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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심투(日以心鬪)
마음은 날마다 다툼질이라는 뜻으로, 인간은 매일 각각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혹은 다른 사람과 또는 자신의 욕망과 싸우고 있다. 사람 마음은 이와 같이 천박한 것이다.
日 : 날마다 일(日/0)
以 : 써 이(人/3)
心 : 마음 심(心/0)
鬪 : 다툴 투(鬥/10)
출전 : 장자(莊子) 내편(內編) 제물론편(齊物論篇)
성인이 흐리멍덩해 보이는 것은 감각이나 지각에 기대고 있지 않아서다. 그는 자신의 온몸에 퍼져 있는 정기와 신기로써 사물을 받아들이고 현상을 느낀다.
그리하여 눈에 안 보이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 희미하고 미묘하기 그지없는 것,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느낀다.
말을 쉽게 내뱉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도, 엉거주춤하고 우물쭈물하는 듯이 행동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확신만큼 위태로운 것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은커녕 현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이른바 지식인은 자기 감각과 지각을 지나치게 믿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확신을 낙인처럼 지니고 살며, 제 판단과 주장을 조자룡 헌 창 쓰듯이 마구 쓴다.
그런 지식인이 하는 꼴이란 게 꼭 이렇다. '큰 지혜는 느긋한데, 잗단 지혜는 좀스럽지. 크낙한 말은 담박한데, 잗단 말은 따따부따하지. 흔히 지식인은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깼을 때는 감각과 지각을 쓰느라 바쁘다네. 접하는 것마다 말썽 일으키고, 마음은 날마다 다툼질이라. 질질 끄는 자, 엉큼한 자, 좀생이. 조금 두려우면 기가 죽고, 크게 두려우면 정신 못 차리지.'
범부는 고작 자신을 위태롭게 하지만, 잘난 지식인은 그 알량한 지식으로 남들까지 위태롭게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을 혼란케 하고 피바람을 일으킨 게 지식인 아니던가?
장자는 이어 말했다. '시비가 일면 쇠뇌살이나 화살 쏘듯 말을 해댄다. 끝끝내 이기려는 것을 보면, 하늘에 한 맹세를 지키려는 듯 끈덕지다. 날로 이우는 것을 보면, 가을 겨울에 초목이 시드는 것과 같다. 물에 빠진 듯 허우적대는 그 꼴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다. 늙어서도 욕심부리는 꼴은 억눌려 꽉 막힌 듯하고, 죽음에 가까워진 그 마음은 되살릴 길이 없다.'
莊子(內篇) 第2篇 齊物論 2
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 2–1
마음이 부리는 온갖 조화(日以心鬪)
大知閑閑, 小知閒閒.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너그럽고 여유 있지만, 작은 지혜를 가진 사람은 매사에 안절부절 갈피를 잡지 못하며 남의 눈치만 본다.
大言炎炎, 小言詹詹.
위대한 말은 담담하지만 하찮은 말은 수다스럽다.
其寐也魂交, 其覺也形開.
잠이 들면 혼백이 꿈을 꾸고, 깨어나면 육신이 활동을 시작한다.
與接爲搆, 日以心鬪.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여 교섭함으로써 마음은 날마다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縵者, 窖者, 密者.
그런 가운데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도 있고, 우울한 사람도 있고, 꼼꼼한 사람도 있다.
小恐惴惴, 大恐縵縵.
작은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흠칫 놀라게 하나, 큰 두려움은 오히려 멍청해지게 한다.
其發若機栝, 其司是非之謂也.
쇠뇌의 줄을 퉁기듯 튀어나온다는 말은 사람들이 시비를 가릴 때의 행동을 알맞게 표현한 말이다.
其留如詛盟, 其守勝之謂也.
신에게 맹세한 것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람들이 자기 입장을 끝까지 지켜 남을 이기려하는 것을 잘 표현한 말이다.
其殺若秋冬, 以言其日消也.
가을이나 겨울처럼 쇠잔해진다는 말은 사람들이 날로 쇠약하고 있음을 잘 표현한 것이다.
其溺之所爲之, 不可使復之也.
그들은 이렇게 하는 일에 자꾸만 빠져 들어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其厭也緘, 以言其老洫也.
그들이 늙고 쇠락하게 되는 것은 욕망에 억눌리어 앞뒤로 꽉 막히게 되기 때문이다.
近死之心, 莫使復陽也.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의 마음은 다시 소생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喜怒哀樂, 慮嘆變慹, 姚佚啓態,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근심, 탄식, 변덕, 두려움. 경솔함, 나태함, 욕심부림, 음란함 등의 마음작용은,
樂出虛 蒸成菌, 日夜相代乎前, 而莫知其所萌.
