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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s gone
2page 完
그 남자의 편지 마지막 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몇 가지나 있을까. 단 한 가지라도 알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나마 행복한 부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눈이 떠지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는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그들보다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내겐 살아가는 이유가 있었고 웃을 수 있는 낙원이 존재했고 바쁘게 살아가다가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피난처가 존재했다.
내가 잘못 됐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을 내 입으로 시인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실은 알고 있었다. 내가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나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내 상처가 더 크다고 여기며 살았다. 내게 무슨 죄와 잘못이 있다고.
신이 있다면 그 존재는 나를 시기하는 것에 분명하다. 남들이 생각해 보지도 못한 대단한 사랑을 한 죗값은 꽤 혹독하다. 남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빌리자면 논리정연하고 이성적인 인간이고 타협점을 잘 찾고 언제 어디서나 냉철하고 감정보다는 그 상황에 맞는 순리를 따지는 사람이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바보같이 미적거린 적이 없다. 칼 같았고 내가 손해를 보는 게임이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편이다. 내게 이득이 될 만한 동업자가 아니라면 가차없이 손을 잡지도 않고 내게 구걸하는 사람을 단지 동정에 눈이 멀어 밑에 두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기에 성공했고 내 수하 아래 많은 것들을 이뤘다. 남들보다 훨씬 빠른 나이에 성공했고 돈이며 명예까지 갖지 못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철저한 내 인생에 잘못된 이정표 하나가 생겨버렸다. 어느 날 불쑥 내 인생에 끼어든 그것은 나를 지배했다. 명확한 답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머리보단 가슴이 먼저 움직였다. 내 멋대로 하고 싶었고 그 사람 안에서만큼은 어리광도 피우고 인간 강민욱으로 살고 싶었다. 모두들 완벽하다고 혀를 내두르기에 바쁜 나도 쉴 곳이 필요했다. 연애를 머리로 하는 인간들도 더러 있다는 것은 안다. 누가 더 많이 줬네 적게 줬네를 따져가며 하는 연애. 사람들은 내게 그런 가벼운 연애가 어울린다고 말한다. 내 사업에 더욱 이윤을 남겨 줄만한 파트너를 찾아 결혼하라고 장난 식으로 말하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성공하기도 훨씬 전부터 이미 내 옆에 둔 그녀는… 내 성공을 위해 필요한 거대한 배경을 둔 집안의 자제도 아니고 대단한 회사에 다니는 여자도 아니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닳진 않을까 아깝고 손을 뻗어 그 체취에 직접 다가가기라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내 자신이 행복한 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 좋았다.
“사장님!!!”
지잉. 지잉.
우리 집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럽다. 나는 다만 침실 안에만 누워있는 중이다. 하루 종일. 그 하루가 모여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도록 만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간단하다면 몇 일, 더 길었다면 몇 주, 그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면 몇 달 정도. 먹지도, 마시지도, 일어나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 휴대폰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울려댔고 이제는 집 전화까지 위협이라도 하듯 시끄럽게 울려댄다. 현관문까지 두들겨대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놨다.
그러나 그녀가 아닌 이상 그 아무에게도 이 집을 허락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사람 향기 섞이는 것 싫어. 아직 맡아도 맡아도 그립고 그 향기를 내가 마신다는 것도 아까운데. 얼마 남지 않은 이 체취가 흐려지는 게 싫다. 공기에 섞여버리는 게 싫어. 그저 이대로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내 옆에 남아줬으면 하는데. 베개에 더 깊게 코를 묻어도 이제는 무엇이 네 향기인지 잘 모르겠어. 먹질 않아서 그런지 눈 앞에 보이는 흰색은 빛인지, 침대 시트인지 잘 모르겠다. 어둠이 오면 너와 함께 보냈던 밤들이 떠올라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여전히 너무 선명하고 잊으라고 말하기엔 가혹할 정도로 행복했었던 시간들이었으니.
