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사(57) - 경산 경흥사
절집 답사를 다니기로 하고, 절집을 찾아 나서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될 수 있으면 걷기로 하였다. 늙그막에 최고의 운동은 걷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찾아갈 수 있는 절집이 많지 않다.
10여 년 전에 영남대의 미학미술사학과에 공부하러 디닐 때 동양 미술사 교수님이 경흥사에 가면 조선 중기의 목조 불상이 있으니 대학원생끼리 답사를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답사 갈 마음이 아니어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아들 뻘보다도 더 젊은 학생이 전화를 했다. 무조건 차를 가지고 오란다. 내 차로 학생이 가야 한다나. 솔직히 그때의 나는 나이를 앞세워서 새파란 젊은이가 강압적인 말투로 차를 가져오게 하는 것에 기분이 나빴다. 그러다가 나이를 뻬면 나는 그냥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원생일 뿐이라면서, 차를 가지고 간 일이 있었다.
그때도 오늘 쯤의 6월이었다, 차를 몰고 갔으므로, 어디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산 구비를 돌아가던 비포장 도로의 고요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집사람더러 옛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경산 경흥사를 다녀오자고 했다. 교통편은? 하고 묻길래, 지하철, 시내 버스가 줄줄이 깔렸는 경산이 아니냐며, 까짓거 놓치면 택시를 타지 뭐, 라면서 길을 나셨다. 나는 곧잘 택시를 말하지만 산골에 택시가 있기는 할라구.
경산서 남천1번 버스를 타니 기사 아저씨가 대명2리 주자장에서 내리라고 하였다; 버스에는 우리 부부만 타고 있는 걸 보아서 남천면의 종점이 가까웠나 보다.
길에 내려 경운기를 끌고 있는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디 손을 들어 저쪽 산골짜기를 가르키면서 친절하게 아르켜 주었다.
집사람과 걸었다. 마을 골목길을 잘못 접어들어 조금 헤메기는 해도, 골짜기로 나 있는 포장도록가 예전의 맨땅 길으 느낌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개울은 푸른 갈대로 뒤덮여 있고, 아직은 울긋불긋한 꽃들이 우리 부부의 기분을 좋도록 해주었다. 나는 예전에 답사왔던 이애기를 하면서 연신 ‘많이도 바뀌었다’ ‘많이도 바뀌었다’를 되뇌였다.
절을 찾는 길은 경사가 거의 없다. 2km쯤을 걸은 듯 한데, 주변의 경치에 빠져서 멀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절마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절의 전경을 올려다 보았다. 절집을 단장하려 싸구려 술집 아가씨의 화장마냥 보기 싫게 덧칠을 하지 않은 것이 좋았다; 절 마당은 고즈녁하다. 절의 축담과 그 아래의 고목 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젊은 여인도 보기가 좋다. 옛 티가 묻은 나무들이 절을 둘러싸서 신비감을 불러준다. 대웅전은 옛 모습인데, 전체적으로는 건물 동 수가 조금 더 늘어난 듯하다.
이 절은 경산시 남천면 동학산 자락에 있으며, 대한 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무열왕 때의 고승 혜공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포항 오어사 전설에 나오는 그 혜공스님이지는 모르겠다.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 하나, 자료가 없으니 믿을 것은 못되겠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을 훈련시킨 곳이라고 하였다. 사적비에 의하면 서산대사, 영규대사, 사명대사가 이 절에서 승군을 훈련했다고 하였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이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으니, 여기도 훈련장의 역할을 하였으리라 믿어진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이것이 이유가 되어서 탄압받았다고 하였다. 광무 1년(1897)에 김사숙이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인데, 경산 사람들의 마음을 모았었나 보다.
예전에 답사를 오게 한 것은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 불좌상이다. 조선 중기인 인조 22년에(1644) 영규 대사가 조성했다고 한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750호가 되었다.
부도밭에는 이 절에서 열반에 드신 스님의 부도가 36기나 있다. 아마도 조선후기에 전성기였었나 보다. 1990년 대에 접어든 최근에 와서는 개금 불사 등, 손을 많이 보았다고 하였다. 그래선지 고찰의 면모를 지니면서도 깨끗하고, 아담하게 보존되어 있다.
요즘의 절집 답사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내 머릿속에 보관 되어 있는 절의 모숩이 많이 달라져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답사를 열심히 다녔던 시절이 바로 어제가 아니고, 벌써 저만치나 멀리 흘러가버린 강물이었었다.
집사람과 걸어서 내려오기로 했다. 절집 답사를 다녀보면 내려오는 길은 수월하다. 내리막 길이니 그렇다. 걸어오다 분청사기 도요지란 간판을 보고 집사람이 자꾸 들리자고 한다. 또 500미터나 걸어야 하니 왕복으로 따지면 1km나 더 걷는다. 도요지에 가보면 빈 땅 뿐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왔으니 가보자고 한다. 산기슭의 오름에 나무를 잘라 약간의 빈터를 만들어 놓고 도요지라는 간판과, 거창한 해설을 했다. 나는 또 아는 척 했다. 토기 가마는 평지에 가마를 탑처럼 쌓은 것이지만 분청은 오름 가마를 만들어서 같은 화목으로 더 많은 도자기를 굽는다. 그래서 산 기슭이 가마터라고 하니, 아 맞다 불길은 위로 올라가잖아 한다.
우리 부부는 시골 저수지의 못뚝도 걸었고, 들녘의 정자에서 쉬면서 준비해간 커피도 마셨다. 그리고 경산에 있는 지인에게 자랑삼아 문자를 보냈다. 그 지인은 불교 신자도 아닌데 좋은 절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경흥사를 불자가 아니면서도 자랑하는 것을 보니 좋은 절임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