음악이 빈 구멍에서 나오듯, 땅의 기운이 응집해야 버섯이 돋아나듯, 밤낮으로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지 알 수 없다.
已乎, 已乎. 旦暮得此, 其所由以生乎.
아서라! 말아라! 아침저녁으로 이런 마음작용을 하고 있으니 그 말미암은 바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飜譯
큰 앎은 너그럽고 여유 있지만, 작은 앎은 낱낱이 따지려고 한다. 큰 말은 담담하지만,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우리는 잠을 잘 때도 혼이 활동하는 꿈을 꾸며, 깨어 있을 때는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외부와 접촉하여 경험에 의한 마음의 틀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 틀에 의하여 날마다 마음은 다투게 된다.
너그러워지거나, 심각해지거나, 세밀해지거나 하면서 작은 두려움에 마음을 졸이고, 큰 두려움에는 오히려 여유만만 하기도 한다. 화살이 쏘아지듯 마음을 불쑥 쏟아내는 것은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함이고, 맹세하듯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는 것은 승리를 지키고자 함이다.
가을과 겨울처럼 마음의 쇠락함을 보이는 것은 나날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말하니, 한 곳에 빠져 나타난 행동은 다시 돌이키게 할 수 없다. 마음을 꿰맨 듯 닫아버리는 것은 늙어서 욕심이 넘치는 것을 말함이니, 죽음에 가까이 간 마음은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없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근심, 탄식, 변덕, 두려움. 경솔함, 나태함, 욕심부림, 음란함 등의 마음작용은 음악이 빈 구멍에서 나오듯, 땅의 기운이 응집해야 버섯이 돋아나듯 밤낮으로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지 알 수 없다. 아서라! 말아라! 아침 저녁으로 이런 마음작용을 하고 있으니 그 말미암은 바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紬繹
사람의 소리(人籟), 땅의 소리(地籟) 그리고 하늘의 소리(天籟)로 제물론(齊物論)을 시작한 장자(莊子)가 인간의 마음작용에 대하여 분석을 시작한다. '큰 앎은 너그럽고 여유 있지만, 작은 앎은 낱낱이 따지려고 한다. 큰 말은 담담하지만, 작은 말은 수다스럽다.'
큰 앎(大知)은 마음(관념)과 자아(自我)가 적은 상태를 말하고, 데이빗 호킨스의 의식지도에서 의식수준이 높은 상태를 말한다. 마음(mana), 지성(buddhi), 치타(chitta), 에고(ahankara)는 모두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교만함에 물들어 자기를 최고로 여길 때, 그 마음은 에고로 나타난다. 에고는 마음의 양식 중 하나다. 마음이 '이 세상에서 내가 최고다! 누구든지 내 앞에 서면 별볼일 없는 인물이다' 하고 말하면 그 마음은 에고다.
반면, 마음이 곰곰이 심사 숙고할 때 그 마음은 지성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무 방향 감각도 없이 우왕좌왕할 때, 어디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리저리 헤맬 때 그 마음은 치타라고 불린다. 지성은 방향 감각을 가진 마음이다.
과학자가 실험실에 앉아서 원자 분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그 마음이 지성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무 목적 없이 젖어 있을 때, 백만장자나 대통령이 되는 망상에 젖어 있을 때 그 마음은 치타다. 이때 그 마음은 마구잡이로 물결칠 뿐, 질서도 없고 조직적이지도 않다.
반면, 마음이 질서정연한 생각의 체계를 따라 움직이면 그 마음은 지성이다. 이렇게 마음의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마음이다. 따라서 큰 앎(大知)은 마음이 지성(buddhi)의 상태에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마음은 너그럽고 여유가 있다.
반면에 작은 앎(小知)은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많은 상태를 말하고, 데이빗 호킨스의 의식지도에서 의식수준이 낮은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치타(chitta)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마음은 낱낱이 따지려고 한다.
큰 말(大言)은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적은 상태를 말하고, 데이빗 호킨스의 의식지도에서 의식수준이 높은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큰 말(大言)은 마음이 지성(buddhi)의 상태에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의 말은 아주 담담하다.
반면에 작은 말(小言)은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많은 상태를 말하고, 데이빗 호킨스의 의식지도에서 의식수준이 낮은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작은 말(小言)은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치타(chitta)의 상태에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의 말은 아주 아주 수다스럽다. 그리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즉 道를 체득하면 모든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사라진다. 그 상태에서는 마음도 없고, 말도 없다. 말이 있어도 한 치의 모순도 없다.
‘우리는 잠을 잘 때도 혼이 활동하는 꿈을 꾸며, 깨어 있을 때는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외부와 접촉하여 경험에 의한 마음의 틀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 틀에 의하여 날마다 마음은 다투게 된다.’
