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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애역사(愛歷史)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은 표준적인 정치기기이다. 그의 모든 동작은 대수강산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후계자의 선정을 포함해서. 양광(楊廣)이 후계다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군공(軍功)이 컸기 때문이다.
581년 이월 십사일, 양건은 북주정제(北周靜帝) 우문천(宇文闡)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대수왕조(大隋王朝)를 건립한다. 다음 날 양견은 독고가라(獨孤伽羅)를 황후로 앉히고, 적장자(嫡長子) 양용(楊勇)을 황태자(皇太子)로 세운다. 대수의 통치질서와 후계구도가 신속히 확정된 것이다.
이십오일, 양견은 종실을 왕에 봉한다: 동생 양혜(楊惠)를 등왕(滕王)으로, 양상(楊爽)을 위왕(衛王)으로 봉하고, 아들 양광(楊廣)은 진왕(晋王)으로, 양준(楊俊)은 진왕(秦王)으로, 양수(楊秀)는 월왕(越王)으로, 양량(楊諒)은 한왕(漢王)으로 봉한다.
제위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군공집단이 상당하 강력한 상황하에서, 양견은 종실이라는 카드를 써서 종실로 권신들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유방이 한나라를 개국했을 때 사용했던 방법이다.
이월 이십육일, 양견은 다시 나이 겨우 13살의 양광을 병주총관(幷州總管)에 임명하여, 병주(幷州, 지금의 산서성 태원)에 좌진(坐鎭)하게 한다. 동시에 월왕 양수를 촉왕(蜀王)으로 고친 다음 익주총관(益州總管)으로 임명하고, 진왕 양준은 하남에 좌진하게 하며 관동병(關東兵)을 이끌게 한다.
정식으로 번왕을 지방에 좌진시켜 조정을 공위(拱衛)하는 방안이 실행된 것이다. 그러나, 수문제의 포석을 보면, 진왕 양광의 부담이 가장 무겁다. 왜냐하면 병주는 돌궐을 상대하는 전진기지이기 때문이다. 일년내내 돌궐과 교전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수문제는 진양(晋陽)에 하북도행대(河北道行臺)를 설치하여, 진왕 양광을 행대상서령(行臺尙書令)으로 임명하고, 무위대장군(武威大將軍)의 직위도 부여한다.
양광의 임무는 도전적이기는 하지만 쉽게 군공을 쌓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공은 왕왕 번왕이 적장자계승제도에 도전하는 유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태자 양용, 진왕 양광, 심지어 대수왕조의 운명이 수문제의 이번 결정으로 변화가 생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병주에 수문제는 양광에게 최강의 진용을 갖추어준다. 문관(文官)으로는 왕소(王韶), 무관(武官)으로는 이철(李徹). 이들은 진왕을 가르치는 중임을 맡았을 뿐아니라, 더더욱 변방을 지키는 중임도 맡는다. 당연히 돌궐에 맞서싸운 군공은 진왕의 공로부에 쌓인다.
더욱 중요한 것은 태원(太原)이 진,한이래 유목민족에 대항하는 최전선의 진지로서 무덕(武德)이 충만했고, 또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간의 무역장소로 인재도 넘쳐났다. 이런 환경은 양광의 개인적인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사람은 환경의 산물이라는 논리로 보면, 양광은 병주에서 낭성(狼性), 정명(精明), 그리고 극히 공격적인 유전인자를 주입받게 된다.
즉, 병주총관의 자리에서 양광은 군공을 쌓았을 뿐아니라, 극히 강인한 개인적 성격까지 갖추게 된다. 내재적으로 외부적으로 이중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양광은 점차 황태자의 지위를 노리는 야심을 키우게 된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어떤 특질을 갖춘 후에 비로소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게 된다. 양광도 예외는 아니다.
개황6년(586년) 팔월 이십팔일, 수문제는 18세의 진왕 양광을 조정으로 부르고 다시 십월초, 그를 옹주목(雍州牧), 내사령(內史令)으로 임명한다.
