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 night has come and the land is dark
and the moon is the only light we'll see.
밤이 찾아와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우리에게 보이는 건 오직 달빛뿐일 때라도
No I won't be afraid,
No I won't be afraid just a long as you stand,
stand by me
나는 두렵지 않아요
나는 두렵지 않아요 당신이 내 곁에,
내 곁에 있는 한
Darling, darling stand by me,
stand by me,
tand by me stand by me, stand by me
사랑하는 그대가 내 곁에 있는 한
오, 내 곁에 있어줘요
If the sky that we look upon
should tumble and fall and the mountain
should crumble in to the sea
I won't cry I won't cry,
아 내 곁에, 내 곁에 있어줘요, 내 곁에 있어 줘요
하늘이 무너져 쏟아 내리고
산이 바다로 부서져 버린대도
나는 울지 않을 거에요, 절대로 울지 않을 거랍니다
No I won't shed a tear just as long as you stand
Stand by me
Darling darling, stand by me, stand by me,
절대 눈물 흘리지 않을 거에요
당신이 내 곁에, 내 곁에 있는 한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내 곁에 있어줘요
stand by me, stand by me, stand by me.
Whenever you're in troubled just stand by me
oh stand by me
오 내 곁에
내 곁에 있어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이 곤경에 빠질 때라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겠지요
아, 내 곁에 있어 줘요,
내 곁에, 내 곁에 있어 주겠지요. 내 곁에 있어 줘요
Cassius Clay (Muhammad Ali)
그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Cassius Marcellus Clay, Jr.)’였다.
그는 그 이름으로 만 18세 때인
1960년 런던 올림픽에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64년에는 프로 선수로 “나비처럼 날라가 벌처럼 쏘겠다.’면서
당시 WBA-WBC 통함 챔피언이었던 소니 리스턴을
쓰러뜨리고 세계 프로복싱의 왕자가 됐다.
무하마드 알리로 이름을 바꾼 것은 챔피언 등극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본명 캐시어스 클레이가 흑인노예의 이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흑인으로서의 종족적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었고
그 때까지 흑백차별이 강고하게 남아있던
미국사회에 대한 상징적 저항의 표현이었다.
그 무렵 그는 베트남전 참전을 강제하는 징집영장이 발부되자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며
병역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한때 챔피언자격 박탈의 위기를 겪었고
3년 여 동안 선수생활도 접어야 했다.
물론 병역 거부이유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자기 신념에 투철했다는 사실이다.
세계정상의 프로 권투 선수로서 향유하는
명성과 부를 한 때나마 포기한 것이다.
신념의 실천을 위한 용기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다.실제로 그는 이런 名言을 남겼다.
“당신들이 되라는 사람이 되지 않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자유가 있다.”
(I don't have to be what you want me to be. I'm free to be what I want.)
그는 오랫동안 파킨스병으로 고생해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도
1994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 성화의 최종 점화자로 뛰었다.
그것이 ‘전설’로서의 복싱 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감동적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22년만에 그는 세계인의 애도 속에 영영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안타까운 일이군요
잘 듣고 보고 갑니다.
나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