우리는 육경(六境) 즉 눈(眼), 귀(耳), 코(鼻), 입(口), 피부(觸覺) 및 기억(識)을 통하여 외부세계와 접한다. 우리가 잠을 잘 때는 눈(眼), 귀(耳), 코(鼻), 입(口), 피부(觸覺)의 오경(五境)은 막히게 되고, 육경(六境)의 하나인 기억(識)에 있는 내용이 우리 머리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외가 활동하는 것을 꿈이라고 하며, 우리가 깨어있을 때에는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경(六境) 즉 눈(眼), 귀(耳), 코(鼻), 입(口), 피부(觸覺) 및 기억(識)을 모두 열어놓고 외부와 접촉하고 이에 반응하며 그 경험한 결과가 다시 기억(識)에 쌓여 마음의 틀인 관념(觀念)을 만들게 된다.
그 관념(觀念)은 우리가 살면서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우리 스스로가 형성한 마음의 틀, 즉 관념(觀念)이 만들어지면 다시 육경(六境) 즉 눈(眼), 귀(耳), 코(鼻), 입(口), 피부(觸覺) 및 기억(識)을 통하여 우리의 뇌 속으로 들어온 외부정보에 대하여 날마다 마음은 다투게 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만든 관념(觀念)이 없다면 육경(六境) 즉 눈(眼), 귀(耳), 코(鼻), 입(口), 피부(觸覺) 및 기억(識)을 통하여 우리 뇌 속으로 들어온 외부정보에 대하여 반응, 또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의 관념(觀念)으로 보지 않고, 또는 우리 자신의 마음으로 보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바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상태이고, 道를 체득한 상태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전 莊子가 인간에 마음에 대하여 이처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너그러워지거나, 심각해지거나, 세밀해지거나 하면서 작은 두려움에 마음을 졸이고, 큰 두려움에는 오히려 여유만만 하기도 한다.’
육경(六境) 즉 눈(眼), 귀(耳), 코(鼻), 입(口), 피부(觸覺) 및 기억(識)을 통하여 우리 머리 속에 들어온 외부정보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관념)이 반응하여 나타나는 우리의 감정 상태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보거나 들었을 때 우리 스스로가 형성한 마음(관념)을 기준으로 우리 자신이 너그러워지거나, 심각해지거나 또는 세밀해진다는 말이다.
분노나 두려움도 하나의 마음(관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분노나 두려움이라는 마음(관념)이 없다면 육경(六境) 즉 눈(眼), 귀(耳), 코(鼻), 입(口), 피부(觸覺) 및 기억(識)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온 그 어떤 외부정보에 대하여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나에게 심한 욕을 했을 때 나에게 분노라고 하는 마음(관념)이 없다면 나는 전혀 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에게 심한 욕을 한 사람을 아무런 감정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그럴 때 나에게 심한 욕을 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에게 심한 욕을 한 사람에게 내가 분노로써 대응하게 되면 本質은 사라지고 마음(관념)과 마음(관념)이 서로 부딪히는 형국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내가 분노를 비롯한 그 어떤 마음(관념)도 없이 대응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상대방의 마음(관념)이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심술(讀心術), 즉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나에게 그 어떤 마음(관념)이 없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어떤 때는 작은 두려움에 마음을 졸이고, 어떤 때는 큰 두려움에 오히려 여유만만 하기도 한다.
작은 두려움에 마음을 졸이는 경우는 우리 자신의 마음(관념)에 의하여 우리가 마음을 졸이는 감정상태에 빠지는 것이고, 큰 두려움을 만나는 경우에 그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면 우리는 포기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관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오히려 여유만만 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쌓아온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우리의 마음을 졸이기도 하고, 여유만만 해지기도 하는 감정의 상태에 빠트린다. 우리의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없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하다.
그것을 무아지경(無我之境), 삼매(三昧) 또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莊子의 심리학 분석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화살이 쏘아지듯 마음을 불쑥 쏟아내는 것은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함이고, 맹세하듯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는 것은 승리를 지키고자 함이다. 가을과 겨울처럼 마음의 쇠락함을 보이는 것은 나날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말하니, 한 곳에 빠져 나타난 행동은 다시 돌이키게 할 수 없다. 마음을 꿰맨 듯 닫아버리는 것은 늙어서 욕심이 넘치는 것을 말함이니, 죽음에 가까이 간 마음은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가치관이라는 우리의 마음(관념)과 自我(ego)이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화살이 쏘아지듯 마음을 불쑥불쑥 쏟아낸다. 자신이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조금의 양보도 없으니 是是非非를 가리는 작은 언쟁이 결국 큰 싸움으로까지 번지고 만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 즉 가치관이라는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없다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게 된다.
