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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눈꽃 산행
2009. 12.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 7시 서초구민회관 앞에 모인 고교 동기들은 산악대장 현근이 회사 직원이 모는 12인승 승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 내려간다. 덕유산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통영 쪽에서 올라오면서 육십령 터널을 지나 장수군 계북면을 지날 때면 오른쪽으로 장쾌한 덕유산 능선이 따라서 달린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늘 훌쩍 저 능선 위로 날아올라가 나도 저 능선 위를 걷고 싶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 능선을 찾아가고 있다. 원래는 덕유산 산장에서 1박을 하면서 덕유산 능선의 모든 곳에 발자국을 찍고 싶었다. 그러나 산장 예약이 시작되는 날 10시부터 전화 다이얼을 돌렸으나 재빠른 산꾼들이 예약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산장을 점령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당일로 바삐 달려가고 있다.
금산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고속도로에 합류하면서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그런데 눈 덮인 덕유산 능선을 꼭 걸어보고 싶다며 남편을 졸라 따라온 광석이 아내의 환호성에 눈을 뜨니 차창 옆으로 지나가는 산 능선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있다. 이제 저 하얀 눈세상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조금씩 들뜨기 시작한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므로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덕유산 능선을 밟기 위해서 오를 때에는 설천봉 정상까지 운행하는 무주 스키장의 곤돌라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스키장 안으로 들어가니 눈에 들어오는 슬로프에서는 알록달록한 스키복을 입은 사람들이 은백색의 슬로프를 이리 저리 몸을 회전하며 내려오고 있고, 멀리 저 위 슬로프 상단에서는 눈가루가 바람결에 날리면서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은광을 뿌리고 있다.
원~ 등산한다면서 스키장 안에까지 들어와보기도 처음이네. 얼마 만에 스키장 안에 들어와보는 것이냐?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겨울이면 열심히 설원의 세계로 달려갔지만, 아이들이 입시 준비에 바빠지면서 자연 스키장 출입을 중단하게 되었지. 그러다가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는 지들 친구들끼리 어울려서 가고, 나 또한 스키를 꺼내어 차에 장착하고 멀리 스키장 갔다 돌아오면 또 스키를 씻고 닦고 보관하는 절차가 번거로워 다시 스키장 출입을 재개하지 않으니 정말 꽤 오래간만에 스키장엘 들어와보게 된다.
곤돌라로 다가가니 기다리는 줄은 이리 꾸불 저리 꾸불. 곤돌라 앞에는 진짜 스키를 타는 사람들 외에도 등산을 하지 않고도 설천봉의 눈세상을 보고 싶은 관광객들과 또 우리와 같은 산꾼들도 많이 있다. 처음 곤돌라를 이용한다고 할 때에는 스키어들이 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안내문에 '아이젠 착용 금지'라고 써 붙인 것으로 보아 이곳 곤돌라는 이미 많은 산꾼들이 이용하고 있다는 얘기. 그런데 많은 대기자들로 인하여 정작 곤돌라를 타기까지는 50분을 기다려야 했다. 이거 시간을 절약하겠다는 의도가 좀 무색해지는데?
기다리면서 이리 저리 둘러보는데 눈에 들어오는 '겨우살이 채취금지' 안내 펼침막. 나는 아내가 끓여놓은 겨우살이액을 상용하고 있는지라 그 펼침막은 금방 내 눈에 들어온다. 이런 펼침막이 있다는 것은 덕유산에 겨우살이가 많다는 것이고, 또 겨우살이가 몸에 좋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하나씩 캐가고 있다는 것. 캐가는 사람은 한둘이겠지만 당하는 덕유산의 겨우살이는 어떻겠는가?
설천봉에 내리니 시간은 벌써 12시 15분을 넘어서고 있다. 설천봉만 하더라도 높이 1,525m의 높은 봉우리라 당장 경기도에 갖다놓으면 경기도 최고봉이 될 산인데, 이렇게 곤돌라를 타고 누구나 쉽게 오르니 산에 대한 경외심이 줄어드는 듯. 원래 산이라는 것은 산의 깊은 품속에 안겨 땀을 뻘뻘 흘리고 헉헉 하얀 숨을 내뿜으며 겨우겨우 정상에 올라와야 산과 좀 더 일체가 될 수 있고, 산을 좀 더 존중할 수도 있는 것인데... 덕유산 산신령님! 이렇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너무 쉽게 여기까지 와서 죄송합니다.
