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갱단에 들어갔던 청소년들이 울면서 회개했고 그중에는 목사가 된 이들도 있었다. 그때 요셉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는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고 제가 혼혈아로 태어난 게 원망스러웠는데 오늘날 제가 이렇게 다시 쓰임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나님이 어머니를 한국에 보내시고 제가 다시 미국에 와서 한국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건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예요. 제가 쓰임 받는 것에 감사해요. 어머니 고마워요.”
그때 나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들은 LA 집회 때 만난 주일학교 교사와 결혼까지 했다. 집회가 끝나면 요셉은 여러 학생과 함께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곤 했는데 그 청년 학생 중 한 사람이 며느리가 됐다.
현재 수원 원천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요셉은 자신이 행동과 습관은 아버지에게, 철학과 교육 가치, 섬김의 정신은 어머니에게 배웠다고 말한다. 요셉이 강사로 초빙된 자리에서 내가 좋아하는 격언인 ‘Bloom where you planted(심어진 곳에서 꽃을 피워라)’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할 때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20) 딸 걱정에 늘 염려하시던 어머니 “사위 덕분에 호강”
결혼 전부터 혼혈아로 태어날 손주와
타국에 시집가서 고생할 딸 걱정하다
열심히 잘사는 모습 직접 보시고 안심
트루디(중앙) 사모가 20대 시절 미국 미시간주의 자택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어머님이 많이 위독하세요. 아무래도 미국으로 오셔야 할 것 같아요.”
1983년 2월,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미국으로 갔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82세였다. 당뇨를 앓고 계신 터라 곧 천국에 가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축복해드렸다.
‘엄마, 제가 한국에서 사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늘 함께 있었다는 걸 아실 거라 믿어요. 자식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우셨으니 천국에 가시면 주님이 면류관을 주실 거예요.’
어머니는 내 예상대로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에는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선교사로 활동 중인 첫째 롤런드 오빠가 참석한다고 했다. 나는 굳이 가보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의 영혼은 천국에 가 있을 텐데 장례식이 어머니에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로부터 15년 뒤 비로소 아들 부부와 함께 어머니 묘를 찾았다. 생전에 어머니는 늘 둘째인 페기 언니가 모셨었다. 미국에서는 딸들이 부모를 모시는 전통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생전에 한국을 두 번 다녀가셨다. 한 번은 빌리의 후견인이었던 칼 파워스와 함께, 그리고 또 한 번은 페기 언니의 딸인 돈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었다. 어머니가 한국에 왔을 때 교회의 많은 성도가 어머니에게 선물을 해줬다. 어떤 교인은 옷을 여러 벌 만들어 선물했는데 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남편은 어머니가 오셨을 때 용돈도 드리고 한국 이곳저곳을 관광시켜드렸다. 미국 사위들은 보통 장모에게 용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사위가 주는 용돈을 받고 무척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 정계의 높은 분들에게 초청을 받아 식사를 대접받은 적도 있다. “한국 사위 덕분에 호강한다”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어머니에게 잘해주는 남편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페기 언니는 어머니 생전에 최선을 다해 모셨다. 만약 내가 미국에 살았더라면 어머니를 직접 모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한국에서 시집가서 잘살고 있는지 언제나 걱정하셨다.
