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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일국지군역사연구(一國之君歷史硏究)
당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로 접어든다. 중국역사상 동진남북조이후 두번째 난세이다. 비록,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정권교체가 빈번했으며, 그중 한 민족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들은 바로 사타족(沙陀族)이다.
오대에서 3개의 왕조를 사타인들이 건립한다. 오대(五代)중 후량(後梁)과 후주(後周)를 제외한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은 모두 사타인이 건립했다. 그외에 북한(北漢)정권도 사타인이 건립한 것이다.
사타인은 역사상 존재감이 크지는 않다. 그들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신오대사. 장종상(莊宗上)>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무릇 사타는 대적(大磧)이다. 금사산(金娑山)의 남쪽, 포류해(蒲類海)의 동쪽에서 처월(處月)이래 이 사막에 살았다. 사타돌궐(沙陀突厥)이라 한다."
사타는 지명이면서 민족명이다. 소위 사타는 대적 즉, 영북사막(嶺北沙漠)이다. 위치는 금사산(지금의 신간 보거둬산)의 남쪽, 포류해(지금의 신강동북부의 바리쿤호수)의 동쪽이다.
사타민족의 이전 이름은 처월(處月)이다. 그들은 처음에 사타라는 지방에 살았고 사타돌궐이라 했다. 즉 돌궐의 한 부족이다.
당태종시기, 서돌궐왕족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가 칸(可汗)이 된다. 그의 형인 아사나보진(阿史那步眞)은 아무런 작위를 를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아사나미사를 죽이고 자신이 칸이 되고자 한다. 미사는 두려워 처월, 처밀(處密)등 부락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한다.
아사나보진은 스스로 칸에 오르나, 다른 부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사나보진도 당에 투항한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 남아 있던 서돌궐의 잔여부락은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가 통할했다.
아사나하로와 처월부락의 수령인 주사아궐(朱邪阿厥), 주사고주(朱邪孤注)는 함께 당나라에 투항한다. 그러나 당태종이 죽은 후 아사나하로는 당나라에 반기를 든다. 주사고주도 아사나하로를 따라 함께 반란에 가담한다.
당고종은 양건방(梁建方), 계필하력(契苾何力)을 보내 반란을 평정한다. 아사나하로는 다시 당에 투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다. 당나라는 요지도독부(瑤池都督府)를 폐지하고, 처월의 관할지에 금만주(金滿州), 사타주(沙陀州)의 두 개 주를 설치한다. 그리고 도독을 임명한다.
당나라가 서돌궐을 멸망시킨 후, 현지에 곤릉(昆陵), 몽지(蒙池)의 두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하고 아사나보진과 아사나미사를 각각 몽지도호와 곤릉도호에 임명한다.
당고종 용삭5년, 처월의 추장 사타금산(沙陀金山)이 당나라의 무위장군(武威將軍) 설인귀(薛仁貴)를 따리 철륵(鐵勒)을 토벌한다. 그때의 전공으로 사타금산은 금만주도독(지금의 신강 지무사르, 치타이 일대)이 된다. 그리고 장액군공(張掖郡公)의 작위를 받는다. 사타금산의 갈래는 사타족의 조상이 된다.
당현종 천보연간, 회흘(回紇)이 당나라에 투항한다. 사타금산의 손자 사타골돌지(沙陀骨咄支)는 회흘부도호(回紇副都護)가 되어, 당숙종을 따라 안사의 난을 평정한다. 사타골돌지가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주사진충(朱邪盡忠)이 작위를 계승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가족은 원래 성이 "주사"이다. 중도에 "사타"로 성을 고쳤다. 중국측의 설명에 따르면, 오랑캐들은 성씨가 없고, 그저 부락명칭을 성으로 삼는다. 그들의 성은 기실 부락명칭이다. 사타의 우두머리는 한때 주사를 사타로 개명했다.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하여 일찌기 당나라를 배반한 적이 있어, 나중에 다시 주사로 고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타인이 다시 당나라로 돌아왔다는 것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안사의 난 이후에 당나라는 쇠약하고, 회흘이 서역을 점령하고, 토번이 하서와 농우를 점령한다. 사타인은 회흘인들에게 밀려나서, 주사진충이 사타부락 7천여장(帳)을 이끌고 토번에 투항한다. 1장을 4-5명으로 추산해보면, 토번에 투항한 사타인은 2.8만 내지 3.5만명에 이른다.
토번인과 사타인은 함께 당나라의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함락시킨다. 얼마 후, 토번은 사타인을 감주(甘州, 지금의 감숙성 장액)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주사진충을 통군대륜(統軍大淪)으로 임명한다. 토번이 당나라를 공격할 때, 사타인은 자주 토번인의 선봉이 되었다.