맹세하듯 마음을 고집스럽게 하는 것도 남을 이기고자 하는 욕심의 발로(發露)이다. 남을 이겨서 좋을 것이 하나 없는데 남을 이기겠다고 죽자고 덤빈다. 그러나 그러한 욕심이라는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없다면 남을 이기겠다는 마음이 사라진다.
세상에 싸움을 제일 잘하는 사람은 죽기살기로 덤비는 사람이겠지만, 그보다도 더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싸우겠다는 마음이 사라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싸움이 시작되지를 않는다. 결국 싸움을 거는 사람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뿐이다.
그렇게 화살이 쏘아지듯 하고 맹세하듯 고집스러운 마음도 세월이 지나 늙어서 몸의 기력이 떨어지면 쇠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관념)과 自我(ego)를 버리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그때는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둔 상태이다. 자신의 목숨이 다했음을 알았는데 더 이상 무슨 욕심이 있을 것이고, 是是非非를 따지는 가치관이 있겠는가?
예수와 붓다가 인간에게 그렇게 강조한 ‘깨달음’을 얻었지만 더 이상 살지를 못하고 바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젊은 나이에 빨리 깨달음을 얻어서 남은 여생을 天國의 삶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들은 평생을 고통뿐인 地獄의 삶을 살다가 불과 단 하루만을 天國의 삶을 살다가 죽고 만다.
是是非非를 가리겠다고 또는 이기겠다고 죽기살기로 덤벼서 자신이 처하게 되는 상황은 다시 돌이키게 할 수가 없다. 한 순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평생을 감옥에 갇혀 살거나, 평생을 남과 등을 지고 사는 사람 또한 부지기수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온통 자유와 평화뿐인 삶을 제 스스로가 속박하여 자신을 피폐시키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우리의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그렇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쌓아온 마음(관념)과 自我(ego)를 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온통 자유와 평화의 삶을 살 터인데 그렇게 하지를 못하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온통 속박과 고통의 삶을 산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우리의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그렇게 만들 뿐이다. 마음을 꿰맨 듯 닫아버리는 것은 늙어서 욕심이 넘치는 것을 말함이다. 욕심 때문에 닫혀진 마음은 좀처럼 풀려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과 세상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자신의 욕심으로 마음을 닫고 모든 사람들과 세상 만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살고 있다.
거기에 자존심이라는 마음이 없으면 마음을 여는 작업을 시도해볼 터인데 그깟 알량한 자존심에 마음을 열지를 못한다. 이렇듯 온통 모순투성이인 삶을 사는 것이 이리 인간들이다. 그리고 태어나서 단 한번도 참다운 삶(自我(ego)의 삶이 아니라 참나(眞我, 靈我)의 삶)을 살지 못하고 모순과 고통의 삶을 살다가 죽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莊子는 인간의 마음을 열두 가지로 표현한다.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근심(慮) 탄식(嘆) 변화(變) 두려움(慹) 그리고 경솔함(姚) 나태함(佚) 욕심부림(啓) 음란함(態)이 그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표출되기 위하여는 특정한 상황이 특정한 감정으로 이어지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기준을 마음(관념)과 自我(ego)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TV에서 코미디 프로를 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박장대소로 웃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즐거움(樂)이라는 감정으로 이어지는 기준, 즉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두 사람이 서로 다르기에 한 사람은 큰 웃음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은 아무런 웃음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감정이 표현되지 않은 인간의 本質을 性이라고 하고, 인간의 감정이 표출되는 것을 情이라고 한다.
中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기쁨, 노여움, 슬픔 그리고 즐거움이 아직 드러나지 않음 그것을 中이라 하고, 드러나되 모두 中과 절조를 이루는 것을 어울림(和)이라 한다.
中이란 것은 온 세상의 가장 근본이고, 어울림(和)이라는 것은 온 세상의 道를 체득한 것이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여기서 中은 인간의 本質인 性을 말하는 것이고, 외부조건에 의하여 喜怒哀樂이라는 情이 표출되지만 中으로 이를 다스려 조화를 이루는 것을 어울림(和)이라 말한다.
中이라는 것은 세상의 가장 큰 근본이고, 마음을 다스려 어울림(和)을 유지하는 것이 道를 체득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孔子와 孟子를 중심으로 한 유가사상(儒家思想)에서 말하는 道와 예수와 붓다와 老子와 莊子가 말하는 道가 뚜렷이 차이가 난다.