한 번씩 전화하면 “남편이랑 아이들을 잘 챙겨줘라” 하시면서 선교사로서의 사명도 강조하셨다. 어머니는 남편이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통역을 맡은 뒤 미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졌을 때 무척 좋아하셨다. 사위가 유명해져서라기보다 우리 부부가 한국에서 선교를 잘하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혼혈아로 태어날 손주들 걱정과 아이들이 한국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늘 염려하셨다. 하지만 요셉과 요한, 애설이 성장하는 걸 보면서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혼자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21) 세계 침례교 총회장 된 남편 “어려운 일에 쓰임 받고 싶다”
평소 높은 자리에서 추앙받길 싫어해
세계적 유명 목회자 되고도 초심 지켜
내게도 “덕 볼 생각 말라”며 주의 줘
트루디(왼쪽) 사모가 2000년 1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제18차 세계침례교연맹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된 남편 김장환 목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2000년 1월 호주 멜버른에서 전 세계 침례교 대표 1만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8차 세계침례교연맹 총회가 열렸다. 이날 남편은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침례교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렸다. 1억 5000명이 넘는 세계 침례교인을 대표하는 한국인 목사라니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나 또한 가족들과 함께 남편의 취임을 보기 위해 동행했다. 남편은 높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걸 꺼려 하는 사람인데 이날만큼은 침례교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총회장으로 선출될지 모르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지금껏 남편이 하는 모든 일에 동행해 주셨으니 이번 일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주세요. 설령 총회장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주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남편은 “총회장이 되면 하나님께서 유용하게 쓰시도록 어려운 일에 순종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치곤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남편이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때 열성적으로 통역을 맡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많은 이들이 복음을 알게 됐고 목사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나는 남편이 총회장 선출로 그런 일이 다시 한번 재연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됐다.
한국에 돌아온 뒤 주변에 지인이 세계침례교총회장에 당선된 걸 축하한다면서 고급 승용차를 선물했다. 남편은 평소에 작은 경차를 타고 다녀서 청와대나 정부기관에 들어갈 때면 번번이 입구에서 막힐 때가 있었기 때문에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거절하겠다는 뜻으로 “기름값을 대주면 타겠다”고 말했는데 그분이 한 달에 기름값 명목으로 50만원씩 통장에 부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남편은 외국에서 손님이 올 때나 청와대에 갈 일이 생기면 그 차를 이용했다.
“유명해지니까 좋은 점도 많네요. 이런 고급 승용차를 또 언제 타보겠어요.”
나는 남편이 총회장 당선 이후 우쭐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오히려 나에게 옆눈으로 보더니 “혹시 총회장 부인이라고 누구에게 덕 볼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라며 주의를 줬다.
남편 역시 혹시 내가 우쭐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남편이 총회장이 됐으니 행동이 더 제한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목사 남편과 살면 우쭐해질 일이 애당초 없다.
사람들은 “목사님이 그렇게 유명해지니 사모님은 얼마나 좋느냐”라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사람이 유명해지는 게 그 사람의 영혼에 유익한 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총회장에 당선된 것이 내게는 외국에 나갈 일이 더 많고 지금보다 더 바빠진다는 것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었다.
예상대로 총회에서 돌아오자 남편은 여기저기 인터뷰 요청이며 집회 초청에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남편이 총회장이란 지위를 내세워 누군가에게 대접받는 걸 본 적이 없다. 남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회자가 된 이후에도 신앙의 초심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늘 주님께 감사하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22) “사모님, 100만원만”… 돈 빌려 간 뒤 만나면 피하기만
청소 일하며 어렵게 사는 한 자매 찾아와
딸이 섬으로 팔려가게 생겼다며 하소연
10년 마음고생 하다 퇴직금 받고서 갚아
1998년 트루디 사모가 50번째 생일을 맞아 수원중앙침례교회 성도들이 마련한 축하 파티에서 남편 김장환 목사와 함께 케이크 촛불을 끄고 있다.
남편이 세계침례교연맹 총회장에 당선된 뒤 유명해지자 주변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도 남편과 나의 숙제였다.
사모인 나는 그런 부탁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번은 병원 청소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사는 분이 나를 찾아와 “돈을 갚지 못해 딸이 섬으로 팔려 가게 생겼다”며 하소연했다.
“사모님, 딱 100만원만 있으면 제 딸을 살릴 수 있어요. 무턱대고 애를 데려가서는 ‘돈을 갚지 않으면 인신매매로 넘겨버리겠다’고 하는데 제가 가진 돈이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저에게 돈을 빌려주시면 꼭 갚겠습니다.”
지금도 100만원은 큰돈이지만 당시에도 웬만한 월급쟁이 한 달 봉급이었다.
‘주님, 이 자매님의 사정을 도울 수 있는 물질을 저에게 허락해 주세요.’
나는 자매를 위로한 뒤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딱히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럽게 우는 자매를 보니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마음이 아파서 도와주고 싶었다.