우리는 서둘러 아이젠을 착용하고 덕유산 최고봉인 해발 1,614m의 향적봉으로 향한다. 향적봉까지의 거리가 800m 밖에 안 되는 지라 제대로 등산장비도 갖추지 않은 사람들도 향적봉을 오가고 있다. 능선 오른쪽 저 밑으로는 내가 차를 타고 오가며 이곳을 동경의 눈으로 쳐다보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12:42경 향적봉 도착. 향적봉에는 그냥 겨울장화에 털모자 달린 파카를 입은 꼬마 아이도 있다. 이런 한겨울의 날씨에 저런 꼬마가 장비도 없이 이 덕유산 최고봉에 있을 수 있다니... 이게 다 곤돌라 덕분이겠구나. 향적봉 앞으로는 덕유산의 둔중한 능선이 남쪽으로 장쾌하게 내려가며 능선 끝부분에서 남덕유산과 만나고 있고, 그 너머 멀리 왼쪽으로는 지리산 산봉들이 골을 메운 안개 속에 어슴푸레 살짝 머리를 올리고 있다.
봉우리에서 100m 내려가니 나타나는 건물은 우리가 그토록 예약하려던 향적봉 대피소.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서 2.4km만 내려가면 백련사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들과 무주구천동으로 하여 백련사로 오르던 일이 기억나는구나. 그 때 부산 동아대 여학생들을 만나 같이 개울가에서 놀고 산을 오르면서 듣던 부산 가시내들의 사투리가 왜 그리 귀엽던지... 그 가시내들과는 그 후 서로 찍은 사진 주고받는다며 한 동안 편지가 오갔었는데, 그 아가씨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이제 중봉으로 향한다. 주위의 나무들에는 설화가 잔뜩 피었다. 바람이 한쪽으로 심하게 불고 있는 능선에선 나무서리가 한쪽 방향으로만 일정하게 펴지고 있는 게, 그냥 뚝 잘라 머리빗으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해본다. 어떤 곳은 하얀 설화나무 아래로 아직도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는 산죽들이 눈 속에서 잎사귀를 펼치고 있다. 아무리 체감온도가 영하 15도가 넘는다 하지만 이런 설화의 풍경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나는 손이 시리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가다 서다 하면서 카메라를 넣다 뺐다 넣다 뺐다... 가다 보니 '덕유평전 원추리 군락'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해마다 6~8월이면 이 주위는 온통 노란색 원추리꽃의 세상이 된단다. 지금 저 눈밭 속에서는 내년 봄을 그리는 원추리 씨앗이 조용히 희망의 꿈을 꾸며 자고 있겠지?
1:12경 중봉에 도착하니 능선은 조금은 급하게 내려가며 남덕유는 한결 가까이에서 눈짓하고 있다. 1:42경 백암봉(송계삼거리)에 도착. 남덕유에서부터 올라오던 백두대간은 여기서 왼쪽으로 꺾여 동쪽으로 향해 간다. 그러니까 덕유산 주봉은 백두대간에서는 조금 비켜 앉아있는 셈이다. 우리의 발길은 계속 남덕유쪽으로 향해 가는데, 지금부터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밟으며 왼쪽으로는 경상남도 거창군, 오른쪽으로는 전라북도 장수군의 땅을 이리 저리 밟으며 전진한다.
아까부터 산악회장 흥수가 어디서 점심을 먹을 거냐 채근하였는데, 현근 대장은 동엽령 도착하기 전 우리 일행이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바람이 잦아진 조그만 평지를 발견하고 일행 정지 신호. 흐흐 부지런한 흥수는 집 떠나기 전 미리 아침을 먹고 나왔으니 지금쯤은 뱃가죽이 등쪽으로 향해 가고 있을 때겠지. 대장과 회장은 우리에게 따뜻한 국물을 먹이기 위해 열심히 바나 펌프질을 한다. 겨울철 산행에 뜨뜻한 라면 국물 하나면 최고!
