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 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 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4.02.15. -
〈이운진 시인〉
△ 경남 거창 출생
△ 동덕여대 국문과, 동대학원 석사
△ 1995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 시집 : <무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콜스토이 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 에세이집 : <시인을 만나다>, <고흐 씨, 시 읽어줄까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질 너에게>
살면 살수록 과연 개로 태어나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못한 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꼬리”와 “초원”의 “바람”과 “은하수”를 잃는 대신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혹시 시인의 말처럼 훨씬 깊은 “슬픔”과 그 슬픔을 위한 긴 “시간”만을 얻은 것은 아닐까요?
차라리 꼬리를 달고 한 마리 개가 되어 초원의 바람과 뒹굴고 쏟아지는 은하수 아래서 아무렇게나 사랑을 나누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라는 부분에서 인간이 짊어진 크고 무거운 존재의 슬픔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