새벽마다 그 자매를 생각하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며칠 뒤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이 내게 “생일을 축하한다”며 100만원을 주시는 게 아닌가. 정말 주님은 완벽한 분이라며 혼자 감탄했다.
이튿날 나는 그 자매를 만나 돈을 건넸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더니 “사모님이 우리 딸을 살렸다”면서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데 내게 돈을 받아간 뒤부터 자매는 나를 피해 다녔다. 돈을 갚으라고 독촉한 것도 아니고 그저 딸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 말이라도 붙이려고 하면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피했다. 나는 ‘혹시 거짓말을 한 것일까’하고 생각했지만, 기도로 받은 돈이기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10여년이 지난 어느 가을 저녁, 집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교회 직원이 “어떤 분이 사모님을 찾아왔다”고 알려왔다. 사무실에 갔더니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달려와 나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10년이 넘었지만 나는 그 아주머니가 내게 100만원을 빌려 간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모님, 제가 그때 100만원을 빌려 갔는데 형편이 안 돼 못 갚았어요. 그때 빌려주신 돈 덕분에 딸을 찾아올 수 있었어요. 딸은 지금 결혼해서 잘살고 있지만, 저는 사모님께 빌린 돈이 늘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이번에 퇴직금을 받아서 그 돈을 갚으려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10년도 지난 일인데 그동안 빌린 돈 때문에 마음고생 했을 아주머니가 안쓰러웠다. 늦게라도 돈을 들고 찾아온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나는 아주머니와 손을 맞잡고 오랫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눴다. 한 시간이 넘게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모님이 저를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맞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신다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이제부터 교회에 나갈 거예요.”
***[역경의 열매] 트루디 (23) 교회 미화원으로 오해 “어디서 구했어, 일 잘하네”
청소 습관 몸에 배어 교회 건물 직접 청소
식당 하수구 막혀 맨손으로 긁어내기도
청소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 행복
트루디 사모가 2000년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왼손에 청소 바구니를 들고 청소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아니 사모님, 세계적인 목사님 사모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세요. 저는 높은 사모님이 이런 일 하시는 거 처음 봤어요. 어머나 세상에.”
교회 건물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내 모습을 본 성도들의 반응이다. 어릴 때부터 집 안 청소하는 습관 때문에 딱히 의식하진 못했지만, 성도들 눈에는 특별하게 보인 모양이다. 칭찬을 듣자고 하는 일이 아닌데도 성도들이 내 앞에서 감탄하면 도리어 민망해질 때가 많다.
한번은 교회에서 한 자매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그 자매는 자신이 수원JC클럽(사단법인 한국청년회의소) 회원의 아내라고 했다. 그는 “10여년 전 JC클럽에서 우리 교회를 빌려 노인들을 대접할 때 일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교회 식당에서 JC클럽 부인들이 음식 준비를 하는데 사모님도 함께 계셨어요. 그때 음식 찌꺼기 때문에 하수구가 막혀 물이 내려가지 않자 몇 사람이 젓가락을 들고 낑낑댔었죠. 그런데 사모님이 맨손으로 혼자서 음식물 찌꺼기를 전부 긁어내셨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런 분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제가 가족과 친척들을 전도해서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됐어요.”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그때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워낙 그렇게 청소하는 게 몸에 배어서 이날도 딱히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사소한 행동을 통해 그 자매와 가족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는 말에 마음에 기쁨이 샘솟았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처럼 부족한 나를 통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만 같아 삶의 보람과 기쁨이 넘쳤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끔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교회 미화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큰아들 김요셉 목사가 세운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가 개교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큰 며느리와 둘이서 학교 내 수영장 청소를 하고 있었다. 수영장 바닥을 닦고 화분을 옮기는데 어떤 자매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 저 외국인 청소부 어디서 구했어요. 굉장히 열심히 일하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웃으면서 “저분은 제 시어머니세요”라고 대답했다. 그 자매는 민망한 얼굴로 내게 “몰라 봬서 죄송하다”며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학교에 외국인 선생이 많았는데 청소부도 외국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학교와 원천침례교회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틈만 나면 청소를 한다. 청소하는데 누구나 적극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의무이기도 하지만, 작은 일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24) 기독교 교육 반발한 학부모들 “기도만 하면 수업은?”