800년, 회흘이 양주(凉州)를 함락시킨다.토번은 사타와 회흘이 결탁하는 것을 우려하여, 사타를 황하서쪽의 청장고원지구로 보낼 생각을 한다. 사타인은 서쪽으로 이주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두령 주사진충은 모든 부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한다.
토번은 사람을 보내 사타인을 추살한다. 3만의 사타인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퇴각했다. 영주(靈州, 지금의 영하성 오충)에 도착했을 때는 2,700명이 남아 있었다. 우두머리 주사진충도 전사하고, 그의 아들 주사집의(朱邪執宜)가 승계받았다.
당나라는 사타를 먼저 염주(鹽州, 섬서성 정변)에 안치시킨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흩어졌던 사타인들이 염주로 모여든다. 주사진충의 동생 주사갈륵아파(朱邪葛勒阿波)도 700명을 데리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좌무위대장군(左武威大將軍) 겸 음산부도독(陰山府都督)에 임명된다.
주사집의는 금오위장군(金吾衛將軍)에 임명된다. 얼마 후, 삭방영염절도사(朔方靈鹽節度使) 범희조(范希朝)는 모든 사타인을 하동(河東, 지금의 산서)로 이주시키고, 사타인을 정양천(定襄川, 지금의 산서성 흔주)에 안치시키고, 범희조는 사타인중 1,200명을 선발하여 사타군을 조직한다.
그후, 사타인은 대북(代北, 지금의 산서성 북부)에서 생활하게 된다. 주사집의는 부락명칭은 음산북사타(陰山北沙陀)로 고쳐부른다.
다시 사타인의 이주사를 보자: 사타인은 가장 먼저 신강 보거둬산 남쪽, 파리쿤호수 동쪽에 살았다. 여기에서 신장의 지무사르, 치타이 일대로 이주한다. 이어서 다시 감숙 장액으로 이주한다. 다시 섬서 정변으로 이주하고, 마지막에 산서 흔주일대로 이주한다. 전후로 총 거리가 5000여리에 이른다. 시간은 당태종 정관연간에서 당헌종 원화 연간까지 100여년에 이른다.
2. 사타의 굴기
사타인은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다. 당나라에 귀순하여 정착지를 갖고 난 후에 부락을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주사집의는 사타용사를 이끌고 조정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성덕군절도사 왕승종을 토벌하는데 참가한다. 전공을 세워 그는 울주자사(蔚州刺史)가 된다. 조정은 사타족이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10개부로 나누어 사타인들을 안치시킨다. 이를 통해 실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조조가 흉노를 5부로 나누어 통치한 것과 마찬가지의 의도이다.
그후 주사집의는 당군을 따라 남정북전을 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당무종 장경연간에 주사집의는 음산부도독, 대북행영초무사, 예속하동절도사가 된다. 그는 3천의 사타병을 이끌고 당나라의 북방을 지켰다.
주사집의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주사적심(朱邪赤心)이 즉위한다. 당나라의 정도서 유면(劉沔)은 주사적심이 이끄는 사타병과 함께 살호산(殺胡山)에서 침입해 들어온 회흘을 격패시킨다. 주사적심은 그후 3천의 대북기병을 이끌고 당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당군장수 양변(楊弁)을 생포한다. 주사적심은 그 공으로 삭주자사, 대북군사(代北軍使)가 된다.
당의종 함풍9년, 즉 868년, 방훈(龐勛)의 난이 일어난다. 당의종은 의성절도사 강승훈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게 한다. 주사적심과 그의 동생 주사적충(朱邪赤衷)은 3천기병을 이끌고 따른다.
사타기병은 방훈의 난을 토벌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당나라는 주사적심을 대동군절도사로 승진시키고 국성인 이씨(李氏)를 하사한다. 그리고 당나라종실 정왕(鄭王)의 적에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그에게 친인리(親仁里)의 저택도 하사한다.
바로 이때부터 사타의 수령은 '주사'라는 성씨를 '이'씨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당나라조정을 위하여 계속 전투에 참가한다. 이국창(李國昌, 즉 사타적심)은 군대를 이끌고 침입한 회흘을 물리치고, 왕선지의 반란을 토벌하는데도 참가하여,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다. 그렇게 하여 세력이 점차 커지게 된다.
이국창에게는 유명한 아들이 있다. 바로 이극용(李克用)이다. 부친이 당나라를 위하여 여러 전투에 참가할 때, 이극용도 따라다녔다. 부자는 모두 용맹하고 전투를 잘 했다.
