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국보 제30호)은 분황사(구황동)에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높이 9.3m로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로 추정되는 동물석상을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층과 3층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落水面) 층단이 있다.
받침은 초층부터 6단, 6단, 5단이며,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석으로 된 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 분황사석탑사리구(芬皇寺石塔舍利具 - 다른명칭; 분황사탑중발견품(芬皇寺塔中發見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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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상평오수(常平五銖) 등 옛 화폐가 발견되어 고려 숙종 내지 예종 연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 된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 민중 곁으로 내려간 원효(元曉)
분황사(芬皇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에는 634년(선덕여왕 3)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당간지주가 있고, 탑 북쪽에는 근래에 세운 보광전이 있다. 분황사의 ‘분황(芬皇)'은 '향기날 분', '황제 황'자로 향기나는 황제란 절이란 뜻이다. 인평으로 연호로 바꾼 그 해 창건된 분황사는 신라 최초로 여왕에 올라선 것을 내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절임을 알 수 있다.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에도 가위 등 여자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알려질 만큼 유명했다.
중국에서 대장경 1부를 가지고 돌아 온 자장은 분황사에 주석하였다. 분황의 진나(陳那, 480~540년경)로 알려진 원효도 일찍이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화엄소를 짓다가 제4 십회향품에 이르자 붓을 놓기도 하였다. 분황사에는 설총이 원효의 유해를 부수어 만든 소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설총이 예배를 드리자 돌아섰다고 하는데 고려 당시에도 돌아선 채로 있었다 한다.
원효(元曉)는 일찍이 이곳에 머물면서〈화엄경소 華嚴經疎〉를 썼으며,〈삼국유사 三國遺事〉에 의하면 솔거(率居)가 그린〈관음보살도 觀音菩薩圖〉는 신화(神畵)로 일컬어졌다. 755년(경덕왕 14)에 강고내말(强古乃末)이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을 만들어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좌전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영험이 있어서 경덕왕 때 희명이라는 어린아이의 눈을 뜨게 했다고 전한다.
▲ 원효 영정(元曉影幀) ⓒ 삼성현역사문화회관.
분황사 화쟁국사비 귀부(芬皇寺 和諍國師碑 龜趺) ⓒ 국립문화재연구소
원효(元曉)에게 고려 숙종 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종 때 화쟁국사비를 분황사에 건립하였다. 현재 비신은 멸실되고 비부만 잔존한다. 현존 당우로는 보광전·승당·종각이 있으며, 이밖에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국보 제30호)·분황사 화쟁국사비 귀부(芬皇寺 和諍國師碑 龜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분황사 석정(芬皇寺 石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석등(石燈)·대석(臺石)·당간지주(幢竿支柱)·건물지의 초석(礎石) 등이 남아 있다.
* [문화유산채널 영상관] 내가 사랑한 문화유산-철학자 강신주 편(원효가 있다,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http://uci.k-heritage.tv/resolver/I801:1709004-001-V00006@N2R:1
(참고문헌:『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속고승전(續高僧傳)』,『분황사발굴조사보고서』(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5).『분황사의 재조명』(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1999), 문화재청(www.cha.go.kr)/ 글과 사진: 이영일 김호경, 전)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 사진기자, 이태열, 울산광역시북구 향토문화연구소장, 이화찬 울산광역시북구 문화원 회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오래되서 고풍스럽고, 멋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