Page 2 그 남자의 편지
너는 끝까지 지독하게 굴었다. 내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눈을 감았다. 네 작은 몸이 쏟았다고는 믿기 힘들었던 엄청난 양의 혈흔에 내 몸은 점점 더 굳어갔다. 너는 여전히 지독하게 나에게 내가 죄인임을 인식시키고 떠나갔다.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죽여버린 살인자로 만들어 놓고 대화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죄를 사죄하지도 못할 만큼 먼 곳으로 가버렸다.
눈을 감아도 네가 보이고 눈을 떠도 네가 보인다. 하루 종일 내가 꿈을 꾸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보고 싶다는 간절한 내 마음 안의 주문과 외침들이 환영을 빚어내는 것일지도 모르지. 너를 만지려 손을 뻗으면 와르르 무너져 사라져버리는 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려. 그것은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과 통증으로 나를 잠식한다. 만져야 하는데, 안아야 하는데, 보듬어줘야 하는데, 더 사랑해줘야 하는데. 아직 쏟아내지 못한 내 가슴에 가득 들어찬 너에 대한 애정이, 사랑이 갈 길을 잃고 내 마음 안을 휘젓는다.
후회… 라는 사치스러운 단어로 나를 포장하지도 못한다. 너의 마지막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결국 사랑한다고 말하는 네 입술에 대고 나는 뭐라고 했을까. 나도 사랑해… 아냐, 그걸로도 부족해. 너를 끌어안고 있던 내 몸의 모든 피를 뽑아내 네 몸에 다시 넣어준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사랑한다? 뭐라고 말해야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끝까지 죄인이 되는 놈은 나지.
생각해보면 나란 놈에게 죄는 딱 하나다. 너를 사랑한 것. 그것이 사형수
네가 있는 곳은 어때? 춥지는 않아? 넌 추운 거, 절대 못 견디잖아. 아니면 그곳은 더워? 뜨거워서 견디지 못할 만큼? 그것도 아니라면 네가 있는 곳은 온도라는 것도 없을 만큼 편안하게 너를 감싸고 있을까? 그래도 너를 감싼 그 공기가 내 품보다 더 나을린 없어. 내 품에 안겨 웃던 네 얼굴이 얼마나 생생한데. 가끔 꿈에도 나온다. 아침마다 내 얼굴에 쉐이빙 크림을 발라주고 서툰 손길로 면도를 해주던 너. 직접 커프스와 타이에 정장까지 골라놓고 오늘은 이렇게 입고 나가라며 처음부터 천천히 입혀주던 네 손길. 아침에 출근하는 길은 언제나 지각이었지. 아무리 빨리 일어나서 준비를 한다고 해도 함께 씻고 네가 입혀주는 대로 몸을 움직여 입는 일은 더뎠다. 중간에 우리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니까. 면도날에 베어 군대군대 붉은 피가 나는 내 얼굴은 미안하다는 듯 여린 손가락으로 쓸어주는 네 손등에 키스를 해야 했고 타이를 매주려 집중하고 있는 네 얼굴에 집요하게 내 숨을 묻어야 했다.
결국 출근하기 전까지 네 몸 이곳 저곳에 붉은 자국을 여러 개 만들고 나서야 아쉽다는 듯 집을 나서야 했고 진지하게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생각하지. 내 비서를 너로 바꿔버릴까. 하루 종일 붙어 다닐 수 있게.
퇴근하고 돌아오면 늘 고소한 향기를 풍기며 저녁을 만들어 놓던 너는 앞치마를 매고 귀엽게 내게 다녀왔어요 여보? 라며 장난을 치곤 했다. 내 가방을 받고 보고 싶었다며 내 얼굴에 하염없이 뽀뽀를 해준다. 하루 종일 뭐 했어, 라는 내 말에 책도 읽고 일도 나갔다 왔다고 종알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다 결국 밥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우리는 사랑을 속삭였다.