옹주목은 경기(京畿)지구의 최고행정장관이다. 내사령은 재상이다. 수문제는 양광의 군사능력을 키운 후에 다시 행정능력을 키운 것이다. 재상과 옹주목이라는 민감한 직위는 무형주에 태자 양용의 후계자지위를 위협하게 된다. 수문제가 대수의 후계자경쟁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개황8년(588년) 십월 이십삼일, 수문제는 수춘(壽春, 지금의 안휘성 수현)에 회남행대성(淮南行臺省)을 설치하고, 진왕 양광을 행대상서령에 임명하고, 진(陳)을 토벌하는 임무를 총괄하게 한다. 즉 양광은 수나라군대에서 진을 토벌하는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비록 양광은 그저 이름만 걸어놓은 총사령관이고, 실제 업무는 원수부(元帥府) 장사(長史) 고경(高熲)과 원수부 사마(司馬) 왕소(王韶)가 책임졌지만, 양광이 이번 행동에 참가하기만 하면, 진나라를 멸망시킨 불세의 공로는 그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도 엄청난 정치적 자본이다.
다음 해(589년) 정월 이십이일, 수군의 총사령관 양광은 정식으로 건강성(建康城)에 진입하고, 남진(南陳)을 멸망시킨다. 건강성에 들어간 후, 양광은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취한다: 진나라의 부고(府庫)를 봉존(封存)하고 금은보화를 하나도 챙기지 않는다; 남진의 국정을 해친 중서사인(中書舍人) 시문경(施文慶), 중서사인 심객경(沈客卿), 태시령(太市令) 양혜랑(陽慧郞), 상서도령사(尙書都令史) 기혜경(曁慧景)을 참살하고, 진후주(陳後主)를 미혹시킨 장려화(張麗華)를 청계교(淸溪橋)변에서 참살한다.
만일 고경이 진나라정벌의 총지휘관이었다면, 양광은 강남의 질서를 안정시킨 공신이다. 마찬가지로 그 공은 엄청난 것이다. 당시 천하인들은 모두 양광을 칭송했고, 그에게 "현명"하다는 표찰을 붙여준다.
이때, 총명한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 있었다. 진왕이 사실상 대수의 스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 위세는 황태자 양용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양광은 이런 군공을 가지고 이때부터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필자도 크게 의혹을 가지고 있다. 양광이 건강성에서 한 행동은 강남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기 위한 준비가 아니었을까라는. 마치 나중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낙양(洛陽)에 진입하였을 때도 마찬가지로 각종 수단으로 인심을 얻으려 했던 것처럼.
개황10년(590년), 수문제는 다시 병주총관 진왕 양광을 양주총관(揚州總管)에 앉히고, 강도(江都)로 옮겨서 진주하게 한다. 비록 같은 직급간의 이동이지만, 이건 위기상황에서의 임명이었다. 왜냐하면, 강남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발생하여 빠르게 질서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제는 능력있는 황자를 보내 이 중임을 맡게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은 증명한다. 양광의 능력은 여러 형제들보다 뛰어났다. 사서에는 이를 이렇게 형용한다. "성명적심(聲名籍甚), 관어제왕(冠於諸王)"(명성이 널리 퍼져서 여러 왕들중 으뜸이었다). 강도에 좌진하고 있는 동안, 양광은 문화층면에서 시작하여 강남의 인재들을 왕부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우세기(虞世基), 우세남(虞世南) 형제, 낭야왕씨(琅琊王氏)의 왕신(王昚), 왕주(王胄) 형제가 있다. 그리고, <강도집례(江都集禮)> 1부를 편찬하고, 또한 불교, 도교 양대종교의 지도자급 인물을 적극적으로 회유한다. 심지어 강남사람들에게 우호적인 제스추어를 보이기 위해, 그는 특별히 현지방언을 사용한다. 이는 옛날 왕도(王導)가 강남사인들을 회유할 때의 여러가지 수법을 그대로 복제한 것같다.
양소(楊素)와 사만세(史萬歲)의 군사적 타격하에 강남은 신속히 평정되고, 양광의 문화침투로 강남질서는 재건되며, 점차 대수의 계통에 편입된다.
강도는 이로 인하여 양광의 공고한 근거지가 된다. 여기에 누적된 군공까지 더해져서, 양광을 후계자경쟁으로 돌진하게 만든다.
금방, 양광은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기 위한 자신의 진용을 갖추게 된다. 강남사인(江南士人)을 주축으로 한 강남파(江南派); 병주총관때의 인원들의 병주파(幷州派), 예를 들어 장형(張衡)이 있다; 그리고 진나라를 평정하는 전투에서 원수부를 대표로 하는 관농훈족(關隴勛族),예를 들어 우문술(宇文述), 곽연(郭衍)등이다.