영어·성경 교육 필요 깨닫고 유치원 설립
학교 원칙 따라 기도와 큐티로 가르치다
수업방식·숙제 문제로 학부모들과 충돌
트루디 사모가 1995년 경기도 수원 원청동 중앙기독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수원 인계동에 살 당시 다른 교회에서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교인들이 “우리 교회에도 유치원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나 역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영어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유치원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뜻있는 교인들이 헌금을 모으고 1년 남짓 건물을 지어 마침내 1978년 중앙기독유치원을 개원했다. 교사를 뽑을 때 정한 원칙은 하나였다. ‘하나님께 교사 소명을 받은 사람인가.’
우리는 가급적 한국대학생선교회(CCC)나 한국기독학생회(IVF) 등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을 우선 선발했다. 면접을 볼 때는 주로 신앙을 봤다. 경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경력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유치원 운영이 성공을 거두면서 부지를 구입해 규모를 넓혔다. 첫째인 요셉 목사가 설립 준비 중인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와 같이 건물을 사용하게 됐다. 유·초등부 아이들에게 ‘기독교 학교라는 걸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붙들고 오랫동안 하나님께 기도했다.
요셉과 내가 세운 원칙은 다음과 같다. 수업의 시작과 끝은 반드시 기도할 것. 날마다 큐티로 하루를 시작할 것. 아이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것.
‘기도로 출발한 교육기관’을 세우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고급 사립 초등학교로 알고 등록한 학부모들은 기독교 교육에 강하게 반발했다. “아니, 학교에서 어떻게 단군신화가 거짓말이라고 가르칠 수 있는 겁니까. 예수 믿는 아이들은 기초 상식이 없어도 괜찮다는 이야기인가요.” “저도 교회를 다니지만 창조 순서를 외우는 걸 숙제로 내주는 학교를 이해할 수 없네요. 맨날 기도만 하면 수업은 대체 언제 하실 생각이시죠.”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어떤 반은 온종일 찬양만 했고 또 다른 반은 기도만 했다. 한번은 교사가 아이들을 교실에 내버려 둔 채 학교 기도실에서 1시간 30분 동안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요셉은 이 일로 단단히 화가 났다. 아무리 선교단체에서 신앙 훈련을 받았다지만, 수업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건 교사 자격 요건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나는 그 일로 ‘현재 사용하는 교재로 기독교 교육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해낼 것인가’ 하는 고민에 맞닥뜨렸다. 교재에 억지로 말씀을 끼워 넣는 건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효과적이지도 않았다. 나는 요셉에게 제안했다.
“차라리 교재를 만들지 말자. 교재가 좋다고 해서 기독교 교육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가 이제 와서 수많은 돈을 들여 기독교 교재를 만드는 건 바람직하지 못해. 기독교 과학을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교사의 마음을 통해 아이들이 참된 교육을 받는 일이야.” “어머니,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요셉과 나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교사들과 수차례 세미나를 열었다. 거듭된 고민을 거쳐 우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체험을 중시하는 커리큘럼을 구성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25) 비장애·장애 아이들, 한데 어울려 더불어 사는 법 배워
장애아 교육 혜택서 소외당함 깨닫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생명 모두 품기로
“약한 사람부터 먼저…” 희생정신 가르쳐
트루디 사모가 1995년 수원 중앙기독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고깔모자를 쓰고 생일파티를 하고 있다.
수원 중앙기독유치원과 초등학교는 장애·비장애 학생들을 통합 교육한다. 기독교 교육은 모든 아이에게 공평한 교육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유치원을 개원한 지 12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한 초등학교 국어 교사가 나를 찾아왔다.
“중앙기독유치원이 지역 학부모들에게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꽤 났더군요. 하지만 제가 가르치는 장애 아이들은 특별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장님이라면 장애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해주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교사를 통해 뒤늦게 깨달음을 얻게 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유치원이 지역에서 좋은 소문은 났지만, 정작 소외된 학생들을 품고자 하는 일에 소홀했던 건 아닌지 돌아봤다.