孔子와 孟子는 마음을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고, 예수와 붓다와 老子와 莊子는 虛像에 불과한 마음(관념)과 自我(ego)를 아예 없애라는 것이다. 따라서 孔子와 孟子가 말하는 道는 하나의 사상적 학문이 되지만, 예수와 붓다와 老子와 莊子가 말한 道는 喜怒哀樂이라는 情이 표출되지 않는 상태, 즉 인간의 本質인 性과 眞理가 되는 것이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孔子와 孟子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삼가 조심하고(愼) 참는(忍) 것이다. 그러나 삼가 조심하고(愼) 참는(忍) 것 또한 강한 마음작용에 불과한 것이고, 삼가 조심하고(愼) 참는(忍) 것 자체가 또 다른 마음의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예 예수와 붓다와 老子와 莊子가 말하듯 마음(관념)과 自我(ego)를 모두 버리면 삼가 조심하고(愼) 참는(忍) 것 자체도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孔子와 孟子는 마음과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思想, 즉 학문이지만, 老子와 莊子는 마음과 생각을 벗어난 眞理이다.
따라서 孔子와 孟子는 老子와 莊子가 말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孔子와 孟子는 분명 생각과 마음으로 만든 유가사상(儒家思想)이지만, 老子와 莊子를 하나의 思想 또는 哲學으로 보는 것은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왜냐하면 老子와 莊子는 생각과 마음을 넘어선 인간의 眞理이기 때문이다.
莊子가 인간의 마음을 열두 가지로 표현한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근심(慮) 탄식(嘆) 변화(變) 두려움(慹) 그리고 경솔함(姚) 나태함(佚) 욕심부림(啓) 음란함(態)은 이런 감정의 표출되는 기준인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없으면 그런 감정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간혹 聖人은 무정(無情)한 사람이다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莊子는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근심(慮) 탄식(嘆) 변화(變) 두려움(慹) 그리고 경솔함(姚) 나태함(佚) 욕심부림(啓) 음란함(態)의 마음작용이 음악이 빈 구멍에서 나오듯, 땅의 기운이 응집해야 버섯이 돋아나듯 아무 의미도 없는 공허(空虛)함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마음(관념)과 自我(ego)도 없는 인간의 本質인 性의 상태에서는 그러한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리석은 인간의 虛像에 불과한 마음(관념)과 自我(ego)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虛像에 불과한 것이니 이를 어찌 공허(空虛)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莊子는 그러한 감정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계속 이끌어가기 위하여 ‘이러한 마음작용은 밤낮으로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莊子는 ‘아서라! 말아라!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이런 마음작용을 하고 있으니 그 말미암은 바 그대로를 받아들여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의 마음(관념)과 自我(ego)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말미암은 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면 아무런 모순도 갈등도 없이 그저 지극한 평화와 사랑의 삶을 살 터인데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마음(관념)과 自我(ego)로 인한 온갖 감정에 휩싸여 오히려 자기 스스로가 만든 감정의 노예가 되어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가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한 '一切唯心造'와 맥락이 정확히 일치하는 말이다. 세상은 스스로 그러한 自然이고, 온통 고요할 따름인데 인간의 마음이 저 혼자 있지도 않은 온갖 감정을 만들어내어 제 스스로 고통 속을 방황하며 살고 있는 꼴이다.
세상은 온통 아름답고 고요한데 인간의 마음과 생각이 저 혼자 지지고 볶고 온갖 지랄을 떨면서 스스로 고통뿐인 地獄의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다.
莊子의 이 같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언어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우리를 天國의 삶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 日(날 일)은 ❶상형문자로 해를 본뜬 글자이다. 단단한 재료에 칼로 새겼기 때문에 네모꼴로 보이지만 본디는 둥글게 쓰려던 것인 듯하다. ❷상형문자로 日자는 태양을 그린 것으로 '날'이나 '해', '낮'이라는 뜻이 있다. 갑골문은 딱딱한 거북의 껍데기에 글자를 새기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둥근 모양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日자가 비록 네모난 형태로 그려져 있지만, 본래는 둥근 태양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갑골문에 나온 日자를 보면 사각형에 점이 찍혀있는 모습이었다. 이것을 두고 태양의 흑점을 표시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먼 옛날 맨눈으로 태양의 흑점을 식별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日자는 태양과 주위로 퍼져나가는 빛을 함께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태양은 시간에 따라 일출과 일몰을 반복했기 때문에 日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시간'이나 '날짜' 또는 '밝기'나 '날씨'와 같은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日(일)은 (1)일요일(日曜日) (2)하루를 뜻하는 말. 