밥을 먹는 건지 내 건너편에 앉은 네 얼굴을 바라보는 건지 모를 저녁 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늘 소파에 앉아 영화 한 편을 틀어놓고 과일을 꺼내 둔 채 손을 잡고 앉았었다. 너와 저녁마다 함께 본 영화의 내용을 기억하는 건 아주 드물다. 1년을 통틀어 몇 편 되지 않을 정도로. 1주일 동안 같은 영화 한 편을 틀어놓아도 우리는 제대로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블라인드를 쳐 놔 아무에게도 방해 받을 리 없는 우리들의 공간에서 우리들은 하루 종일 떨어져 있던 것의 회포를 푸느라 바빴다.
그냥 내일부터 진심으로 회사 가지 말까. 진지하게 하는 내 말에 너는 언제나 미쳤다며 입을 비죽거렸다. 진짜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라고 덧붙이며. 너를 어떻게 사랑해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줘야 야금야금 맛있게 내 것으로 온통 흡수 해 버릴 수 있을까. 행복한 고민으로 지내던 나날들.
이미 네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이지만 네가 없으면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던 말. 거짓말 아니었는데. 너는 그 말을 늘 가볍게 넘기곤 했었어. 진심이었어. 단 한 톨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왜 이 세상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을까? 너무 아까워. 그 말로는 턱없이 부족해.
사랑한다,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내 언어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아 가슴을 치고 답답해 할 정도로 부족해.
“그냥 열어주세요.”
문 밖에서 무슨 소란을 피우던 나는 여전히 머릿속에서 너를 그리는 중이다. 이마에서부터 내려와 귀여웠던 콧날. 얇으면서도 늘 웃고 있고 끝이 도톰했던 입술. 웃을 때면 귀엽게도 휘어지던 반달 같던 눈. 네가 언제나 간지러움에 약했던 귓볼. 유난히 길고 가늘었던 목.
억지로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린다. 요란한 소리 뒤에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몸을 돌린다. 싫다고 했잖아,
내 집에 멋대로 침입한 인간들을 경멸하는 눈동자로 쳐다봤다. 누군데. 네가 뭔데.
“사장님.”
“민욱아….”
왜 나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지? 저 눈빛은 벌써 몇 번째나 받아 본 것이었다. 내 몸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는 이유로 우리들을 감싸고 있던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 남자… 차에 치인 저 여자 남편인가?’
‘어떡해. 부인이 저렇게 된 거야?’
왜 나를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나는 당신들의 동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당신들이 방금 까지 불쌍하게 바라봤던 피를 흘리며 도로변에 쓰러졌던 가냘픈 여자를 생사의 갈림길로 내몬 천하의 쓰레기가 바로 나야. 돌을 던지고 차라리 욕해. 왜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아? 왜 나를 그런 동정 어린 눈으로 쳐다봐?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 엠블런스에 함께 올라타던 내 뒤에 꽂히던 무수한 사람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 저 남자 어떻게 해….
차라리 내 손에 수갑을 채우고 나를 심문해. 왜 그녀를 죽였냐고. 그 편이 내 마음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고 슬퍼할 자격도 없는 새끼야. 사랑하는 여자를 죽였어. 내 손으로 죽음으로 내몰았어.
“나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봤다. 내 침대에 앉아, 여전히 아직은 그녀의 체취로 가득한 내 침대에 앉아. 우리 집에 더러운 공기 섞지 말고 꺼져버려.
“나가라고.”
내 말에도 그들은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또 저 눈빛이다. 나를 잔뜩 불쌍한 사람 취급하며 바라보는 저 눈빛. 가여워, 내가? 내가 왜 가여워? 가엽다는 표현으로도 차마 부를 수 없는 그녀는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가 혼자 있을텐데.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혼자 그 외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을 텐데. 아직 숨이 붙어있는 내가 뭐가 불쌍하다고 당신들은 그렇게 쳐다봐. 그 눈빛은 나에게 사치야.
“꺼지라는 말 안 들려?”