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하여 동엽령에 도착하니 3:15경. 여기서 우리는 덕유 주능선과 작별하고 오른쪽 용추계곡으로 내려선다. 마음 같아서는 계속 남덕유까지 내딛고 싶으나, 용추계곡 저 아래 탐방지원센터까지는 4.5km만 내려가면 되는 반면, 여기서 남덕유 정상까지 가는 데만도 10.5km를 더 가야하니, 이 한 겨울에 야간산행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저 아래 안성면 일대의 마을을 보며 내려가나, 이내 우리는 계곡 속에 파묻혀 내려간다. 경기도에만 안성이 있는 줄 알았더니 여기도 안성이네? 경기도 안성은 유기가 유명하여 안성에서 맞춘 유기라 하면 알아주어 '안성맞춤'이란 용어까지 생겨났는데, 이곳은 무엇을 알아줄까?
어느 정도 내려가다보니 온통 순백색이던 주위 경관은 어느새 메마른 겨울산의 색깔로 되돌아가기 시작하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머리에 하얀 두건을 두른 듯한 덕유산 능선은 벌써 저만치 위로 올려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계곡에선 얼음 밑으로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만, 이윽고 계곡물도 얼음을 뚫고 자못 큰 웅덩이도 이루면서 내려간다. 하얀 주위의 눈색깔에 대비되니 물색깔은 더욱 진한 물빛을 뿜어낸다.
4:13경 칠연폭포 입구에 다다랐다. 칠연폭포를 보려면 여기서 왼쪽 길로 300m를 올라갔다 다시 이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등산 막바지엔 아무리 새로운 경치라도 귀찮아지게 마련이니 일행중 절반은 못 가겠다고... 바삐 올라가보니 칠연폭포(七淵瀑布)는 계곡물이 계곡 바닥의 바위를 타고 내려오면서 7군데를 둥그렇게 파내고 7개의 작은 못을 만들어 두어 칠연폭포라 한다. 7개의 못이 구슬에 실을 꿴 듯 연달아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칠연폭포임을 금방 알 수 있겠다.
5:05경 다시 일행들을 찾아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니 일행들은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스키장에 우리를 내려주었던 차는 조만간 이리로 올 예정. 그런데 나는 내려오면서 보지 못했던 칠연의총(七淵義塚)에 미련이 남아 마지막으로 탐방지원센터 직원에게 칠연의총에 대해 물어본다. 그런데 칠연의총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어찌 그냥 가버릴소냐. 직원이 얘기해준 대로 오던 길을 조금 다시 올라 계곡을 가로 지르는 왼편 다리를 건너가니 커다란 무덤 하나가 보인다. 바로 칠연의총이었다.
칠연의총은 구한말 의병장 신명선과 그의 부하들이 함께 잠든 곳이다. 순종 원년(1907) 정미칠조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신명선은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본이 헤이그밀사 사건을 핑계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내쫓고 허수아비 순종을 황제로 앉히면서 식민지배로 한 발 다가가니 뜻 있는 선조들은 분연히 무기를 들고 일어섰으니, 신명선 또한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08. 4.경 의병들이 이 골짜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워낙 화력의 열세로 150여명의 의병들은 이곳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훗날 이곳 주민들이 의병들의 유해를 묻고 칠연(七淵)의 의로운 무덤이라고 하여 칠연의총이라 불렀다.
나는 잠시 무덤 앞에서 100년 전 이곳에서 처절하게 싸우다 산화한 선열들에게 묵념을 올린다. 비문에는 선열들에 대한 피 끓는 조사가 새겨져있다. "...아! 슬프도다. 칠연곡 송정(松亭)에서 대격전, 중과부적 천추의 한을 품고 전원 옥쇄 이곳에 잠들다." 그럼 저 앞에 정자를 세운 곳이 바로 그 자리란 말인가?
다시 계곡을 건너는 내 귀엔 그 날의 콩 볶는 듯한 총소리와 한을 품고 죽어가는 의병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선열들이여! 당신들의 그 염원이 헛되지 않아 100년이 지난 지금 저희는 세계에서 부끄럽지 않을 위치까지 올라섰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선열들의 피로 이루어졌음을 잘 아오나이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한 과제, 허리가 잘린 이 한반도를 다시 이어 통일의 그 날, 우리 후손들은 선열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춤을 덩실덩실 추오리다. 그날까지 한 번 더 우리를 지켜주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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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정말 눈꽃이 아름답습니다.... 빈틈없이 완벽한 여행을 하셨네요.. 칠연폭포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날 풀리면 가보고 싶네요..^^
지금 가면 더 멋있는 눈꽃여행을 할 수 있는데... ^.^;;
아이젠 없이는 절대 못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