일부 명사(名詞) 앞에서만 쓰임 (3)일부 명사(名詞)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날의 뜻을 나타내는 말 (4)날짜나 날수를 셀 때 쓰는 말 (5)일본(日本) (6)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날 ②해, 태양(太陽) ③낮 ④날수 ⑤기한(期限) ⑥낮의 길이 ⑦달력 ⑧햇볕, 햇살, 햇빛, 일광(日光: 햇빛) ⑨십이장(十二章)의 하나 ⑩나날이, 매일(每日) ⑪접때(오래지 아니한 과거의 어느 때), 앞서, 이왕에 ⑫뒷날에, 다른 날에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달 월(月)이다. 용례로는 그 날에 할 일을 일정(日程), 날마다를 일상(日常), 날과 때를 일시(日時), 하루 동안을 일간(日間), 해가 짐을 일몰(日沒), 해가 돋음을 일출(日出), 그 날 그 날의 당직을 일직(日直), 직무 상의 기록을 적은 책을 일지(日誌), 하루하루의 모든 날을 매일(每日), 날마다 또는 여러 날을 계속하여를 연일(連日),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일을 쉬고 노는 날을 휴일(休日), 오늘의 바로 다음날을 내일(來日), 축하할 만한 기쁜 일이 있는 날을 가일(佳日), 일본과 친근함을 친일(親日), 일본에 반대하여 싸우는 일을 항일(抗日), 일이 생겼던 바로 그 날을 당일(當日), 일정하게 정해진 때까지 앞으로 남은 날을 여일(餘日), 날마다 내는 신문을 일간지(日間紙), 일상으로 하는 일을 일상사(日常事), 날마다 늘 있는 일이 되게 함을 일상화(日常化), 날마다 달마다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뜻으로 학업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진보함을 이르는 말을 일취월장(日就月將), 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이미 늙어 앞으로 목적한 것을 쉽게 달성하기 어렵다는 말을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막힌다는 뜻으로 늙고 병약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모도궁(日暮途窮),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 세월이 갈수록 더해짐을 이르는 말을 일구월심(日久月深), 한낮에 그림자를 피한다는 뜻으로 불가능한 일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중도영(日中逃影), 해가 서산에 가깝다는 뜻으로 나이가 들어 죽음이 다가옴을 이르는 말을 일박서산(日薄西山), 같은 날의 두 번의 만조 또는 간조의 높이가 서로 같지 않은 현상을 일컫는 말을 일조부등(日照不等), 날로 달로 끊임없이 진보 발전함을 일컫는 말을 일진월보(日進月步),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지러짐을 일컫는 말을 일월영측(日月盈昃), 날마다의 생활을 이르는 말을 일상생활(日常生活), 해와 달과 별을 일컫는 말을 일월성신(日月星辰), 아침 해가 높이 떴음을 일컫는 말을 일고삼장(日高三丈), 항상 있는 일을 일컫는 말을 일상다반(日常茶飯), 날마다 달마다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말을 일취월장(日就月將),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말을 일구월심(日久月深) 등에 쓰인다.
▶️ 以(써 이)는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람이 연장을 사용하여 밭을 갈 수 있다는 데서 ~로써, 까닭을 뜻한다. 상형문자일 경우는 쟁기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❷회의문자로 以자는 '~로써'나 '~에 따라'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以자는 人(사람 인)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以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수저와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밭을 가는 도구이거나 또는 탯줄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하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무엇을 그렸던 것인지의 유래와는 관계없이 '~로써'나 '~에 따라', '~부터'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以(이)는 ①~써, ~로, ~를 가지고, ~를 근거(根據)로 ②~에 따라, ~에 의해서, ~대로 ③~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④~부터 ⑤~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⑥~을 ~로 하다 ⑦~에게 ~을 주다 ⑧~라 여기다 ⑨말다 ⑩거느리다 ⑪닮다 ⑫이유(理由), 까닭 ⑬시간, 장소, 방향, 수량의 한계(限界)를 나타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위치나 차례로 보아 어느 기준보다 위를 이상(以上), 오래 전이나 그 전을 이전(以前),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그 뒤로나 그러한 뒤로를 이래(以來), 어떤 범위 밖을 이외(以外), 일정한 범위의 안을 이내(以內), 어떤 한계로부터의 남쪽을 이남(以南), 어떤 한계로부터 동쪽을 이동(以東), ~이어야 또는 ~이야를 이사(以沙), 그 동안이나 이전을 이왕(以往), 까닭으로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이나 조건을 소이(所以), ~으로 또는 ~으로써를 을이(乙以), 어떠한 목적으로나 어찌할 소용으로를 조이(條以), ~할 양으로나 ~모양으로를 양이(樣以), 석가와 가섭이 마음으로 마음에 전한다는 뜻으로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뜻은 마음으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는 말 또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가 전달됨을 이르는 말을 이심전심(以心傳心),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뜻으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당해 내려는 어리석은 짓을 일컫는 말을 이란투석(以卵投石), 대롱을 통해 하늘을 봄이란 뜻으로 우물안 개구리를 일컫는 말을 이관규천(以管窺天), 귀중한 구슬로 새를 쏜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이주탄작(以珠彈雀), 독으로써 독을 친다는 뜻으로 악을 누르는 데 다른 악을 이용함을 이르는 말을 이독공독(以毒攻毒),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뜻으로 힘에는 힘으로 또는 강한 것에는 강한 것으로 상대함을 이르는 말을 이열치열(以熱治熱), 옛것을 오늘의 거울로 삼는다는 뜻으로 옛 