내 누나도, 나의 오래된 비서도, 나의 어머니도… 그리고 아버지도 그 누구도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전문인을 불러 억지로 대문을 따고 들어온 그들을 나는 힘으로 밀어냈다. 내 집에서 꺼져버리라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내 부모와 누이 그리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내 비서는 몇 일을 먹은 것 없이 굶어 힘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압력으로 그들을 밀어내는 내 힘에 밀려 현관까지 밀려나 주었다.
“현관 원상복구 시켜놓고 아무도 내 집에 들어오지 마.”
“민욱아.”
아버지의 음성이 차갑게 식어버린 대리석 위로 내려앉는다. 아직도 아버지는 제가 아버지에게 쩔쩔 매리라 생각하세요? 나는 다 잃었어요. 내가 살아가는 이유도 잃었고 동시에 나를 살아가게 만들어주던 원동력도 잃었고 그것보다 어마어마한 그녀를 잃었어.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싶은 게 인간의 이기심이라면 나는 당신을 제일 먼저 원망할거야.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그녀와 함께 미국에 갔겠지. 더 오래 머물다 왔을 거고 그녀와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당신 때문에.
한 번만 더 이기적으로 말하자면 이 모든 이유를 누군가에게 돌릴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아버지 당신에게 돌려버리고 싶다. 당신은… 아들을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 아들….”
어머니가 울며 내 얼굴을 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고 나는 차갑게 그 손목을 뿌리쳤다.
“아무랑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니까, 돌아가.”
그 말을 한 뒤 나는 문을 닫았다.
민서야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언제나 나는 너에게 약자였으니 지금도 답을 모르겠다. 대학 때 공부할 때처럼 해답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사업처럼 득과 실이 명확히 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너에게는 무엇이 옳고 그른건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한참이나 잘못된 사랑 방식으로 너를 사랑했나봐.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네 향기가 없으면 나는 잠을 못 자. 눈을 감으면 너와 함께 누워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여전한 네 향기 덕분에. 그런데 점점 그것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서글프다.
She’s gone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72건 있습니다.
확인하지 않은 음성 메시지가 39건 있습니다.
부재중 전화 187통.
휴대폰을 든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아마도 16일쯤 지난 것 같다. 신기하지. 이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가. 그 동안 신기하게도 누군가 우리 집에 와서 나를 괴롭힌 일은 없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나는 지금 그 상태였다. 나는 여전히 피가 진득하게 묻어있는 그때의 그 옷 차림 그대로였다. 흰색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 나는 그대로 집을 나왔다. 누군가 다시 대문을 고쳐놨다. 심하게 머리가 어지러워 중간 중간 현기증이 일었지만 상관 않고 걸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다. 민서야… 네가 왜 나를 살려두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 내가 할 일이 남아서야? 오빠가 뭘 해야 할까. 내가 뭘 해도 너한테 용서받지 못할 거라는 건 아는데 어떻게 해야 용서를 비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송파 파출소.
어둑어둑한 저녁 내 몰골 그대로 밖으로 나오자 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소리를 지른다. 징그러워요? 이젠 검붉은색으로 말라붙어버린 옷 차림으로 걸어 다니는 내가 징그러워? 이 피를 어떻게 물로 씻어서 없앨 수 있어. 이것은 그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그녀의 흔적인데. 내 손에도 온통 피가 그득하게 말라붙어 있다. 씻을 생각은 전혀 없다. 네가 준 건, 어떤 것이든 내게 소중하니까.
경찰들이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걸어간다. 아직 음주 운전을 해서 걸린 인간도 없을 시간이니 한산할지 모른다.
“…사람을 죽였는데.”
담담하다. 몹시도 담담해서 내 자신이 놀랄 정도다.
.
.
.
“그러니까 이 옷에 묻은 피는 뭐에요?”
나를 탐문하는 그는 왠 정신병자를 취조하듯 따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사람을 죽였다고 자수하는 살인자를 앉혀놓고 취하기엔 너무 여유롭다.