당희종 건부3년, 즉, 876년, 운주방어사 단문초(雲州防御使) 단문초(段文楚)가 군비를 삭감하여, 장교 정회신(程懷信), 왕행심(王行審), 개우(蓋寓), 이존장(李存璋), 설철산(薛鐵山), 강군립(康君立)등이 불만을 품게 된다. 이들은 이극용을 옹립하여 할거정권을 세워 독립하고자 했고, 이극용도 동의한다. 1만여명의 병사를 모아 단문초를 죽이고, 청나라조정에 이극용을 대동방어유후(大同防御留后)로 임명해줄 것을 청한다.
조종은 동의하지 않고, 병력을 일으켜 토벌에 나설 준비를 한다. 마침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 조정은 이극용을 사면하고, 이국창을 대동군방어사로 임명한다. 그러나 이국창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조정은 다시 병력을 보내 파병하려고 하나 결과는 없었다.
나중에 이국창은 당항인들과 작전하여, 토곡혼의 수령 혁련탁(赫連鐸)이 진무(振武, 지금의 내몽골 허린거얼 서북쪽)을 습격하고, 이국창은 운주(지금의 산서성 대동)로 도망쳐 돌아간다. 그러나 운주는 이국창을 받아주지 않는다. 이극용은 3천을 이끌고 혁련탁과 전투를 벌인다. 그때 당희종은 조서를 내려 소의절도사 이균(李鈞)으로 하여금 이국창, 이극용 부자를 토벌하게 한다. 그러나, 이균은 패배하고 전사한다.
1년후, 울주삭주초토도통 이탁(李琢)이 군대를 이끌고 이국창부자를 토벌한다. 이국창은 패배하여, 이극용과 함께 께 모든 부족을 이끌고 타타르로 도망친다. 혁련탁은 타타르추장에게 이국창을 죽여달라고 요구한다.
이극용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술로 타타르를 감탄하게 만들어, 타타르는 이극용부자를 죽이지 않는다.
당희종 중화원년 즉 881년, 황소가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당희종은 조서를 내려 하동감군(河東監軍) 진경사(陳景思)로 하여금 대북군대를 이끌고 황소를 치라고 명한다. 사타의 추장 이우금(李友金)의 병력이 뒤따른다. 다만 이우금은 수하의 사타병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사타병은 산서성 신강현까지 갔다가, 현지관청과 백성을 약탈하고 다시 대북으로 돌아온다.
이우금은 진경사와 상의한 후, 조정에 이국창, 이극용부자를 다시 불러줄 것을 청한다. 그리하여 조정은 이국창을 사면하고 이극용을 대주자사(代州刺史)에 임명한다. 그리고 사타병을 이끌고 황소를 토벌하도록 한다. 이극용이 돌아올 때 타타르인 1만명을 데리고 왔다. 진경사와 함께 장안으로 가서 황소를 공격한다.
883년 이월, 이극용은 군대를 이끌고 석제곡(石堤谷)에서 황소의 수하장수 황업(黃鄴)을 격패시킨다. 삼월, 이극용은 양전파(良田坡)에서 황소의 수하장수 조장(趙璋), 상양(尙讓)을 대파하고, 죽임을 당한 반란군의 시신이 온 들판에 가득했다. 황소는 장안을 빠져나와 도망쳤고, 당군은 장안을 수복한다. 이극용이 최고의 공을 세운 것이다.
이극용은 계속하여 군대를 이끌고 황소군대를 추격한다. 황소군대는 계속 패퇴했고, 산동 하택(荷澤)까지 쫓차간다. 같은 해 십월, 이국창이 사망하고, 얼마 후, 이극용은 하동절도사에 임명되고 농서군왕의 작위에 봉해진다.
이극용은 황소를 추격하여 따라잡지 못하자 변주(하남성 개봉)로 되돌아온다. 그때 주온(朱溫)이 연회를 베푼다. 그런데 주연에서 이극용은 주온에게 잘못을 범해, 주온이 사람을 보내 이극용을 암살하려 한다. 이극용은 원래 술에 취하여 있었는데, 심복이 도와주었고, 마침 하늘에서 비가 내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수백명이 피살당한다. 이때부터 이극용과 주온은 빙탄불상용의 관계가 된다.
그후 이극용은 하동절도사의 직위를 가지고, 점차 전체 하북과 대북을 정복한다. 그를 따르지 않는 당나라세력과 외부세력을 축출당한다. 907년, 주온이 황위를 찬탈하여 후량을 세운다. 이극용은 그때 중병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당나라연호를 사용하고, 이를 통해 당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낸다. 다음 해에 이극용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존욱(李存勖)이 승계한다.
