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창낭창해서 한없이 부드럽기만 할 것 같은 가느다란 대나무 장고채가 팽팽한 가죽 두들겨서 울려대는 소리는 그렇다 치자. "처음에 정선 왔을 때는 엄청 답답했어요. 산이 항상 눈앞에 가득 다가왔거든요. 시간이 지나니 산이 뒤로 물러나더군요. 그 다음부터 견딜만해요." 동해시가 고향이라는 정선군청 산악회 고재근회장(32세)의 말이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내린다. 억수장마로 내린다. 산이 떠내려가라고 내린다. 가물가물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 누군가를 마냥 그리워하고, 올라야 할 가리왕산은 자꾸만 멀어져 간다. 좇아가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가까이 다가오는 산, 그게 바로 가리왕산이다. 그게 바로 그리움이고, 그게 바로 세상 사람들 사랑하고 미워하며 헤어지는 이치이다. 그게 바로 정선 아라리 줄줄이 애달픈 사연이다. 구름 모여 흗어질 줄 모르는 가리왕산 아침은 마냥 신비롭기만 하다. 임도 때문에 꽤나 헷갈리는 등산로를 찾아 가리왕산 꼭대기에 오른 것은 점심도 훨씬 지난 시간. 사방 수백리까지 보이는 맑은 하늘에 구름 몇 점 오가며 벗하잔다. 강릉 비행장에서 떴을까, 단검처럼 날렵하게 생긴 F-5 전투기가 푸른 하늘을 날며 마음껏 즐기고 있다. 자유롭다. 가리왕산 꼭대기 바위 위에서 몸 말리는 독사도 자유롭듯 서로 참견하지 않는 자유다. 멀리 진부가 보이고 그 너머 백두대간에 걸친 흰구름 줄기줄기 내륙쪽으로 밀려들고 있다. 동해 바다가 그득히 밀려들어와 있다. 그냥 산에 눌러 앉아 살아도 될 만큼의 넉넉한 그리움과 취나물 곤드레 딱주기 양식 삼아 몇 삼년 이산 저산 헤매볼 일이다.
정작으로 가리왕산 꼭대기에 올라 하루 묵어갈 요량으로 텐트를 맵시나게 친 저녁, 평창쪽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구름은 도무지 걷힐 생각이 없다. 셋이 나란히 누워 비좁기만한 텐트인데도 길게 허리펴고 누우니 살 것 같다.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각인 것 같은데 한 패거리 올라와서 텐트를 치느라 법석이다. 사람이 그리웠나 보다. 셋이 함께 있으면서도 지상 세계의 사람들이 그리웠나 보다. "한 번 비(보여) 주소." 경상도 사내의 간절한 바람이다. 가리왕산 상봉에서 중봉 거쳐 하봉 가는 내리막은 둔중한 육산의 진면목을 속속들이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온통 평탄한 사방은 나무와 수풀이 빼곡이 들어차서 능선이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넓은데 풀섶 사이로 조붓한 길 하나 끊어질 듯 이어지니 말이다. 가다가 보면 멧돼지 놀라서 후다닥 달아나고, 땅 파고 눈 검정색 똥은 아직 물기 촉촉하다. 동작 느린 새끼 멧돼지 한 마리는 기어코 사람 눈에 띄고 말지만 그래도 숲으로 뛰어드니 종적을 찾을 수 없다. 가리왕산은 그런 산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와서 뜯어가도 발길에 지천으로 채이는게 곰취며 참나물, 더덕이며 머루, 다래다. 멀리, 마음 떠난 몸 어디 깊숙한 유배지엔 / 개망초 지천으로 피어 있더라고 했네 / 한 달포쯤 아니 한 사나흘쯤이라도 / 죽음 데불고 가는 먼 들길 그 어디쯤 / 몸과 마음 함께 돌아온 유배지엔 / 유령같은 허어연 개망초 떨기떨기 허옇게 / 흐드러지게 흐드러지게 흐트러지겠다 했네 -姜禧山시인의 <개망초> 부분-
헤어질 즈음에야 비로소 눈부신 햇살 아래 제 모습 드러냄은 무슨 뒤틀어진 심사이랴만 저녁때 되어 구름 불러모으는 그대 자태 문곡리 지나는 길에 마냥 웅장하더라. 몰랐어라. 내 진작 몰랐어라.
