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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교과서의 친일문제 인식과 문제점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1. 식민지시기와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눈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이하 ‘대안교과서’)는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체제”에 입각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국내외의 한국인들의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자신들의‘대안교과서’를 한국의 검인정 교과서로 통과시키기 위한 상투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이들의 식민지 역사 인식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대안교과서 관계자들은 현행 검인정 국사교과서가 지나치게 민족주의 관점에 서 있어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편견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고 맹비난한다. 그 결과 민족 감정에 치우쳐 일제 식민지 시기 항일운동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항일운동은 과장되었다기보다 실제 사실보다 훨씬 덜 밝혀져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또 교과서포럼의 주장대로 ‘민족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실 그대로’서술하자면--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을 미화할 필요가 없다면--악질 친일파들이 일제에 빌붙어 항일운동을 악랄하게 탄압한 사실과 해방 이후 특히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어떻게 기득권을 계속 이어왔는지 마땅히 서술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항일운동을 탄압한 악랄한 행위에 가담한 자들의 죄행에 대해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이들을 은폐 또는 미화하고 있다.
사실 항일운동사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며, 항일운동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대안교과서’의 항일운동사 관련 서술을 보면 사실들을 이리 저리 나열하고 있으나, 기초적인 사실 오류는 물론 서술 방식이나 서술 체계 그리고 각각의 항일운동의 성격과 의의에 대한 평가 등은 차마‘교과서의 대안’이라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운동사에 관한 한 고치느니 새로 쓰는 게 낫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 이들은 현행 교과서는 일제가 식민지 민중에 대해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 또한 민족적 편견에 입각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 시기가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으며, 이 시기 한국인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의‘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한국인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라고 새롭게 규정한다. 본문 또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매우 많은 비중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대안교과서’의 필자들은 일제가‘민사령(民事令)’을 통해 개인의 인격적 존엄과 자유로운 행위 그리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활동을 조선인에게도 전면적으로 보장했다고 주장한다. 일제 식민통치 당국의 공권력에 기초한 폭력적 수탈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하게 자본주의 경제교환관계 즉 시장의 논리에 입각한 교환을 통해 부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또 일제는 식민지에 막대한 투자(개발 또는 근대화)를 했지만, 식민통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제는 이익 대신 손해를 보았다는 놀라운 의견을 내놓았다.
한편 조선인들은 이러한 일제의 근대화 시책에 힘입어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일제의 정책에 잘 적응해 훗날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적 기초-근대화 역량 축적-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식민지시기를 대한민국이라는 우량아가 일제 식민지라는 뱃속에서 영양 공급을 잘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던‘대한민국의 임신기간’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결국‘대안교과서’는 일제의 민족 차별과 폭력적 억압의 실상 대신 일제 식민통치의 근대적 효과와 그 성과에 주목하면서 사실상‘식민지근대화론’이나 ‘제국주의 시혜론’에 입각해 식민지시기를 서술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마저 미화하는 마당에 일제의 하수인인 친일파에 대해서 이들이 제대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서술하기란 난망하다 하겠다. 오히려‘대안교과서’는 친일파들을 일제의 식민통치와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 잘 적응해 근대적 능력을 배양하고,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은 ‘근대화 선구자’로 둔갑시키고 있다.
실제로 ‘대안교과서’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해 친일행위를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의 조선인들의 실천 활동으로 해석할 길을 만들어 주고 있다. 특히 지식인· 관료· 자본가 계층의 친일 행위를 근대화 역량의 축적과 건국 후 대한민국의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행위로 정당화하고 나아가, 이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우량아의 DNA 핵심은 바로 이들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식민지 시기‘항일은 독립쟁취, 친일은 건국 역량준비’라는 기괴한 도식이 성립한다. 서로 적대 개념인 항일과 친일이 둘 다 국가 건설을 위한 ‘애국활동’이 된다. 아니 사실 이들은 근본적으로 ‘근대화· 경제성장=문명화’라는 시각에서 역사 사실들을 해석하기 때문에 항일보다는 친일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다.