“그 여자는 16일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나온다니까요.”
“교통사고… 아닌데.”
“목격자들만 해도 몇 십 명입니다. 예?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애인 분 맞으시죠?”
그들은 서류를 뒤적거리며 내게 묻는다. 내가 죽였다는데.
“내가 죽인 겁니다.”
“그럼 버스 기사라도 됐다 이거에요?”
“버스에 뛰어들게 만든 건 나에요.”
“여자 혼자 실성한 것처럼 달리다가 버스에 치었다는데. 이 사건은 이미 그렇게 마무리 됐어요.”
“그 여자가 실성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나 때문에 그 버스로 뛰어 들어갔다고.”
내 눈빛에 얼마나 강렬한 분노가 스며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심문하는 사람이 이번에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우리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해 볼까요?”
나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따라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
“네.”
“애인이 죽었다는 것에서 오는 정신적인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지금 본인이 입고 있는 옷만 봐도 알 수 있죠.”
“사형이면 돼.”
“……….”
“가능하면 그 동안 처벌했던 사형들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해줬으면 하는데. 단순히 목 매달아 뒤지게 하는 거 말고. 더 잔혹한 방법이었으면 하는데.”
“이봐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으로… 서서히 죽여줬으면 하는데. 죄목은 많잖아.”
“일단 정신과 상담부터 받아 보는 걸 권할게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렇게 정신 잃고 신호가 빨간색인 것도 못 보고 달릴 만큼 실성하게 만들었다고. 이래도 내가 죄가 없어?”
“증거가 없잖아요.”
“…증거?”
“애인 보고 실성해서 달리다니…. 상식으론 납득이 안 가잖아요.”
“내가 상식 이하 새끼처럼 살아서 그렇지.”
나는 중얼거렸다. 취조실에서 끌려나다시피 나와 어느새 경찰서 앞에 와있는 가족들을 보며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내가 미성년자도 아니고 소년원에 잡혀가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사람 죽였다고 자수하러 온 건데 다들 오히려 나를 불쌍한 새끼 취급이나 하네.
피 묻은 내 옷을 보고도 오히려 불쌍한 것처럼 흘끗거린다.
“민욱아….”
어머니가 잡아주는 손을 뿌리치고는 나는 앞장서 걸었다. 그러다 누나가 달려와 내 앞을 막는 것에 차갑게 식어버린 눈으로 누나를 쳐다봤다. 지금 내 눈엔 가족도 안 들어와, 그러니까 비켜.
“민욱아 딱 한 시간만. 아니 삼 십 분만. 아니 오 분만. 부모님 밥도 못 드시고 네 걱정만 하셔….”
“밥도 못 먹어? 지금 그딴 게 중요해?
“민욱아… 네가 이런다고 민서가 좋아할 것 같아?”
그 말에 결국 가슴에서 통증이 시작된다. 내가 어떻게 해야
어머니가 울며 나를 안고는 제발 집으로 돌아가자며 사정한다. 누나도 울며 내 팔목을 잡아 끌었고 오로지 내 아버지만이 그런 나를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어떡하나 그 대단한 당신 아들이 살인자라고 자수하러 경찰서에까지 들락거렸으니. 이제 당신 얼굴에 재대로 된 스크레치를 남긴 내가 얼마나 죽이고싶을까. 그래 사형수가 되는 것 보다 아버지 손에 죽는 게 오히려 빠를지도 모르겠네.
아버지 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은 아버지가 했고 어머니는 내 옆자리에, 누나도 내 옆쪽에 앉아 나를 붙잡고 울기만 한다. 왜 울지. 당신 아들이 폐인처럼 사는 것에 가슴이 아파서 울까. 나는 민서 부모님에게서 딸을 앗아간 죄인인데. 이 눈물, 내 앞에서 흘릴 게 아니라 민서 부모님께 가서 흘려야 해. 짐승만도 못한 아들 가진 걸 사죄하겠다고.