성현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이고위감(以古爲鑑), 새우로 잉어를 낚는다는 뜻으로 적은 밑천을 들여 큰 이익을 얻음을 일컫는 말을 이하조리(以蝦釣鯉), 손가락을 가지고 바다의 깊이를 잰다는 뜻으로 양을 헤아릴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이지측해(以指測海),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이식위천(以食爲天),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댄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기만하고 권세를 휘두름을 이르는 말을 이록위마(以鹿爲馬), 하나로써 백을 경계하게 한다는 뜻으로 한 명을 벌하여 백 명을 경계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이일경백(以一警百), 털만으로 말의 좋고 나쁨을 가린다는 뜻으로 겉만 알고 깊은 속은 모름을 이르는 말을 이모상마(以毛相馬), 남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을 경계함을 이르는 말을 이인위감(以人爲鑑), 백성을 생각하기를 하늘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백성을 소중히 여겨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음을 일컫는 말을 이민위천(以民爲天), 피로써 피를 씻으면 더욱 더러워진다는 뜻으로 나쁜 일을 다스리려다 더욱 악을 범함을 이르는 말을 이혈세혈(以血洗血), 양으로 소와 바꾼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 대신으로 쓰는 일을 이르는 말을 이양역우(以羊易牛), 과거의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미루어 짐작한다는 말을 이왕찰래(以往察來), 불로써 불을 구한다는 뜻으로 폐해를 구해 준다는 것이 도리어 폐해를 조장함을 이르는 말을 이화구화(以火救火) 등에 쓰인다.
▶️ 心(마음 심)은 ❶상형문자로 忄(심)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심장의 모양, 마음, 물건의 중심의, 뜻으로 옛날 사람은 심장이 몸의 한가운데 있고 사물을 생각하는 곳으로 알았다. 말로서도 心(심)은 身(신; 몸)이나 神(신; 정신)과 관계가 깊다. 부수로 쓸 때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로 쓰이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心자는 '마음'이나 '생각', '심장', '중앙'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心자는 사람이나 동물의 심장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心자를 보면 심장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심장은 신체의 중앙에 있으므로 心자는 '중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감정과 관련된 기능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心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마음이나 감정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心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위치에 따라 忄자나 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心(심)은 (1)종기(腫氣) 구멍이나 수술한 구멍에 집어넣는 약을 바른 종이나 가제 조각 (2)나무 줄기 한 복판에 있는 연한 부분 (3)무, 배추 따위의 뿌리 속에 박인 질긴 부분 (4)양복(洋服)의 어깨나 깃 따위를 빳빳하게 하려고 받쳐 놓는 헝겊(천) (5)초의 심지 (6)팥죽에 섞인 새알심 (7)촉심(燭心) (8)심성(心星) (9)연필 따위의 한복판에 들어 있는 빛깔을 내는 부분 (10)어떤 명사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마음, 뜻, 의지(意志) ②생각 ③염통, 심장(心臟) ④가슴 ⑤근본(根本), 본성(本性) ⑥가운데, 중앙(中央), 중심(中心) ⑦도(道)의 본원(本源) ⑧꽃술, 꽃수염 ⑨별자리의 이름 ⑩진수(眞修: 보살이 행하는 관법(觀法) 수행) ⑪고갱이, 알맹이 ⑫생각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건 물(物), 몸 신(身), 몸 체(體)이다. 용례로는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심리(心理), 마음에 품은 생각과 감정을 심정(心情), 마음의 상태를 심경(心境), 마음 속을 심중(心中),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어떤 일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심취(心醉), 마음에 관한 것을 심적(心的), 마음의 속을 심리(心裏), 가슴과 배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를 심성(心性), 마음의 본바탕을 심지(心地),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묵묵한 가운데 서로 마음이 통함을 이르는 말을 심심상인(心心相印),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먹었던 마음을 바꿈을 일컫는 말을 심기일전(心機一轉),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일컫는 말을 심열성복(心悅誠服), 마음이 너그러워서 몸에 살이 오름을 일컫는 말을 심광체반(心廣體胖),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심복지인(心腹之人), 높은 산속의 깊은 골짜기를 이르는 말을 심산계곡(心山溪谷), 심술꾸러기는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심술거복(心術去福), 마음이 번거롭고 뜻이 어지럽다는 뜻으로 의지가 뒤흔들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심번의란(心煩意亂),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심심풀이로 어떤 일을 함 또는 그 일을 일컫는 말을 심심소일(心心消日), 마음이 움직이면 신기가 피곤하니 마음이 불안하면 신기가 불편하다는 말을 심동신피(心動神疲), 심두 즉 마음을 멸각하면 불 또한 시원하다라는 뜻으로 잡념을 버리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불 속에서도 오히려 시원함을 느낀다는 말을 심두멸각(心頭滅却), 마음은 원숭이 같고 생각은 말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생각을 집중할 수 없다는 말을 심원의마(心猿意馬) 등에 쓰인다.
