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gwan
엄마가 우리 옆집에 살던 이웃을 데리고 사회복지 기관을 찾아갔던 일이 기억난다. 나이가 많이 든 그 이웃 여성은 손녀를 기르면서 복지 수당을 신청했지만 지급을 거부당했다.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절차, 복잡한 형식의 서류 작성, 절대 맞출 수 없는 마감일 같은 것에 막혀 복지 수당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영화 〈마호가니〉의 다이애나 로스처럼 차려입는 것을 지켜봤다. 엄마는 캐멀색 케이프와 슬랙스를 갖춰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었다. 나는 외동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우리 엄마의 시간을 이웃집 아이에게 뺏기는 것 때문에 약간 짜증이 났다. 아마 그래서 왜 우리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 같다. 위대한 비비언은 진주 귀걸이를 차면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고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비록 한나절이 꼬박 걸렸지만 우리 엄마의 점잖은 흑인 연기 — 영국 여왕처럼 품위 있는 표준 영어, 영화 〈마호가니〉 풍의 멋진 의상, 스트레이트파마를 해서 단발로 자른 헤어스타일, 진주 귀걸이 — 덕분에 이웃집 할머니가 1년이 넘도록 해내지 못한 일이 단 몇 시간 만에 성공적으로 해결됐다.
엄마를 보면서 나는 이 사회의 문지기들에게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즉 옷을 잘 입고, 말을 잘해야 했다. 물론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사실, 효과가 없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효과가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시도는 해봐야 한다. 불공평한 일이지만, 위대한 비비언이 늘 말했듯이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 꼬마야.”
나는 우리 엄마가 캐멀색 케이프나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얼마에 샀는지 모르지만, 그런 투자로 측정하기 어려운 수익을 거뒀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회복지 기관의 직원이 자기 앞에 선 여자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여자들과는 다르게 무시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쳐다보는 그 표정, 그리고 서류를 작성하면서 물어봐야 하는지도 몰랐던 정보를 미리 알아서 가르쳐주는 태도의 변화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아이의 엄마가 자기 아이를 위해서라면 관료 시스템의 권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중산층 부모라는 사회적 신호를 보내서 교장으로 하여금 아이에 대한 판단을 더 신중하게 내리도록 만드는 것을 소비자 가격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나는 가난한 우리 가족이 사회조직과 관계를 맺고 문지기들을 설득하기 위해 보내야 하는 사회적 신호에 얼마의 비용을 투자하는지 모르고 성장했다. 그러나 우리 엄마의 투자가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를 보여주는 산 증거가 바로 나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지위 상징status symbol*을 사기 위해 멍청하고 비논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최고로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득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이와 비슷한 선택을 하리라고 짐작된다. 우리는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한다. 그저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취업이냐 실업이냐, 나쁜 일자리냐 좋은 일자리냐, 혹은 집이냐 노숙자 쉼터냐 등의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도 K마트에서 살 수 있는 저렴한 옷만으로도 단정한 복장은 갖출 수 있다는 글을 트위터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정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아파트 단지의 관리인은 내가 몰던 소형 니산 자동차가 깨끗한 것을 보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봤다고 누누이 말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존스뉴욕 브랜드 정장을 입고 간 것도 합격에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면접관은 그 정장이 어느 브랜드인지 한눈에 알아봤고, 면접 중 그 브랜드에 대해 내게 질문까지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으로 취업 면접을 하러 갔을 때 채용 담당자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내 차림새를 살폈다. 나중에 그녀는 그때 내가 콜센터에서 일하기에는 용모가 너무 세련돼 보였다고 털어놨다. 그리하여 나는 콜센터에서 일하는 대신 콜센터 직원들을 훈련하는 일을 맡았고, 그 덕에 야간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더 나은 직급과 월급을 보장받았으며, 이직 후에도 초봉을 더 높게 책정받을 수 있었다.
비슷한 경험담이 대여섯 가지는 더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아니다. 여성과 유색인종에게는 백인 남성에게 적용되는 것과 다른 외모 기준이 더 엄격하고 더 가차 없이 적용된다는 실증적 증거들은 이미 차고 넘친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 문지기들이 왜 내가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는지를 자기들 나름의 방법으로 내게 알려줬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내가 전형적인 흑인 혹은 전형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신호를 그들에게 어떻게 적절하게 보냈는지를 알려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흑인이라는 정체성 더하기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거의 항상 가난하다는 정체성과 동일시되는데, 내가 보내는 신호는 내가 그렇지 않다는 정보를 담고 있었다.
시크 THICK | 트레시 맥밀런 코텀 저/김희정 역
첫댓글 헐 나 이거 안그래도 이번에 사려고 장바구니 넣어놨는데! 생각난김에 사로가야지
효과가 있으니까 하는 거지…라는 내용이네 흥미롭다. 인간은 생존에 최적화되있어서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행동함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어
읽어봐야겠다
글에선 하층민의 결핍이나 허영을 말하는게 아니고.. 흑인+여성으로서 무시당하지 않기위한 생존수단으로 좋은 옷을 입었다고 얘기하고 있음. 사회복지기관 직원, 교장, 면접관, 심지어 아파트관리인까지 옷차림을 눈여겨보고 '괜찮은 사람'인지 판단을 한다는거지.
사야겟다
본문 뭔가 새삼 충격적이다...... 흑인들 왜그렇게 피해의식? 같은걸 가지고 사는지 한번에 이해됨ㅠㅠ 여자로서 공감도 되고
공감.. 행색 진짜 중요함...
나부터도 차림새로 사람 판단하게 되는데..
너무 슬픔......
글 고마워ㅠㅠ
슬프지만 사회에선 이런 시그널이 먹힌다는게 너무 슬픔 읽어볼만한 책인 거 같다 ㅋㅋㅋ 책 추천 고마워!
갑자기 울 엄마가 어렸을때 나랑 내 동생 옷은 전부 브랜드옷만 사 입혔던게 생각나네 ㅜㅜ 나중에 한번 스쳐가며 엄마가 말한 적 잇거든...나는 너희 시장옷 입혀서 안 키웟다고 ㅜㅜ
넘 흥미돋이다 책 읽어볼래
와..
한국도 똑같은 것 같음... 나도 아는 언니한테 비싼 브랜드 가방 선물받았는데 그것만으로도 면접때 보는 시선이 달라졋어... 중소도 이럴진대 대기업 공기업은... ㅠ
슬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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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과시는 결핍 그 얘기인 줄.. 여시가 댓으로 정리해준 걸 보니까 통찰력이 있다! 글 읽고 이 댓에서 생각할 거리도 얻어감
유색인종+여성에 더 엄격한 기준...
넘 흥미돋이야. 책도 꼭 봐야겠어!!
슬프다…
흥미롭다..
읽어봐야지
슬프지만 사실이지.. 다들 누울자리 보고 뻗으니가
흥미돋,, 책 읽어보고 싶다
맞아 상황에 따라 옷입는것도 기술이지 겉모습이 다가 아니라고 해도 가장 먼저 보이는건 겉모습 이니까
맞음 정말로 맞아
어릴때는 몰랐는데 30대 들어가니 진심 공감
겉모습을 단정히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그에 맞는 애티튜드도 중요함
좋은 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