여전히 대저택인 본가에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흉측할만도 한 내 옷에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벗으라고 해서 벗을 생각도 전혀 없다. 옷에서 피비린내가 나고 있었지만 이것 또한
“민서한테 얘기 들었겠지만 그 미국에 있는 집으로는 네 마음 추스르고 더 나중에 가도록 해.”
어머니의 말에 그제서야 내가 반응을 보였다.
“미…국?”
“민서한테 얘기 못 들었니?”
아니겠지. 설마…. 아닐거야.
“너 출장 간 동안 나랑 민재가 민서 찾아갔었어. 미국에 집 알아봐놨다고. 아버지 그늘에서 조금만 벗어나 있으라고… 너 출장 갔다 오면 바로 말 하라고 했는데. 너 출장 다녀온 다음 날 민서 그렇게 됐으니 얘기 못 들었을 수도 있겠구나….”
“……보스턴 근처에 있던 그 작은 집…?”
“들었니? 민서한테?”
먹지도 못해 온 몸이 오슬오슬 떨리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더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본가에서 나오면서 미친놈처럼 웃었다.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오면 울거나 웃거나 둘 중 하나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눈물도 흐르질 않는다.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었던 그 비행기 티켓과 미국의 집 주수와 서류들이 모두 우리가 함께 살 곳이었어.
“운전해서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아버지의 기사를 밀쳐내고 집에 남는 차 한대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반쯤 나간 정신으로 하는 운전이 위험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진다. 결국
민서야 나 용서하지 마.
너 없는 세상에서 잔인하게 벌 받느니 너와 같은 곳으로 갈게. 얼마나 아팠어. 그 거대한 차가 너를 공중으로 내던졌을 때 얼마나 아팠어. 많이 아팠지. 오빠가 아직 그게 얼마나 아픈건지 잘 모르겠어. 미안해 민서야.
너와 같은 방법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네가 느낀 고통 그대로를 느끼고 싶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있는 이 무거운 짐 덩어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앞에서 조금이라도 고개 들 수 있도록.
시내까지 운전을 가까스로 해서 나왔다. 복잡한 도로변에 차를 멈춰 세우고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내 옷에 묻은 피 때문이겠지. 나는 기다렸다. 신호를 기다리는 게 아니야. 아, 이제 됐다. 사거리의 복잡한 신호들을 나는 그대로 지켜봤다. 저 멀리쯤 많은 사람들을 실은 버스가 오고 있다. 멀리 떨어진 정거장에서 잠시 멈춰 사람들을 태우고 다시 출발한다. 조금만 더 가속이 붙어라. 신호는 여전히 빨간색이다. 모두가 멈춰있었고 내 반경엔 아무도 없다. 모두들 내가 두려워 피해있겠지.
민서야… 네가 보고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도 없는 건 싫어. 싫다고 했잖아. 영원히 함께 하자던 약속 난 잊지 않았어. 내가 완성시킬게. 민서야, 기다려. 오빠 곧 갈게.
허공을 가르는 머리칼 사이로 겨울 바람이 파고든다. 차가워. 민서야 기다려. 오빠 곧 갈 테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기다려. 금방 갈게.
“위험해요!!!”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버스가 급정거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은 순간 아스팔트와 바퀴가 빚은 거대한 마찰음. 물체와 버스의 파열음. 버스 앞 유리는 금세 붉은 것으로 물들고야 만다. 힘 없이 팔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웃었다. 진심으로. 너를 따라갈 수 있게 된 것이 기뻐서. 이제 곧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사람은 죽기 직전 자신이 살아간 인생이 스쳐 지나간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기회가 와 기뻤다. 그런데 내 모든 인생이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다만…
그리고 그녀가 걸어온다. 웃고 있다. 민서야, 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애워싸지만 조금 뒤에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민서가 웃고 있다. 수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웃고 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고운 모습으로. 민서야… 내 입술이 너를 애타게 부르지만 너는 사람들에 섞여 자꾸만 보이질 않는다. 이리 와… 너무 추워. 뜨거운 것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간다. 허리를 움직이지도 못할 무거운 통증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다행히 내 오른 팔은 허공에 휘저을 수 있게 통증에서 열외되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짓한다.
