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阪神大震災で無傷、大阪へ人々運んだ「加古川線」の“存在感”
[産経新聞 5月26日(日)]
加古川東高等学校同窓会東京支部のページ
JR加古川線が開業100周年 利用者らが祝福
[神戸新聞 2013/4/7]
효고현(兵庫県)의 카코가와(加古川)시와 단바(丹波)시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JR카코가와선(카코가와-谷川 타니카와)이
최근 4월 7일에 개업 100주년을 맞이했다.
트럭 수송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기에 카코가와선은 기타하리마(北播磨) 지역의 특산품을 대규모 소비지로 수송하는
물류의 요충 역할을 하였고, 현재는 기타하리마 지역의 통근・통학 승객들을 대동맥인 산요선(山陽線)으로 옮겨주는 지역
공공 교통기관 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995년에 발생한 한신 대지진(阪神大震災)으로 동-서를 연결하는 효고현의 철도망이 토막토막 두절되었을 때에는
오사카 방면으로의 우회 루트로서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이 당시 카코가와선의 활약으로 라이프라인(life-line)의 한
축으로서 중요성이 재평가되어 2004년에는 전노선이 전철화 되었다.
100년 역사의 중량감을 싣고 카코가와선의 전철은 오늘도 계속 달린다. (前田雅紀; 마에다 마사노리)
■ 한신 대지진에서 활약한 카코가와선
1995년 1월에 발생한 한신 대지진.
효고현 서부의 반슈(播州) 지역은 직접적인 피해는 모면했지만, 오사카・코베 방면으로 향하는 JR산요선 등 동-서 구간의
철도망이 토막토막 단절되었다. 지진 복구 작업 기간 중에 통근・통학 승객들은 우회해서라도 출근하기 위해 카코가와선
으로 쇄도했었다.
승객들은 카코가와역으로부터 48.5km 떨어져 위치하는 타니카와(谷川)역까지 약 1시간 동안 열차에 꽉 채워져 갔으며,
타니카와역에서 다시 후쿠치야마선(福知山線)으로 환승하여 아마가사키(尼崎)시와 오사카(大阪)로 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오사카까지 무려 약 3시간이나 되는 출퇴근 시간이 소요되어 평상시에 비해 3배나 되는 시간을 필요로
했지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카코가와선이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없었던 것에 고마움을 실감했다.
효고현 오노(小野)시 시립 호고관(好古館)의 이시노 시게죠(石野茂三) 관장(62)은「역에 도착하면 열차 안쪽에 있는
승객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어 옆에 있던 승객들이 일단 모두 내리는 등, 과거에도 향후에도 저만한 혼잡은
없을 것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당시 카코가와선의 열차가 초만원이 되는 전례없던 사태에 직면하자, JR서일본도 시급하게 차량 편성을 2량에서 3량
으로 늘리거나 임시 다이어를 작성하여 차량 수를 증발(増発)시키는 등의 노력으로 수송력을 강화했었다.
따라서 이 노선에 있던 차량만으로는 대응을 할 수 없어서, 가나자와 지사(金沢支社) 관내 등에서서 차량을 동원하게
되었고, 이에 처음보는 도색과 도장의 열차들이 왕래했었다.
도중의 니시와키(西脇)시역에서 운행을 마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타니카와역까지 직통 운행함으로써 우회 통근・통학의
시간 단축에 크게 기여했다. 이 때의 활약 덕분에 연선 지자체들로부터 카코가와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단선의 로컬선의 성격이 컸던 카코가와선이 폐선이나 제 3 섹터화를 모면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JR서일본도「네트워크 기능을 중시하고 있다」라고 밝혀 카코가와선의 의의를 인정하고 있다.
■ 1차대전 당시 포로 수송에도 활약
카코가와선은 타이쇼(大正), 쇼와(昭和),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3대를 이은 시기에 반슈(播州) 지역의 역사를 지켜
보아 왔다. 그 중 큰 사건 중 하나로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구(旧)일본군의 포로가 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병사
약 500명이, 현재의 가사이시(加西市) 아오노하라쬬(青野原町)에 있던 「아오노하라후리(青野原俘虜) 수용소」로
카코가와선(당시는 반슈 철도)을 이용해서 이송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동 수용소가 타이쇼 4년인 1915년 9월에 설치되었고, 히메지(姫路) 시내의 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이 옮겨지게 되었다.
카코가와선으로 오노시(小野市)의 다이몬구치(大門口)역 (현재의 아오노가하라 青野ケ原駅역)에 도착한 포로들은
수용소까지 수km의 길을 열을 지어 걸었다.
당시, 이 지역 주민들에게 있어서 외국인은 매우 드물었던 모양인지, 많은 구경꾼들이 길가에 운집하여 구경하느라
대소동이 벌어졌었다고 한다.
다만, 의외로 이 수용소에는 다른 수용소와는 달리 어두운 이미지는 없었고, 포로들은 수용소 밖으로 외출이 허락되어
소풍을 즐기거나 일본인들과 축구 시합을 가졌었고, , 중학교에서의 유도(柔道) 견학을 하는 등으로 현지 주민들과
교류를 했던 개방적인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1920년 1월에 수용소가 폐쇄되어 포로들이 코베항(神戸港)에서 선박편으로 귀국할 때도 카코가와선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열차로의 이동이나 수용소 생활을 통해 서양 포로들의 눈에 비친 일본의 이미지는 반슈 지역의 광경이었을 것이다.
■ 다음의 100년을 향해서
아오(粟生)역(오노시 소재)에서 카코가와선과 접속하여, 스즈란다이(鈴蘭台; 코베시 키타구)역까지 29.2km의 노선을
연결하는 코베 전철(神戸電鉄) 아오선(粟生線)도 한신 대지진 직후에 우회 루트로서 주목을 끌었었으며, 한 때 연간
승객수는 피크시인 1992년도에만 해도 약 1420만명에 달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절반 이하로 침체하는 등 존속의 위기에
처해 있다.
구국철의 운영을 계승하여 JR서일본이 운영하는 카코가와선은 경영적으로 평안무사하게 보이지만, 이 노선 역시 연선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를 겪고 있다는 점에서는 코베전철의 아오선과 같은 문제를 떠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카코가와선은 2004년의 전노선 전철화에도 불구하고 승객 수는 겨우 제자리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JR서일본은「지역 교통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 인식으로 카코가와선을 운행해 나가고 싶다」라고
노선 유지의 입장을 보여왔다.
카코가와역에서는 최근 2013년 4월 7일에 노선 100주년 기념식 행사를 개최했다.
JR서일본 관계자들과 함께 테이프컷을 한 카코가와시의 타루모토 쇼우이치(樽本庄一) 시장은 카코가와선의 전노선
전철화를 추진했던「전화 촉진 기성동맹회(電化促進期成同盟会)」의 회장이었던 만큼, 기념식전 인사에서「남-북의
동맥인 카코가와선을, 보다 많은 연선 주민들께서 이용해 주시길 바란다」라고 만감이 교차한 듯한 느낌을 담아
당부했다.
「어린이 1일 역장」으로 임명된 현지의 어린이들이「출발 진행」의 신호를 보내자, 100주년 기념의 헤드 마크를 붙인
2량 편성의 103계 차량이 홈을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많은 철도팬들이 다음의 100년을 향한 생각을 담아서 전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