일제 식민지시기를 경제성장과 조선인 생활이 향상되었다는 보는 한, 이들의 입장에서 항일운동은 근대화의 걸림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제가 ‘문명화’에 쓸 비용을‘항일세력’이 괘씸하게도 소모했으니, 마땅히 이들은 항일운동을 비난해야 자신들의 입장에 충실한 것 아닐까?
참고로‘뉴라이트의 대부’라는 안병직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몇 년 전 국내 유력의 극우 일간지에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 (경제상 비용 손실만 초래하여) 산업화· 경제성장의 걸림돌’이라고 언급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논법이 일제식민지시기라고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물론 ‘대안교과서’가 친일을 노골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다. 친일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최남선· 이광수 · 홍난파 등의 친일 활동과, 일제말기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기’ 각계각층의 조선인들의 전쟁협력행위에 대해서도 제법 비중 있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안교과서’는 최남선을 소개하면서 “1927년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촉탁이 되었고, 1939년 만주국 건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귀국 후 1943년 학도병 지원을 권유하는 강연 활동을 하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의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기도 한다. 홍난파 또한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총독부의 정책에 동조”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광수에 대해서도 본문에서 “그리하여 과거 민족주의 활동으로 이름 높던 많은 지도적 인사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협력자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이광수(李光洙)는 한국인이 일본인이 되어 전쟁에 적극 협력하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에서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쓰고, 국방헌금과 학도출병을 권유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본문 옆에 이광수를 독자적으로 설명하는 박스 안에서“1905년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년 만에 병보석으로 출감,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하여 1939년에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되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의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서술했다.
전시총동원체제를 설명하면서 일제에 대한 조선인 지도자층과 일반 민중 그리고 각 분야의 일제에 대한 협력 행위를 다루고 있다. 현행 검인정 교과서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의 친일 행위를 서술한다고 해서 이 책이 친일문제를 역사적으로 제대로 해명하고 있느냐는 별개이다. 특정 몇몇 사람의 친일 행적만 언급할 뿐 일제 강점기 전반에 걸쳐 친일문제를 구조적 또는 역사적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인들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거나 반대로 미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대안교과서’ 집필자들의 친일문제 인식이 대단히 편향되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총동원체제 하의 조선인들의 각종 전쟁협력행위에 대한 기술도 자세히 살펴보면 친일파에 대해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일제 말 조선인 지도자나 민중 대다수가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론에 입각해‘친일불가피론’론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제에 적극 협력하고 전쟁 동원에 앞장선 친일파들과, 일제의 물자 수탈과 인력 수탈의 대상이 된 일반 조선인들 모두 일제의 침략 전쟁에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협력’했다는 식으로 서술해, 과거 친일파들의 단골 변명인 ‘전민족 친일공범론’을 옹호하고 있다. 이는 가해자인 친일파와 피해자인 조선민중을 일제에 대해 모두 협력했다는 식으로 같이 묶어버려 사실상 친일파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
더구나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앞장선 이들을 대한민국 발전의 주역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친일미화론=친일파 건국기여론’마저 그 속에 품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최근 이들의 이른바 ‘건국절 제정’주장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의 친일문제 인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2. 기업인의 친일 행위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대안교과서’는 기업인의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아예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의 친일 행위조차 ‘조선인 기업의 성장’ 또는 ‘한국 경제성장의 동력’으로만 미화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인 기업이었던 경성방직과 화신(和信)에 대한 다음 서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밑줄은 인용자)
식민지의 경제발전은 일본인과 일본 자본이 주도하였지만, 한국인과 한국인 자본이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인 상인과 기업가 중에는 경제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한 자도 많았다.
한국인 공장은 대체로 종업원 50명 미만의 영세한 규모였다.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 자본 가운데 한국인 자본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하였다. 일본인 공장과 기업은 그 규모가 월등하였다. 그러나 불리한 여건에도 한국인 상공업자들은 공장을 건설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경성방직과 화신은 면장직업과 백화점 부문에서 일본인 기업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평양 일대에서는 한국인 자본이 주도하는 양말 ․ 메리야스 공업과 고무신 ․ 신발 공업이 발달하였다.