▶️ 鬪(싸울 투/싸움 투)는 ❶형성문자로 鬭(투)의 본자(本字), 斗(투), 閗(투), 鬥(투)는 동자(同字), 闘(투)는 와자(訛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싸울 투(鬥; 싸우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착)으로 이루어졌다. ❷형성문자로 鬪자는 '싸우다'나 '승패를 겨루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입니다. 鬪자는 鬥(싸울 투)자와 尌(세울 주)자가 결합한 모습입니다. 尌자는 북을 세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세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鬥자는 머리를 흩날리는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싸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鬪자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鬪자는 단순히 豆(콩 두)자가 소리역할을 하고 寸(마디 촌)자가 손동작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래의 의미를 강조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鬪(투)는 ①(두 병사가 손에 병기를 들고)싸우다 ②싸우게 하다 ③승패를 겨루다 ④투쟁하다 ⑤(두 사람이 손에 물건을 들고)다투다 ⑥경쟁하다 ⑦당하다 ⑧맞서다 ⑨한데 모으다 ⑩맞추다 ⑪합치다 ⑫싸움,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싸움 전(戰)이다. 용례로는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싸워서 다툼을 투쟁(鬪爭), 끝까지 투쟁하려는 기백을 투혼(鬪魂), 전장이나 경기장에 싸우려고 나선 사람을 투사(鬪士),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투지(鬪志), 닭끼리 싸움을 붙임을 투계(鬪鷄), 소싸움 또는 싸움 소를 투우(鬪牛), 개끼리 싸움으로 붙임 또는 거기에 쓰이는 개를 투견(鬪犬), 더위를 이겨내기 위하여 피서하지 않고 더위와 싸움을 투서(鬪暑), 적극적으로 질병과 싸움을 투병(鬪病), 서로 다투거나 싸우며 때림을 투구(鬪毆), 싸움이나 교전으로 넓은 뜻에서는 적을 쳐서 승리를 얻기 위한 수단 좁은 뜻으로는 규모가 작은 전쟁을 전투(戰鬪),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움을 분투(奮鬪), 양손에 글러브를 끼고 상대방의 상반신을 치고 막는 운동 경기를 권투(拳鬪), 원한 따위가 있을 때 무기로써 싸워 승부를 결정하는 일을 결투(決鬪), 힘써서 다툼을 역투(力鬪), 몹시 심하게 싸움을 격투(激鬪), 과감하게 싸움을 감투(敢鬪),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서로 적대행위를 하는 일을 암투(暗鬪),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양편이 서로 뒤섞여서 어지럽게 싸움을 난투(亂鬪), 사납게 하는 싸움질을 맹투(猛鬪), 힘에 겨운 싸움을 함을 고투(苦鬪), 성을 내어 싸움을 노투(怒鬪), 죽음을 무릅쓰고 맹렬히 하는 싸움을 혈투(血鬪), 개가 싸워도 잠시는 쉰다는 뜻으로 계속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을 구투아식(狗鬪俄息), 위급한 경우에는 짐승일지라도 적을 향해 싸우려 덤빈다는 뜻으로 궁지에 빠지면 약한 자가 도리어 강한 자를 해칠 수 있다는 말을 곤수유투(困獸猶鬪), 후원이 없는 외로운 군대가 힘에 벅찬 적군과 맞서 온힘을 다하여 싸움 또는 홀로 여럿을 상대로 싸움을 고군분투(孤軍奮鬪), 진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강인한 성격의 함경도 사람을 평한 말 또는 명분이 서지 않는 일로 몰골 사납게 싸움을 일컫는 말을 이전투구(泥田鬪狗), 어려운 싸움과 괴로운 다툼이라는 뜻으로 강력한 적을 만나 괴로운 싸움을 함 또는 곤란한 상태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노력을 계속함을 이르는 말을 악전고투(惡戰苦鬪), 고래 싸움에 새우가 죽는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강자끼리 싸우는 틈에 끼여 약자가 아무런 상관없이 화를 입는다는 말을 경투하사(鯨鬪鰕死),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다툰다는 뜻으로 힘센 두 영웅 또는 두 나라가 서로 싸움을 이르는 말을 양호상투(兩虎相鬪)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