전설에 의하면 갈왕(竭王)이 전란을 피하여 갈왕산 서심(西深)에서 은거(隱居)하였다 하며 지금도 성지(聖地)가 남아있고 기국(碁局), 이우(二宇), 각석(刻石)이 상존(尙存)하며 이 암석 밑에서 하룻밤을 유숙(留宿)하였다 하여 숙암이라 불리어 오고 있는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정선조양회에서 1986년 7월 10일 100만원을 들여 건립하였다. 이곳은 1986년 6월 군부대에 의해 정선 숙암∼평창 진부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5월말∼6월초의 철쭉군락이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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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읍 봉양리 산 17번지 관음사지 절벽하단부에 세겨있는 전설속의 화주일춘(化主一春)은 1980년 도로개설로 매몰되면서 이를 아쉬워한 정선읍 조양회에서 글씨의 형체를 본떠 2백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1987. 7. 18 관음대 절벽 아래 세웠다. |
갈왕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깃든 가리왕산은 강원도 정선에 있다. 작은 지리산이라 할 만큼 그 품이 넉넉하여 품어 주는 것들도 많다. 산짐승들의 표효소리가 끊이지 않고 각종 나물이 지천인 가리왕산은 정선 사람들에겐 어머니의 산과 같다.
2007년 새해 첫날 새벽에 눈을 떴다. 새벽 3시다. 밖은 어둠뿐이다. 일출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가리왕산의 높이가 1561m나 되니 산책 삼아 나설 일도 아니다. 읍내에 있는 이선생 내외가 차를 몰고 왔다. 집을 떠나 함께 산행을 할 일행들과 만나기로한 다래뜰 마을로 간다.
타고간 차를 세워두고 봉고차로 갈아탄다. 가리왕산 휴양림까지는 차로 이동한다. 일행은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고 다들 가리왕산 자락에 사는 이들이다. 도시에서 온 이들이 다섯이고 정선 토박이는 둘이다.
새벽 4시, 작은 불빛을 앞세우고 야간 산행을 시작한다. 사위는 어둠뿐이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별을 셀 여유도 없다. 계곡의 물소리가 발걸음을 따라온다. 근처에 계곡이 있다는 건 짐작뿐 어디에 있는지 확인은 안된다. 출발부터 급경사다. 잠도 부족한 데다 연일 마신 술로 인해 몸은 천근만근이다. 작은 불빛에 의지한 산행은 극도로 긴장을 준다.
자칫 발을 헛딛거나 얼음에 미끄러지면 낭떨어지로 굴러 떨어진다. 신경이 예민해진다. 급경사는 사람의 숨을 턱까지 차오르게 한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혼자 돌아가기에도 만만치 않은 야간산행이다.
시작부터 급경사를 만난 탓에 다들 힘들어하는 기색이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올라간다. 땀이 목덜미로 흐른다. 답답함에 장갑을 벗는다. 두터운 점퍼가 몸을 칭칭 감는 듯하다.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는 길이다. 쉬었다 갔으면 좋으련만 선행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 어둠이 걷히는 가리왕산, 나를 앞서간 이들이다. |
ⓒ 강기희 |
▲ 가리왕산 주목, 주목나무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간다. |
ⓒ 강기희 |
▲ 가리왕산에서 바라본 설경,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
ⓒ 강기희 |
▲ 가리왕산 정상, 새해를 함께 맞은 이들이다. 다들 행복하길. |
ⓒ 강기희 |
▲ 가리왕산 눈길, 저 길에서도 나는 넘어지기 일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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