이상의 내용으로 이극용가족의 세계를 추단해볼 수 있다::
주사아궐 - 주사고주 - 사타금산 - 사타보국 - 사타골돌지 - 주사진충 - 주사집의 - 주사적심(이국창) - 이극용 - 이존욱.
이존욱은 먼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존호(李存顥), 이존실(李存實)등을 주살하여, 내부정권의 안정을 공고히 한다. 그후 후량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15년만에 이존욱은 후량정권을 멸망시키고 후당정권을 건립한다. 이존욱이 바로 후당의 개국황제이다.
후당은 후량을 멸망시킨 후, 전촉(前蜀)도 평정한다. 926년, 위박(魏博)의 수졸(戍卒)이 패주(貝州, 하북성 형대)에서 비장 조재례(趙在禮)를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존욱은 이극용의 양자인 이사원(李嗣源)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평정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사원은 오히려 반군에 붙잡히고 오히려 반군의 수령이 된다. 이존욱은 할 수 없이 직접 친정에 나서는데, 반군이 오히려 후당장수들의 지지를 받게 되고, 이존욱은 부장에게 피살된다.이사원이 낙양에서 칭제하니 그가 후당의 개국황제 후당명종이다.
이사원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종후(李從厚)가 즉위한다.이종후는 병권을 쥐고 있는 이사원의 양자 이종가(李從珂)와 대장 석경당(石敬瑭)를 제거하고자 한다. 그러나 오히려 두 사람의 반란을 불러온다. 이종후는 패배하여 석경당에게 구금당하고, 이종가가 즉위한다. 그러나 이종가는 석경당과 갈등이 생기고, 석경당이 거란인과 결탁하여, 유운십육주를 할양하고 칭신한다는 조건으로 거란병을 불러들여,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정권을 건립한다.
석경당도 사타인이다. 그는 사타의 신세대이다. 태원에서 출생했으며, 그가 건립한 후진정권은 아주 짧았다. 겨우 11년간 존속했다. 석경당이 사망한 후, 그의 조카 석중귀가 즉위한다. 그러나 거란과 사이가 나바져 싸우게 되면서, 거란군이 남하하여 후진을 멸망시킨다. 석중귀는 거란에 포로로 잡혀간다.
후진이 멸망한 후, 원래 후진의 하동절도사였던 유지원(劉知遠)이 태원에서 칭제한다. 후진의 연호를 계속하여 사용했으며 나중에 국호를 한(漢)을 바꾼다. 유지원은 1년만에 사망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유승우(劉承祐)가 등극한다. 그는 곽위를 시기하여, 곽위가 경성에 남겨놓은 처와 아들을 죽여버린다. 곽위는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유승우는 전투과정에 피살당한다. 곽위가 후주정권을 건립한다.
유지원도 태원에서 출생한 사타인이다. 그가 건립한 후한정권은 가장 짧았고, 겨우 3년만에 멸망했다.
후한이 멸망한 후, 유지원의 동생 하동절도사 유숭(劉崇)이 태원에서 칭제하고 여전히 후한의 연호를 쓴다. 역사에서 북한(北漢)이라 부른다. 북한은 28년간 존재했으며, 북송에 의해 멸망당한다.
3. 사라진 사타족
사타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족에 융합되었다. 808년 사타족이 산서로 이주한 이후, 979년 북한이 멸망할 때까지 사타인은 중원에서 백여년간 생활했다. 태원과 대북지역은 다민족잡거지역이고, 한족이 가장 많았다. 사타인은 한족의 영향을 받아 거의 한화된다.
사타인이 건립한 정권중에도 많은 한족이 중상층의 통치자이건 중하층의 병졸백성이건, 사타인은 원래 인원수가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겨우 수만명이다. 정권을 건립하는데에는 한족의 도움이 필요했고, 한화도 불가결했다.
사타의 우두머리일족은 한성인 이(李)씨성을 썼다 .나머지 사타인들도 한족성으로 성을 고친다. 예를 들어, 후진의 개국황제 석경당, 후한의 개국황제 유지원은 모두 사타인인데 석씨와 유씨는 모두 한족성씨이다. 그들은 분명 성을 고친 것이다.
이들 사타인들은 중원에서 백여년간 거주하면서 성까지도 한족의 성을 썼다. 생긴 모습도 한족과 별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전면적으로 한족에 동화되어버린다. 송나라때 이미 사타인은 거의 볼 수 없게 된다. 이름조차도 역사의 흐름 속에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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