경성방직주식회사
전시기에는 원료의 조달에서 제품의 판매에 이르기까지 통제가 심해졌으나, 공정가격이 업체에 유리하게 책정되어 고수익을 올렸다. 전시통제로 사업 확장의 기회가 막히자 이전부터 제품의 중요 수출시장이던 만주로 진출하였다. 1939년 말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100%지분의 자회사로 설립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자본수출이었다. 경성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공업이자,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를 이루었다. 그를 통해 양성된 인력은 해방 후 한국 면방직공업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안교과서’ 주장대로 경성방직의 사장 김연수는 정말 “경제환경의 변화에 잘 대응한 자”로서 “불리한 여건에도 공장을 개척하는 수완”을 발휘해 조선인 경제성장의 신화를 이룬 것이 사실일까. 또 김연수의 형이자 경성방직의 창립자인 김성수를 이들 말대로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한 인물로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1939년 말 경성방직이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100%지분의 자회사로 설립한 사실을 두고, 이를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자본수출”이며, 경성방직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공업이자, 지주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로만 평가해도 괜찮은 것인가? 경성방직을 통해 양성된 인력은 해방 후 “한국 면방직공업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기술로 역사교과서는 자기의 소임을 다한 것일까?
역사학이란 다양한 사실들을 인과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종합 서술하는 학문이다. 또 여기에는 인문과학적 가치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욕망과 이익 추구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누군가의 사소한 이익이 다른 사람에게는 치명적 피해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역사가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자신의 역사관-인간과 사회에 대한 가치관-의 기초 위에서 재구성한다. 그것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엄밀한 사실의 기초 위에서 그리고 인과의 사슬 위에서 인간이 추구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성방직이 경제 성장을 하고 그 인력이 해방 후 대한민국 면방직공업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성방직이 어떻게 해서 일제 강점기 “눈부신 성장”을 했는지, 그리고 “그 눈부신 성장”의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밝혀야 할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경제성장사란 측면에서 보아서는 매우 부분적이며 그 역사적 평가도 매우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 중반 특히 중일전쟁으로 나아가면서 경성방직의 성장은 ‘민족기업으로서의 고난어린 발전’이라기보다 그 사주(社主)인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의 친일 행위에 크게 힘입었다.
‘대안교과서’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자본수출”로 높이 평가하는 경성방직의 자회사 남만주방적주식회사는 1939년 설립되었다. 만주를 무대로 경성방직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남만주방적회사의 설립과 비약적인 발전은 이 시기 김연수의 다음과 같은 엄청난 친일 행적과 이력을 같이 대비하면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김연수의 친일 행적
* 1937년 - 국방헌금 1만 5천원 및 북중국 주둔 일본군 위문금 5천원을 헌납(1937.7). 경기도애국기헌납 발기인(1937).
* 1938년 - 조선총독부 물가위원회 위원(1938.8).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1938.8).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1938.9). 육해군 국방헌금 10만원 헌납(1938.10). 경성군사후원연맹에 후원금 3천원 헌납(1938.11).
* 1939년 - 경성부 지원병후원회 이사(1939.2). 조선총독부 조선중앙방공위원회 임시위원(1939.4). 조선산금협의회 위원(1939.4).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1939.5). 경성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1939.6). 한성은행 취체역(1939.7, 1940.8). 배영동지회 상담역(1939.7). 조선총독부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위원(1939.11). 남만방적주식회사 사장(1939.12).
* 1940년 - 조선총독부 국토계획위원회 위원(1940.10). 일본 東京에서 열린 기원2600년기념축전에 참석(1940.11.10). 조선방적 이사장(1940). 기원2600년축전기념장(1940.10).