강남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양광은 수문제에게 청하여 우문술을 수주자사(壽州刺史), 총관(總管)으로 임명하게 하고, 여기에 홍주(洪州, 지금의 강서성 남창)에 좌진하고 있는 곽연(郭衍)까지 더하여, 양광은 기본적으로 장강남북과 회남을 통제하게 된다.
당연히, 양광은 최악의 경우도 생각했다. 만일 황태자를 빼앗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면, 강남을 할거하여, 남조의 강역을 회복시킬 생각도 했다. 이를 통해 대수와 다시 한번 남북대치국면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0년의 시간은 양광이 강남을 자신의 공고한 근거지로 만드는데 충분했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필자는 한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당태종 이세민이다. 이세민은 양광과 많이 닮았다. 모두 차남이고, 모두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천하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는다. 천하를 얻는 과정에서 이세민은 세심하게 관동을 자신의 근거지로 말들었다. 이원길(李元吉)은 이런 말까지 했다: "둘째형은 낙양성에 들어가자마자 돈을 뿌렸다."
인심을 얻기 위해서, 관동과 자신의 이익을 묶어버린 것이다. 만일 천하를 쟁탈하는데 실패하면, 그는 낙양을 근거지로 옛 북제(北齊)의 영토를 차지하고 대당과 천하를 나누어가질 수 있었다.
개인적인 성격이나, 일처리 스타일, 군공, 황태자탈취계획등 여러 층면에서 보면, 양광과 이세민은 하나의 틀에서 나온 복제품같다.
역사는 이렇게 음미할수록 재미있다.
동시에 한 가지 이치를 설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초기, 강남, 관동은 문화층면에서 관농(關隴)과 갈라져 있었다. 양광의 동생인 한왕 양량도 병주총관으로 있는 동안 그 지역을 경영하여 북제의 옛땅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자 했다. 장래 이를 통해 양광과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진용을 갖추어가는 동시에, 양광은 매번 조정에 들어갈 때마다 조정신하들과 교분을 쌓는데도 애를 썼다. 예를 들어,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원주(元胄), 이부상서(吏部尙書) 우홍(牛弘), 관농훈족인 장군 우중문(于仲文), 이들은 모두 양광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동시에 양광은 심복 우문술을 장안으로 보내 활동하게 한다. 양약(楊約)을 통해 재상인 양소도 자신의 진영에 끌어들인다.
이렇게 하다보니, 양광은 이미 실력에서 양용을 압도하는 모양새가 된다. 사실도 그러하다. 모든 직위는 기실 실력이 말하는 것이다. 양견이 대수의 천자가 된 것도 실력에 의존한 것이다. 그렇다면 양광의 실력이 양용을 넘어선 후에는 그가 양용의 자리를 대체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수문제는 다시 그를 도와준다. 개황20년(600년) 사월 초나흘, 돌궐 빌게칸(步伽可汗)이 남하하여 수나라 변경을 침범한다. 수문제는 진왕 양광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임명하여, 군대를 이끌고 반격하게 한다. 그는 재상 양소와 함께 영무도(靈武道, 지금의 영하성 영무)로 나가 돌궐을 대파하고 천여명의 수급을 벤다.
군공이 더욱 추가되자, 양광은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 더욱 커지고, 황태자와 맞설 충분한 자신이 생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수나라의 후계자다툼은 완전히 수문제가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양광에게 그런 조건을 마련해주어서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을 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설사 양광은 그런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하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나중에 진왕 이세민이 직면한 것과 동일한 국면이다.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권력, 황제의 자리를 놓고 싸울 때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황태자 양용이 적극적으로 양광에게 "협력"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생활에서 극히 사치스럽고, 일처리에서 부모의 뜻을 거역하며 심지어 동지에 공공연히 조정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는다...
한명은 계속하여 점수를 따고 있고, 한명은 계속하여 점수를 잃고 있다. 그러면 형세는 반드시 역전된다.
기실 양용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능력도 있다. 580년 구월, 삼방의 난을 평정할 때, 양견은 양용을 낙주총관(洛州總管), 동경소총재(東京小冢宰)로 임명하여 북제의 옛땅에 진주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양견은 관농, 양용은 관동에서 부자가 공동으로 북주의 강산을 빼앗았다.
양견이 황제위를 찬탈하기 전날, 양용은 경사로 불려가서, 주국(柱國), 대사마(大司馬), 영내사어정(領內史御正)에 임명되어 금군사무를 관장한다. 그는 주에서 수로 왕조교체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수를 건립한 후, 양견은 왕왕 중요한 업무를 양용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했고, 양용은 매번 원만하게 임무를 완성했다.