이듬해 특수 교사를 채용하고 장애 학생 9명이 입학했다. 처음엔 비장애 학생들과 따로 반을 구성했지만, 비장애·장애 아이들이 한데 어울리면 서로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았다. 각 반에 장애 아이를 한 명씩 배치했다.
아이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에게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장애가 없는 아이는 몸이 불편한 아이를 돕고, 장애가 있는 아이는 옆 사람과 더불어 생활하는 법을 배우며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했다.
비장애 학생 학부모 중에도 이를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에선 “비장애 학생 학부모들의 반대가 심하지 않으냐”고 묻곤 했지만, 유치원을 옮기기는커녕 항의 한 번 하는 학부모도 없었다.
물론 장애·비장애 학생을 통합 교육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설 면에서도 그렇고 인력 활용 면에서도 비용과 노력이 두 배로 든다. 하지만 나와 요셉 목사는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라는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생명을 모두 돌보겠다고 결심했다.
입학 후 첫 통합 수업을 할 때면 교사들은 반 아이들과 난파선 놀이를 한다. 배가 가라앉는다는 설정 아래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지 여럿이 함께 참여하는 놀이다. 각 팀에는 시각 장애인과 신체장애인이 한 명씩 있다고 가정한다. 배의 안과 밖을 구분하기 위해 고무줄을 손으로 높이 든다. 배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이 고무줄을 건드려선 안 된다.
“일단 몸이 불편한 애부터 내보내야지.” “아니야. 눈이 안 보이는 애가 혼자 남으면 안 되잖아.”
놀이를 시작하면 마치 정말로 난파선에 갇힌 아이들처럼 누구를 먼저 구하고 어떻게 해야 많은 생명을 구할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게임의 정답이 궁금했다. 제일 먼저 건장한 아이가 혼자 힘으로 배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배 안에 있던 아이들이 힘을 합해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인을 구출해낸다. 대개는 한두명이 구출되는 과정에서 시간이 종료된다. 이를 지켜보는 교사들은 숨을 죽이고 아이들의 구출 작전을 마음으로 응원한다.
어른인 교사들의 도움 없이도 아이들은 제일 먼저 누구를 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건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약한 사람을 먼저 도와야 한다”는 희생정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26) 반 친구와 펼친 투명인간 작전… “나 화장실” 기적 일어나
주변 관심에 이상행동 보이는 준원 위해
어떤 행동 하든 절대 모른 척하기로 약속
이후 실수 횟수 줄고 아이들도 성숙해져
트루디 사모가 1995년 경기도 수원 원천동에 위치한 중앙기독유치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에 다니던 장애 아동 중에 특별히 잊을 수 없는 아이가 있다. 바로 준원이다.
학부모가 아이의 수업을 참관하는 날, 아이들은 저마다 엄마에게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하지만 준원이는 어쩐 일인지 엄마를 보고도 담임선생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자폐아 중에는 간혹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긴 하지만, 준원이는 그런 아이는 아니었다. 준원이 어머니는 “약을 먹어서 그럴 것”이라며 울먹였다.
“준원이는 조울증이 있어요. 하지만 학교에 가려면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잖아요. 그 덕분에 집안도 조용해지고 다행이다 싶었는데 저런 모습일 줄은….”
며칠 뒤 어머니는 준원이가 약을 끊을 것이라고 전해왔다. 그러면서 “준원이가 약물이 아닌 하나님의 치유 손길로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게 해달라”며 기도를 부탁했다. 준원이가 학교생활에 적응하는데 모든 교사가 힘을 보태기로 했다.
약을 끊은 준원이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수업 시간에 책상을 두드리거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준원의 행동에 다른 학생들도 수업 진행이 어려웠다. 그런 모습을 누가 나무라기라도 하면 준원이는 바지에 오줌을 쌌다.
나는 요셉 목사와 주변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반 친구들에게도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다. “너희도 주사 맞으면 아파서 소리 지르고 울지. 준원이도 지금 하나님께 치료받고 있는 중이야. 아파서 그런 거니까 너희가 이해해 주렴. 하나님은 너희를 통해 준원이를 변화시켜 주실 거야.”