* 1941년 - 국민총력운동금 3만원 헌납(1941.1). 동아경제간담회조선위원회 위원(1941.3). 중추원 참의(칙임관대우, 1941.5.12~1944.5.11).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1.5, 1943.9, 1944.6). 흥아보국단 준비위원(1941.8) 및 상임위원 겸 경기도위원(1941.8).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참여(1941.9). 민규식(閔奎植)·박흥식(朴興植) 등과 함께 임전보국단비 20만원 공동 헌납(1941.9.11). 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 겸 상무이사(1941.10). 경성상의(京城商議) 의원(1941.11). 조선방송협회 상무이사(1941.12). 조선사회사업협회 이사(1941).
* 1942년 - 일본군용기 구입비 10만원 헌납(1942.1). 매일신보사 상임취체역(1942.3). 경성부사회사업협회 이사(1942.4).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이임하자 「좀 더 모시고 싶었다」라는 제목의 담화를 매일신보에 발표(1942.5.30).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1942.11). 동경 명치대학에서 학병 권고 강연(1942). 동광생사주식회사 취체역(1942). 조선방적공업조합 조합장(1942).
* 1943년 - 민규식·박흥식 등과 함께 반도청년의 鍊成을 위한 기관설치비를 위해 청소년연성비로 각각 5만원씩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헌납(1943.7.21).
* 1944년 -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 참여(1944.8).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발기인 및 대표(1944.9). 경기도상공경제회설립위원회 위원(1944.9). 선배격려단 간부(1944.11).
* 1945년 - 조선국민의용대 참여(1945). 「감격의 징용제 실시」 발표(매일신보, 1943.8).
요컨대 경성방직 또는 남만주방적회사의 눈부신 성장은 사주인 전시체제기 특급 친일파의 하나로 꼽기에 주저할 필요가 없는 김연수의 친일반민족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 사장인 김연수가 남만주방적회사를 설립할 전후 그가 만주국명예총영사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고, 1941년 친일파의 ‘전국구 대표 조직’이라 할 중추원의 참의가 된 것도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조선인 강제동원에 적극 협력하는 대가로 경성방직은 성장했고, 남만주방적회사를 만주에 설립할 수 있었다. 경성방직의 입장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과 영토 확장은 시장 확대였고 일제의 패망은 시장 상실을 뜻했다. 만주를 시장으로 한 남만주방적회사의 운명 또한 일제와 공동 운명에 있었다. 일제와 공동운명체 그것이 남만주방적회사의 본질이었다.
이것이 뉴라이트가 말하는 사주인 김연수가“불리한 여건에도 공장을 개척하는 수완”이었고, “민족자본”으로 불려지던 경성방직의 실상이었다.
‘대안교과서’가 경성방직과 함께 자랑하고 있는 화신기업의 사주 박흥식(朴興植)의 친일도 살펴보기로 하자. ‘대안교과서’는 화신이 “일본인 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 “치열한 경쟁”의 실상은 무엇이었을까? 박흥식의 행적을 살펴보면 자연 드러난다.
박흥식의 친일 행적
* 1937년 -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1937.7.12~1939). 국방헌금 5천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1937.7.27).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여 국운의 융창을 도모하는 한편, 國家安泰 武運長久의 기원제를 거행하고자 조선인 유지 26명이 발기하여 조직한 기원제거행준비회 발기인(1937.8.23). 경기도애국기헌납발기회 참석(1937.9). 애국경기호 헌납기성회 집행위원(1937.9).
* 1938년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1938.7) 겸 이사(1938.7, 1939.5). 조선총독부 물가위원회 위원(1938.8.19).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회 위원(1938.8.27).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1938.9).
* 1939년 -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이사(1939.2). 배영동지회 상담역(1939.7) 및 배영동지회연맹 상담역(1939.8).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위원(1939.11.2~1943). 종로경찰서신축기성회비 5만원 기부(1939).
