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이 실행하는 것
당신은 아무데나 텐트를 칠 수 있다. 텐트를 치는 데는 기초공사가 필요하지 않으며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도 않다. 그냥 세우면 된다. 그러나 건축은 그렇지 않다. 건축은 언제나 혼란에서 시작된다. 세우려면 먼저 부숴야 한다. 건축은 영속적인 변화를 요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토대를 세울 수 없다.
마찬가지이다. 환난과 고통이 우리로 천국의 집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오묘한 제련과 풀무질 안에서 세상의 시련으로부터 영원한 영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그렇게 하기 위한 우선적인 수단이 역경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고난엔 천국의 보화가 매장되어 있다. 고난은 천국의 보화를 얻는 원천이다.
나는 세상의 환난과 고통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집을 만들게 하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실행하는지'는 안다. 환난과 고통은 우리 안에,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실행한다'. 흠 없는 예수께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상상해보라. 언제나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았던 그분이 상실과 상처를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상상해보라.
-마크 부캐넌, '보이지 않는 것에 눈뜨다'
최상의 삶
부모 제비가 이제는 새끼들 곁에 자리를 잡더니 나뭇가지 끝 편으로 그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밀고 또 밀었다. 그러자 끝에 앉아 있던 새끼 한 마리가 가지에서 떨어졌다. 가지와 수면 사이는 120cm쯤 되었는데 그 어간에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스스로 보금자리로 날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는 둘째도 똑같이 했다. 셋째는 부모의 위협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부모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가지를 움켜쥐고 있는 새끼의 발가락을 부리로 쪼아대었고 그 불쌍한 새끼는 드디어 움켜잡고 있던 발가락을 풀고 뻑뻑한 날개를 펄럭이기 시작했다. 성숙한 제비는 새끼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는 발이 있어서 걸을 수 있다. 새에게는 갈고리 모양의 발톱이 있어서 안전하게 가지를 움켜쥘 수 있다. 그들은 걸을 수도 있고 매어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새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나는 것이며, 그들이 날기까지는 멋지게 우아하게 최상의 삶을 살 수 없다.
우리의 경주는, 주는 것이 최상의 삶이다. 주는 행위야말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기와 같다. 우리의 탄생 이전부터 우리 내면에 고안되어 있었던 행위다. 주는 것은 이 세상의 진면목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주신다. 그분은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분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에 대해서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 가족에게, 이웃에게, 친구들에게, 적에게, 그리고 만국에 내어준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남을 위한 것이다.
-유진 피터슨,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미련한 이유는 무엇인가? 성령님의 자원보다 우리 자신의 능력을 더 의지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는 성령의 바람이 필요하다. 휘몰아치는 강한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강물이 필요하다.
우리가 만든 둑을 무너뜨릴 수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넘쳐나는 홍수가 필요하다. 성령님을 강조하는 사역과 메시지가 필요하다. 성령님은 삼위일체에 속한 괴상한 아저씨가 아니다. 성령님께 '열려'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령님은 지엽적이고 부수적일 수 없는 분이시다. 우리 가운데서 없어서는 안 될 분이 되셔야 한다.
그분은 묻혀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분이시다! 그분을 추구하는 일이 편한 일은 아니다. 때로 '영적인 혼란'을 몰고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을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재능과 능력에 제한받는 사역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것을 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성령을 추구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리치 스티븐슨, '영적생활을 위한 비결, 그 한 가지' 중에서
명확한 목적이 없으면…
목적을 알면 우리의 삶은 단순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꼭 필요한 활동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일을 하기 전에 간단히 '이 일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까?'라고 자문하면 된다.
명확한 목적이 없으면 우리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으며, 어떻게 시간을 투자하고 자원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근거를 잃게 된다. 그저 상황이나 압력,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기분에 따라 결정을 내릴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고, 또 이 때문에 스트레스, 피로, 그리고 관계에 있어서 갈등을 겪게 된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만을 행할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만약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혹은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더 단순한 삶의 방식과 분별있는 계획을 갖게 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은 공허한 삶이다. 평범하고 단순한 삶이 풍성한 삶이다'(잠 13;7). 또한 이러한 삶이 마음에 평화를 준다. '주님, 당신은 목적을 굳게 지키고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완전한 평화를 주십니다'(사 26:3).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묵상자의 정열
묵상자는 항상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소망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더 깊은 품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고독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소란 속에 있을 때, 참으로 중요하고 진실한 것을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듣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혼자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가 속한 집단이나 그 속에서의 활동, '유희', 그리고 외적인 자극을 광적으로 좇는다.