나와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은 힘을 합쳐 공동작전을 세웠다. 준원이가 선생님 말을 듣지 않으면 친구들이 함께 말해줬다. “준원아 자리에 앉아. 그러면 안 돼.”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나무라는 것이 아닌, 마치 합창단의 화음처럼 아이들의 목소리는 맑고 고왔다. 나는 한동안 준원이를 지켜보면서 행동에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준원이가 무엇인가를 집어던지면 꼭 주위를 둘러봤는데 주변의 관심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교사들과 전략을 수정했다.
“얘들아, 앞으로는 준원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절대로 관심을 보여선 안 돼. 투명인간, 알지?” 이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준원이는 교실에서 오줌 싸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준원이가 수업 중 벌떡 일어나 어눌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 화장실.”
선생님과 친구들은 준원이의 말을 듣고 너무 좋아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제멋대로 오줌을 싸던 준원이가 처음으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하루에 열두 번 화장실을 갈지언정 그날 이후 교실에서 실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준원이 어머니는 “너무 고맙다”며 반 아이들에게 떡 잔치를 베풀었다.
준원이로 인해 부쩍 성숙해진 아이들이 무척이나 대견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준원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면서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아이들이 앞으로 성장할 때 세상의 편견과 부당함을 이기고 사랑스러운 자녀로 성장하도록 지켜주세요.”
***[역경의 열매] 트루디 (27) 학부모와 성도들 사이 고민 해결 사랑방 된 ‘파이숍’
교인들 쉼터 겸 장애아이 돕기 위해 시작
제빵 배워 샌드위치 와플 등 직접 만들어
수익금으론 장애학생 위한 특수교사 채용
트루디 사모가 2013년 경기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 1층에 있는 ‘블루밍 파이숍’에서 교사 및 장애학생들과 함께 파이를 만들고 있다.
유치원, 학교와 함께 내가 돌보는 곳이 또 한 군데 있다. 바로 아이들에게 빵과 쿠키를 제공하는 ‘파이숍’이다.
“교인들을 위한 쉼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파이숍을 열었으면 좋겠는데….”
남편에게 말했더니 옆 눈으로 나를 봤다.
“갑자기 무슨 파이숍? 당신 빵 만들 줄 알아?” “아뇨. 직접 만들어야죠. 배워서.”
남편은 의아하다는 듯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행히 틈틈이 제빵 기술을 익혀 놓은 터라 ‘왕초보’는 아니었다. 부족한 부분은 책을 보며 혼자 습득했다. 아들 요셉 목사와 입맛 까다로운 큰며느리에게 시식을 부탁했다. 샌드위치며 와플이 “빵집에서 파는 것 못지않게 맛있다”며 칭찬했다. 남편은 힐끗 보더니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교회 건물 한쪽의 작은 공간에 문을 연 파이 가게는 교인들에게 반응이 좋았다. 파이숍은 학부모와 성도들의 상담 장소가 됐다. 다소 근심 어린 표정으로 가게를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오늘 무슨 일이 있구나’ 생각했고, 미소를 머금고 들어오는 사람을 볼 때면 ‘무슨 희소식이라도 전해줄 것 같다’는 직감이 왔다.
파이숍을 운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장애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판매 수익금을 통해 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교사를 채용한다. 더불어 사람들의 말을 더 잘 듣기 위해서였다. ‘듣는다’는 것은 눈과 귀와 마음을 하나로 기울여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나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열 마디 말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한번은 유치원 학부모가 파이숍에 와서 이런 고민을 털어놨다. “저는 남편과 대화도 하지 않고 괜히 아이에게도 짜증을 내곤 해요. 사람 관계도 서툴고 말도 잘하지 못해 다른 엄마들도 저와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꼭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아요.”
문제는 어머니의 예민한 성격이었다. “어머님이 누군가를 먼저 판단하거나 판단 받기 전에 먼저 최선을 다해 기뻐하면서 작은 일에도 감사해 보세요. 그러면 타인을 향한 마음도 자연스럽게 열릴 거예요.”