* 1940년 - 경성경제통제협력회 상임이사(1940.6). 기계화국방협회 조선지부 이사(1940.7). 일본 東京에서 열린 기원2600년기념축전에 참석(1940.11.10). 충남 부여에 신궁을 건설하자 신궁조영근로봉사단으로 참여한 후(1941.1.9), 「부여성지扶餘聖地 근로봉사기勤勞奉仕記 - 부소산성지扶蘇山城趾와 내선사실內鮮史實」을 기고(삼천리 1941.3).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1.5, 1943.9, 1944.6). 흥아보국단 (설립)준비위원회 준비위원 및 상임위원(1941.8.24). 흥아보국단 경기도위원(1941.8.24). 임전대책협의회 위원(1941.8.25). 삼천리사 주최 임전대책협의회 대좌담회에 참석(1941.8.25).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참여(1941.9.7). 민규식·김연수 등과 함께 임전보국단비 20만원 공동 헌납(1941.9.11). 매일신보에 「使命完遂에 邁進」이라는 담화 발표(1941.9.26). 임전보국단 준비위원으로 임전보국단 결성에 앞서 각지 순회강연대의 연사로 고원훈高元勳과 함께 평양에서 임전보국단의 사명을 역설(1941.10.13). 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 및 상무이사(1941.10). 일본의 태평양전쟁 개전에 맞추어 ‘실업계는 오로지 일본정부의 정책에 전적 신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필승불패의 신념 하에 모든 것을 국가제일주의로 매진할 일대각오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1941.12.8). 화신주식회사·화신상사주식회사 및 동사 종원업 등이 갹출한 국방헌금 3만원을 박흥식이 대표로 종로경찰서에 헌납(1941.12.23). 조선사법보호위원회 산하 경성사법보호위원회 위원(1942.3). 미나미 총독이 이임하자 「영원히 못 잊을 자부慈父」라는 제목의 담화를 매일신보에 발표(1942.5.30). 매일신보에 「民心의 動向은 어떤가」라는 제목 하에 조선인들의 민심에 관한 담화 발표(매일신보 1942.7.1). 신시대사 주최 ‘징병제실시의 의의와 반도의 책무를 말한다’라는 좌담회에 참석(1942.7). 도죠(東條英機) 일본수상의 초청으로 동경에서 개최된 전일본산업경제감담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 및 일본 裕仁天皇 알현(1942.12.15). 일본 천황 알현 후, 매일신보에 「拜謁의 光榮의 感泣」이라는 제목의 담화 발표(매일신보 1942.12.16). 매일신보 감사역(1943.1~). 민규식·김연수 등과 함께 반도청년의 鍊成을 위한 기관설치비를 위해 청소년연성비로 각각 5만원씩 국민총력조선연맹에 헌납(1943.7.21). 국민총력조선연맹 연성부 연성위원회 위원(1943.9). 매일신보에 「배알일주년(拜謁 一週年) - 지성至誠으로 봉공奉公」이라는 담화 발표(매일신보 1943.12.17). 국민총력경기도연맹 參與(1943). 국민총력경성부연맹 이사(1943). 경성 종로관내 유지들이 조직한 종로총궐기위원회 위원(1944.3.6). 매일신보에 「새총독에게 기대 - 생산증강의 적극화」라는 제하의 담화 발표(1944.8.4).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위원장 및 사장(1944.8.17, 설립인가, 1944.10.2 설립). 국민동원총진회 감사(1944.9.24). 경성사법보호위원회 참여(1944). 식량협회 조선지부 이사(1944). 재단법인 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 이사(1944). 대화동맹 심의원(1945.2.11). 매일신보에 「大詔를 받자옵고 - 光榮을 빛내오리, 發奮精勵 聖恩에 奉副」라는 제하의 담화 발표(1945.4.5). 조선비행기공업학교(광신상업학교의 개편) 설립(1945.4). 대의당 위원(1945.6.24). <훈포상> 기원2600년축전기념장(1940.10).
화신은 사주인 박흥식이 총독부 지배 권력에 철저하게 영합하고 그 시책에 앞장섬으로써 자본 축적과 기업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의 도를 넘은 친일행위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그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7항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첫번째 연행·구속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뉴라이트처럼 민족적 관점을 버리자면 박흥식의 행위는 적절하게 시의(時宜)에 부합한 것으로만 쓸 수 있겠다. 기실 뉴라이트가 민족주의 관점을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시기를 근대화 또는 경제성장의 역사라고, 근대화 역량이 축적된 시기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민족이라는 거추장스러운 틀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기 정치· 제· 사회· 문화 등 여러 현상의 변화는 그냥 통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그 안에는 지배민족인 일본민족이 있었고, 피지배민족인 조선민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민족차별정책은 최후에는 민족말살로까지 나아갔다. 적어도 식민지에서 민족차별문제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알 수 있는 핵심 요소이다.