단지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되다보니 양용은 점점 느슨해졌고, 안일하고 편안한 생활을 즐기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민감성이 떨어지고, 큰 뜻이 없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서 가장 민간함 직위는 황태자이다. 자고이래로 그러하다. 양용이 황태자의 자리에서 완전히 느슨해져 있었다는 것은 그가 정치가로서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왕 양광 진영으로부터의 연이은 공격에 양용은 확실히 피동적이었다. 그리고 그를 지지하던 재상 고경이 파면된 후, 양용이 폐위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화된다. 수문제는 동궁의 문무엘리트를 다른 직위로 내보내고, 특무를 보내어 동궁을 감시했다. 그리고 태자천우비신(太子千牛備身, 태자호위대장) 유거사(劉居士)등을 참수한다. 이제 황태자를 폐위시킬 준비는 모두 끝났다.
개황20년(600년) 구월 이십육일, 수문제는 급히 인수궁(仁壽宮)에서 경사 대흥성(大興城)으로 돌아온다. 다음 날 황태자를 폐출(廢黜)하는 결정을 선포한다. 십월 초구일, 양용이 정식 폐위되고, 양광은 승리자가 되어, 십일월 초사흘, 황태자로 세워진다.
대수의 역사는 이렇게 새로 쓰여지게 된다.
수나라가 2세로 멸망하면서 사람들은 항상 멸망원인을 수문제가 황태자를 폐립한 건에서 찾는 경향이 있지만, 실사구시적으로 말하자면, 양용이 승계했더라도 모순으로 가득한 대수의 강산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수에는 관동과 관농의 갈등이 있었을 뿐아니라, 동시에 남북갈등도 존재했었다. 내부에는 관농귀족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웅주(雄主)만이 이런 복잡한 국면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잇다. 양용을 보면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같다.
양광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출중했을 뿐아니라, 돌궐을 평정하고, 남진을 멸망시키고, 강남을 안정시킨 공적이 있다. 이런 기초조건은 대수의 2세황제로서의 역사적 요구조건에 완전히 부합한다.
다시 말해서 수문제가 북주의 고아과모를 핍박하여 얻은 강산이므로, 천하를 차지한 방법이 정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강산이 불안정할 것을 우려했다. 태자 양용은 능력이 부족했을 뿐아니라, 그의 장남은 신분이 비교적 낮은 운씨(雲氏) 소생이다. 수문제는 제3대에서 희망을 보지 못했다. 독고황후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다: "운씨소생의 아들은 근본적으로 양씨집안의 혈통이 아니다!"
양광은 달랐다. 그의 장남과 차남은 모두 그의 정실부인 소비(蕭妃)의 소생이다. 소씨는 남조황실의 후손이고, 양씨, 소씨 양가의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리하여 수문제도 안심했을 것이다. 이는 양광을 태자로 봉한 후의 관련조치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수원년(601년) 정월 십삼일, 수문제는 양광의 아들 하남왕(河南王) 양소(楊昭)를 진왕(晋王)에 봉하고, 내사령(內史令)에 임명한다; 예장왕(豫章王) 내사령 양간(楊暕)을 양주총관으로 임명하여 그의 부친 양광을 대신하여 강도에 좌진하게 했다.
이는 분명 제3대의 인사이다. 모두 대수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즉, 수문제는 강산을 안정시킬 필요에서 양광을 황태자로 골랐고, 양광이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라든지,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이라든지, 부모에 효도하는 인품등은 그다지 플러스요소로 고려되지않았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수문제가 양광을 후계자로 세운 것은 관농집단을 타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양용을 지지하는 세력은 관농집단이다. 양광의 본거지는 강남이다. 수문제의 즉위초기 관농귀족의 통제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다만 이는 좁은 범위내에서 관농귀족의 권력을 제한한 것이고, 이 집단의 대수황권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2대에서 계속 노력해야 했다. 그러면 강남세력을 대표하는 양광이 확실히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결론적으로 개인능력이나, 배후의 배경, 명망, 대수를 통제하고 발전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은 양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문제는 황제의 각도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후계자로 뽑았을 뿐이다.
대수가 망한 것은 양광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가 너무 빠르게 차를 몰다가 전복된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수나라의 멸망에 수문제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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