어머니는 그날 이후 파이숍에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 말씀에 순종하니까 편견과 오해가 단번에 풀렸다고 했다. 확연히 달라진 그의 모습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파이숍을 통해 연약한 심령을 가진 이들과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태도와 그 이야기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제 안에 넘치도록 도와주세요.”
얼마 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남편으로부터 손편지를 받았다.
“당신이 카페를 연다고 했을 때 ‘다른 일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소. 그런데 파이숍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대화의 장이 되고 단순히 카페 이상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때나마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을 반성했소. 지금은 당신이 자랑스러워.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삶 속에서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한없이 감사해.”
***[역경의 열매] 트루디 (28) “거칠고 성한 데 없는 ‘아름다운 원장님 손’ 닮고 싶어요”
매일 유치원과 파이숍 직접 쓸고 닦고
호미로 학교 화단 가꾸며 생긴 상처들
“원장님 손 통해 노동의 가치 배워요”
트루디 사모가 2014년 경기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 1층에 있는 ‘블루밍 파이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파이숍은 늘 분주하고 손님들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하다. 커피와 쿠키를 주문하는 소리, 친구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소리 등, 방학을 제외하고 늘 열려 있는 이곳은 교인과 학생, 학부모들의 공동 쉼터이다.
하루는 어떤 분이 가게를 찾아와 내 손을 잡고서는 “사모님에게 교훈 한 가지를 배워 간다”고 말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달걀 껍질에 남아 있는 흰자를 손가락으로 긁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그릇에 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저는 빵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사모님이 파이숍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나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가까이서 일하는 모습을 보니 파이를 정성 들여 만들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재료를 낭비하는 저와는 달리 사모님의 절약하는 모습은 큰 교훈이 됐습니다.”
나의 근검절약 정신은 시어머니에게서 배웠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처럼 작은 것부터 절약하는 습관은 나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든 직원이 공유하고 있다.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교훈 삼는 분이 있다니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은 손으로 일한 것에서부터 정직한 가르침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손이 예뻐야 한다고들 하지만 내 손은 매우 거칠고 성한 데가 없다. 매일 유치원과 파이 가게를 직접 청소하고 쓸고 닦는 일을 반복하면서 생겨난 영광의 상처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나를 보면서 ‘손이 아름다운 여인’이라 말한다. 고생한 티가 역력한 내 손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알게 된다고 했다.
물론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몸빼바지에 호미를 들고 학교 화단에서 일한다. 파이숍의 주방에서 막힌 배수구를 뚫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꿈에서 주님이 ‘너는 파이숍을 운영한다면서 손이 왜 그렇게 말끔한 거냐’ 라고 물을까 봐 늘 노심초사한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목수로 일하셨고, 사도바울도 전도하면서 텐트 만드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방편에 그치지 않고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오랜 기간 함께 일한 교사 중 한 사람은 내 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원장님 손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노동하는 손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그런 손을 보면 ‘고생 많이 한 손, 불쌍한 손’이란 생각에 안쓰럽고 애처롭게 보곤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원장님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사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원장님 나이가 됐을 때 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도 노동의 미학이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나는 지금도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는 줍지 않고는 못 견딘다. 길을 걷다가도 모퉁이에 잡초가 보이면 그 풀을 당장 뽑아내야 마음이 편하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설령 뛰는 한이 있어도 꼭 해야 하는 일들이다. 나는 그 거친 손으로 기도하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바쁜 내 손이 너무나 고맙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29) 갑자기 심해진 허리 통증에 입원 “암이 많이 진전…”
다발성 골수종 3기로 항암 방사선 치료
척추 절단 수술로 걸음마부터 다시 배워
고통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 하게 돼
트루디(오른쪽) 사모가 2010년 미국 LA에서 딸 김애설(가운데) 교수, 아들 김요한 목사와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2006년 가을, 한 강연회에 초청돼 미국을 방문했다. 강연 준비로 긴장한 상태라 몸의 상태를 잘 몰랐다. 어느 날 미세한 허리 통증이 느껴졌다. 허리 통증은 한국에서도 종종 있었던 일이라 병원에 가지 않고 참았다.
그런데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돼 병원에 입원했다. LA에 사는 딸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다.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암이 많이 진전된 상태입니다. 다발성 골수종 3기입니다.”