자기 국가가 없다는 것은 자본가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백산상회의 사주인 안희제는 평생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기업은 망하고 자신은 투옥되어 고문을 당해 순국했다. 일제에 협력한 김연수나 박흥식은 자신들은 출세하고 기업은 성장했다. 이것이 식민지 경제의 진실이었다.
뉴라이트는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서도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에게 경제 활동의 자유를 배제하지 않았으며, 한국인 자본가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0% 이상 존재했다는 사실을 들어 한국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다면, 조선인 자본가 비율은 10%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라는 상식을 외면하고 있다. 또 경성방직이나 화신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또 불필요하게 국방헌납을 하지 않고 기업의 자기 성장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산상회와 안희제 선생이 겪어야 했던 ‘식민지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상적인 ‘대안교과서’라면 화신이나 경성방직의 성장만을 높이 칭송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이러한 경제성장이 이들 사주(社主)의 도를 넘은 친일과 이로 인한 조선민중의 희생의 대가였음을 같이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은 외면하고 오로지 자본의 성장 그 자체만을 주목한다. 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떠한 공공의 책임성도 필요없는, 오로지 자본의 증식만이 목적인 “영혼 없는 자본가”가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할 기업인의 상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경성방직이나 화신은 민족자본이라기 보다 정경유착-그것도 제국주의 권력과-과 모랄 헤저드를 기축으로 한 한국자본주의의 천민성의 출발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정경유착과 불법운영으로 물의를 빚는 한국의 재벌들이 왜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를 적극 응원하는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첫댓글 골짜기님은 이런거 싫으시데요~ㅎ
뭐 빨갱이글이라고만 안해도 장족의 발전이죠... 하여간 난 골짜기의 팀킬을 믿쉡니다!
좌파적 역사관과 우파적 역사관을 균형 있게 볼 줄 아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럼 그렇지 니가 무신 ^^
글 올려주면 처 읽고 나서나 씨부려 조평시나
글고 우파는말야 잘났건 못났던간에 민족주의적성향이 강해야지 우파란 소릴듣는단다. 매국에 설렁설렁 꼬리흔드는 강아지가 우파가 아니란다 모자란 꼬마야.
우리나라에 좌파/우파 이런 게 왜 필요한 거지? 그게 왜 필요한 건지 설명부터 해 볼래?
매국 행위를 지지하는 것들을 보수/우파라고 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외에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런 것들은 수구 꼴통들이지, 그게 절대로 보수/우파가 될 수 없다는 거... 이승만 장로 그 개독시키가 처음부터 매국노들과 손잡고 권력을 장악해 놓으니깐, 정말 처 죽일 더럼고 추악한 잡것들이 보수/우파라고 설쳐대는 우스운 꼴... 그 개쉑들이 애국자들을 죄다 <빨갱이>로 몰아 죽였었지?
골짜기님은 극우가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아시는게 필요할듯~우리나라는 극우가 보수행세를하는 경우가 많아서 거짓보수들이 보수인양 행세하고 아무데나 보수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람들과 역사를 속여왔다는것을 분명히 아셨으면~ 조중동이 보수신문? 한겨레가 좌파신문? 민주당이 좌파정당? 교과서포럼이 보수? 이런 엉터리 보수진보가 어디 있을까요?
죄파든 우파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평화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면 찬성이요.
병신.. 기본 개념이나 좀 똑바로 갖추고 씨부리세요
이거 복사 인쇄해서 호회로 뿌릴까보다. 안 잡혀갈 정도로만.
나라와 민족(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우파도 만만치 않음
그나라표기를 정확히해야지 일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