한편 묵상자는 조용히 침잠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묵상자의 주된 동기는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데 있다. 묵상자는 관계에 의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묵상자는 소외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면서 인간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묵상자의 정열은 조용하고 사려깊은, 기도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스캇 펙, '주와 함께 가는 여행'
어느 선교사의 오해
몇 년 전 나이 지긋한 선교사 부부가 은퇴하여 아프리카에서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연금도 받을 수 없고 건강도 잃은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뉴욕을 향하고 있었다. 그 배에는 마침 그날 아프리카에서 사냥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던 루즈벨트 대통령 일행도 함께 탑승하고 있었다.
배가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 항구로 들어서자 선착장에서 나는 밴드 연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선착장에는 아프리카에서 사냥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하여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그때 백발의 선교사는 아내를 쳐다보며 이같이 말했다.
'여보, 무엇인가 잘못되었어. 대통령은 아프리카에서 단지 사냥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하는데, 아프리카에서 평생 동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삶을 바친 우리를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소. 이것은 공평하지 않아.'
배가 항구에 도착해 밴드 연주와 군중의 환호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자 그는 더욱 풀이 죽었다. 그날 밤, 영적으로 몹시 피폐한 선교사는 아내에게 또다시 불평하였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나님은 불공평하셔!' 그러자 아내는 '왜 하나님에게 간구하지 않으세요?'라고 되물었다. 그는 침실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하나님과 대화한 후 침실에서 나왔을 때 그는 완전히 달라져보였다.
'여보, 주님이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셨어. 나는 주님에게 우리가 선교사역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도 환영하지 않아 가슴이 몹시 쓰라렸다는 사실을 얘기하였지. 내가 말을 마치자 주님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그러나 너는 아직 하늘 본향에 이르지 않았잖니!'라고 말씀하셨어.'
-레이 C.스테드먼,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 내면의 기도'
약함의 진정한 힘
얼마 전 캐나다 로키 산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다시 벤프라는 세계적인 휴양지를 가보았는데, 나는 거기서 엄청나게 큰 전나무들에 몹시 압도되었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전나무가 보는 이의 기를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현지 교민이 이런 말을 했다. 수십 미터씩 하늘로 쭉쭉 뻗은 큰 나무지만 거센 바람이 불면 뿌리째 뽑혀서 쓰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곳은 땅도 비옥한데다가 수분 공급까지 원활하다. 그래서 그 지역의 나무들은 나무의 뿌리를 그다지 깊이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뿌리가 얕아도 그렇게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큰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뿌리째 뽑혀 죽고 만다.
나는 캐나다의 전나무를 보면서 하나님 없는 강함의 허상을 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자라난 위압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 뿌리는 미약해서 작은 도전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 모습이다. 반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약함은 어떠한가? 겉보기에는 소박해보이고, 미천해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험난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강한 생명력을 유지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약함의 진정한 힘이다. 겉은 약해 보여도 사실은 가장 강한 나무가 될 수 있는 힘이다.
-전병욱, '약해도 쓰임받을 수 있다'
지옥 관광비자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술도 좋아하고 좀 세상적으로 사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죽으면서도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갈텐데'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죽었는데 베드로 사도가 문 앞에 서서 이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너 천당 갈래, 지옥 갈래?'라고 묻더랍니다. 그 사람은 '아,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어떻게 이걸 나에게 물어본다는 말인가!'
잠시 숨을 돌리고 그 사람은 '그러면 한번 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베드로가 '뭔데?'라고 물으니, 그 사람이 '나 구경 좀 하게 해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러게나'라고 허락하자 그는 먼저 천국을 갔습니다. 흰옷을 입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다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뒤에서 좀 앉아있으니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보니 지옥에는 카지노도 있고 술집도 있고 여자들도 많고 왁자지껄한데 그게 맘에 들었습니다. 베드로 앞에 다시 가서 그랬답니다. '저는 아무래도 지옥체질입니다. 그러니까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래라' 하고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그가 지옥에 가보니까 탄광굴 깊숙이 들어가 뜨거운 불 속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내자에 '이거 좀 틀리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왔던 데가 여기가 아닌데요'라고 따지자, 그때 안내자가 하는 말이 '그때에는 관광비자로 왔고 이번에는 영주권으로 왔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박형용,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래 그거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