나보다 더 놀란 건 딸 애설이었다. 의사는 나보고 “왜 그렇게 미련하게 혼자 참았느냐”고 말했다. 아플 때 병원에 가지 않았으니 병이 깊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나이가 많은데 수술할 수 있을까요.” “최선을 다해봐야죠. 마음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다행히 의사 표정을 보니 곧 죽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주님께서 의사를 통해 암을 알려주실 정도라면, 내가 당장은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감사와 함께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수술하고 치료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아이들과 남편도 나 못지않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시시때때로 고통을 참으면서도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기도했다.
“주님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자녀들과 제 남편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시오.”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한동안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척추 일부를 절단해 제대로 걷지 못했다. 애설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쳤을 때처럼 이번엔 내가 애설이에게 걸음을 배워야 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법, 자동차에 타는 법 등 하나하나 배우면서 나는 또 한 번 주님께 감사했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동작들을 다시 알게 해주시고 제 마음을 낮춰주시니 감사합니다.”
애설과 사위는 1년이 넘는 치료 기간 나를 성심성의껏 돌봐줬다. 미국에 사는 딸에게 잘해주지도 못했는데 병간호까지 받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컸다. 애설은 매일 저녁 내 손을 잡고 병이 완쾌될 수 있도록 기도했다. 딸의 눈물 어린 기도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내가 빨리 회복될 수 있었던 것도 주님께서 가족들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이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난 뒤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조용한 아침 시간에 여유를 갖고 걸으면서 기도를 하니, 하나님과 또 다른 깊이로 교제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내 안의 성령께서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다.
‘네게 이런 고통이 없었다면 나와 이렇게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었겠니. 이렇게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지금보다 온유해질 수 있었겠느냐.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시련을 주었다. 네가 아파할 때 나 역시 십자가를 지며 걸었고 네가 고통 속에서 울 때 나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나는 수술 뒤 회복 과정에서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됐다. 내가 천국 보좌에 한 걸음씩 다가설수록 나를 조금 더 내려놓고 주님을 더 의지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양하길 원한다.
***[역경의 열매] 트루디 (30·끝) 일상에서 주님의 삶 실천하고 동행하는 삶 살자
난 예수님 십자가 사랑에 많은 빚 진사람
모든 일 계획하고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
주의 뜻 헤아리고 행할 때 뜻대로 이뤄져
트루디 사모와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2008년 국내의 한 공원에서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들과 함께 가족 사진을 촬영했다.
누구나 평생 마음속에 담고 있는 한 마디 말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래 가사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돌아가신 부모의 유언일 수도 있다.
신앙인에게는 자신이 평소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나 신앙고백이 있다. 내 인생을 한 구절로 요약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꼽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자 평생을 함께해온 구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빚진 사람인지 알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됐지만, 오직 그 이름을 믿는 자만이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고백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많은 일을 해왔다. 남편을 만나 한국에 오고 엄마, 사모, 유치원 원장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비록 이 모든 일은 겉보기엔 화려하지도 않고 세상에 큰 유익을 줬던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작은 영역에서 주님의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기에 마음 한 쪽에 감사함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람은 한 치 앞의 일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걸 움켜쥐고 내 뜻대로 행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 일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할 때 우리의 계획은 뜻대로 이뤄질 수 있지만, 주님과 반대되는 생각과 계획을 갖고 있다면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다.
감사하게도 나는 마음속에 뜻한 것이 이뤄지지 못해 좌절했던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늘 내 생각보다 주님의 생각이, 내 마음보다 주님의 마음이 드러나기를 소망해왔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렵지만 나 자신을 십자가 앞에 조금 더 내려놓고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더 많이 내어드리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며 매일 살아간다.
‘역경의 열매’를 읽는 독자들 가운데 지금 힘들거나 고난 가운데 처해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 맡겨드리고 평안함을 누리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만약 지금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을 멈추지 말고 계속 이어가라고 응원해주고 싶다.
갈라디아서 말씀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찬양은 ‘내 안에 사는 이’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역경의 열매 독자들이 은혜로운 가사를 함께 묵상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