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총선은 '나락퀴즈'인가
나는 잡(雜)이라는 글자를 좋아합니다. 아래는 3년쯤 전에 쓴 내 글의 일부입니다. 그동안 생각이 달라진 게 없으므로 그대로 되살려 옮깁니다.
잡(雜)자는 섞이다, 만나다, 모으다, 어수선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모두, 다, 함께, 같이라는 뜻도 갖춘 좋은 글자다. 우리는 잡채를 잘 먹고 잡곡밥은 좋아하면서도 잡초를 뽑아내려 하고, 잡상인을 못 들어오게 하고, 잡부나 잡일을 우습게 알고, 잡생각 잡담을 경계하기 일쑤다. 하지만 음식도 잡탕이 맛있고 학문이든 식물이든 잡종 교배가 이루어져야 다양하고 건강해진다. -2021.11.24. ‘즐거운 세상’
여기에 몇 마디 덧붙입니다. 잡념의 모색과 수련을 거쳐야 정념(正念)과 일념(一念)을 이루게 됩니다. 폭넓은 교양을 갖춘 잡학이 하나에만 밝아 다름을 용납하지 않는 학문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雜(잡)이라는 글자에는 순수하지 않다, 문란하다는 뜻도 있지만 한자자전은 맨 먼저 五彩相會(오채상회), ‘다섯 가지 색깔이 서로 만난다(어울린다)’는 말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청황적백흑, 다섯 가지 색은 모든 색깔의 총칭입니다. ‘여러 색깔이 뒤섞여 빛난다’는 잡영(雜英)이라는 고마운 말도 있습니다.
인조실록에는 ‘잡군자(雜君子)’가 나옵니다. 인조반정 공신이며 병자호란 9년 전 정묘호란 때 이미 화의를 주장했던 이귀(李貴, 1557~1633)는 사관의 표현에 의하면 지조가 단정하지 못하고 언어에 법도가 없었습니다. 경연에서 왕에게 할 말을 다하고 벼슬아치들에게 거침없이 욕을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충분(忠憤)만은 따를 자가 없어 그를 잡군자(雜君子)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그를 이렇게 부른 것은 태도가 낯설고 이상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잡스러워서 역사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언젠가 단체소풍을 가는 버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정차했을 때, 물건을 파는 여인이 “잡상인입니다” 하면서 차에 올라왔습니다. 잡상인을 자처하는데 누가 냉큼 쫓아내겠습니까? 사람들이 재미있어해 짧은 시간에 다른 상인들보다 물건을 더 팔고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잡스러운’ 일과 인물에 대해 생각하면서 지금의 우리나라를 살펴보면 걱정스럽고 암담하다는 말만 하게 됩니다. 정치에서 흔히 거론하는 색깔론을 들어 말하자면 오색이 함께 어우러지기는커녕 고루하고 배타적인 단일색의 필사적 쟁투만 날로 격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색깔의 사생결단이 알고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합니다.
지금 여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은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30년간 사용해온 파랑을 버리고 빨강으로 상징색을 교체했습니다. 보수의 색깔은 한나라당 때까지 파란색이었고, 빨강은 불온의 상징이었는데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는 모양새로 총선에서 승리했습니다. 그 뒤 대선까지 이겨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됐지요. 지금의 국민의힘은 지난해 말 ‘ㄱㅎ’ 로고와 파란색의 결합을 시도했다가 단일하고 강렬한 빨간색으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지금 야당은 파랑입니다. 1987년 평화민주당을 시작으로 녹색과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삼았던 민주당은 2012년 총선·대선에서 잇따라 패한 뒤 지금 여당이 버린 파랑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종교배(異種交配)를 시도하며 새누리당을 흉내 낸다."는 비판까지 들었지만 나름대로 중도로 외연을 넓혀나갔고, 2016년 총선에서 제1당이 됐습니다. 바다파랑(새정치민주연합)에서 이니블루(문재인 대표)를 거쳐 겨울쿨톤 블루(이재명 대표)까지 민주당은 파랑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와 야가 사전 합의도 없이 서로 색을 바꾼 것은 세계 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일인데, 지금은 모두 자신들의 과거를 잊고 단일한 색조, 고정된 사고만 고집하는 형국입니다. 심지어 정치인들은 넥타이 색깔을 고르는 것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국민의힘 의원이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민주당 의원이 빨간색 넥타이를 맨 것을 본 적 있습니까? 정치인들 중에서는 대통령만이 그나마 자유롭게(완전한 것도 아니지만) 넥타이 색깔을 고르는 상황입니다.
9일 앞으로 다가온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후보들의 색깔이 더 다양해졌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이번에도 빨강과 파랑, 이 단일 원색의 대결 구도가 공고합니다. 피의자, 범법자들이 비사법적 방법으로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나섬에 따라 소위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자칫 ‘범죄인들의 소굴’이 돼버릴 위험성도 커졌습니다. 21대 국회에서 제법 논의가 되는 것 같았던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는 물 건너갈 공산이 큽니다.
우리 동네는 의원 후보자들의 색깔 쟁투가 다른 곳보다 훨씬 단순하다.
정당은 정권 획득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며 선거는 국민의 참여를 통해 나라를 이끌어가는 세력을 선택하는 절차입니다. 그러니 선거과정의 각축과 투쟁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선거 후에는 공정하고 건전한 견제와 협력, 절충을 통해 나라와 국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하는 게 정상적인 정치인들의 도리이며 의무일 텐데 우리나라는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내편이 아닌 상대는 없애야 할 적이나 원수로만 생각하는 정치가 고질이 돼버렸습니다.
최근 서울대 공대 신입생 환영행사에서는 1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사진이 있는 '파랑'과 2번 윤석열 대통령 사진이 있는 ‘빨강’ 중 좋아하는 색깔 하나를 고르라는 퀴즈가 등장했습니다. 답을 대면 바로 정치성향이 드러나는 게임에 난감해하는 모습이 폭소를 자아내는 ‘나락퀴즈’였습니다. 어떤 답을 고르든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4·10선거는 국민들에게 이렇게 나락퀴즈를 들이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3월 25일(현지시각) 인도 전역에서 열린 홀리(Holi) 축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로 형형색색의 가루를 뿌리거나 물감을 뒤집어쓰고 춤추며 축제를 즐겼습니다. 힌두교 3대 축제 중 하나인 홀리 축제는 힌두력으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입니다. 우리는 인도를 우습게 알지만 신분과 성별 종교를 구별하지 않고 어울리는 ‘장관’을 우리는 의식(儀式)으로나 제도 관습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가까워지니 이런 안타까움이 점점 더 커져갑니다. 파렴치 몰염치한 비리 범법자들이 다수 선택되면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질 거 같아서 걱정입니다.
이재명, 장제원, 권성동, 김남국 등 여야의 국회의원 중 존경하는 선배를 고르라는 중앙대 학생들의 '나락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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