사랑하는 민서야, 결국 다시 만나게 됐어. 다시 만나게 된 네 얼굴이 우는 얼굴이 아니라 다행이야. 웃고 있어서 예쁘다. 넌 웃는 게 가장 어울려. 너를 다시 만나게 되면 해주고 싶은 말은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아니다. 단 하나, 그저 사랑한다는 말 뿐이다. 오늘도 그 말을 못 해 내 눈에 눈물이 고였었는데. 이젠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page 2 편도 끝났네요.
조금 긴 page 3편으로 찾아오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민서의 죽음에 슬퍼하셨고
민욱이까지의 죽음에 슬퍼하셨겠지만
이 소설은 어쩌면 결말에 더 집중해서 쓰고있는 소설인지라.
곧 찾아올게요.
업쪽=she's gone
(제가 깜빡하고 지난 편에 업쪽을 안 달아놔서.. 업쪽이라고 제가 혹시 깜빡해도 여러분들이 댓글에 원해주신다고 쓰면 보내드려요. 자꾸 밀리는 연재 텀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제가 집중한 건 민서의 죽음, 민욱이가 민서를 따라가려고 하는 행위같은 건 아니었어요.
제가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서로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이들을 그려내보고 싶었어요.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같이 몰입을 해 주시길 바라면서.
page 3으로 돌아올게요.
어떻게 써도 마음에 차지 않는 이번 편 때문에 업데이트가 조금 늦었네요.
여러번의 거듭 수정을 하고 나서야 올리게 됐구요.
제 팬 카페에 가입하고 싶으신 분들은 댓글에 남겨주시면 쪽지로 보내드릴게요.
thanks to
초보마법사 헐허래 ♡희야쨩♡ subin gusjun14 흉가 Ej18 똥쉬똥쉬 버스커 버스커 소 얀 -_-어리버리겅쥬
늘 힘을 내고 있어요. 코멘트들 보면서. 직접 제 예전 소설들 목록까지 뒤져내서 팬카페에 가입해 주시는 분들도 감사하단 말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첫댓글 she's gone/어떻게요ㅠㅠ둘다 죽었어요ㅠㅠ
ㅜ.ㅜ 재미있어요 어쩜이리슬플꼬...ㅠㅠㅠㅠ
너무슬퍼요ㅠㅠㅠㅠ빨리 다음편이나왔으면좋겠어요^^
she's gone 민욱이마저,, ㅠ .ㅠ 둘다 행복하길 바랬는데 꺼이꺼이꺼이
슬프지만재미있어요ㅠㅠㅠㅠ
작가님 소설 진짜 너무 좋아요ㅠㅠ 다음편도 기대할께요ㅠㅠㅠ
she's gone 이번 편은 읽으면 읽을 수 록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강렬했어여 ㅠㅠ 이 세상에 없는 민서를 잊을 수 없어서 계속 폐인처럼 살아가는 민욱이.. 결국 민서 처럼 죽다니...ㅠㅠ 작가님 전 작가님의 처음 작품처럼 달달한 소설이 좋았는데.. 이번에는 너무 가슴이 아파여 ㅠㅠ 그래도 반전이 있다니까..... 기다리고 있을게여~
헝헝 눈물나ㅜ
she's gone. 이전편까지 다 읽고왔어요~_~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ㅋㅋㅋ 왔는데 작가님 닉넴이 뙇!!!! 완전 놀라고 좋고ㅎㅎㅎ 전편부터 쫘아아아아악 보고 왔습니다ㅎㅎㅎ 이번 소설도 최고! 제가 어떤 작가의 글을 고집해서 보지는 않는데 작가님은 진짜 팬할래요ㅠㅠ
오랜만에와서밀린거다봤는데넘넘슬프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