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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대화 도중 “내 꿈은 돈 많은 백수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진심도 조금은 있는 듯해서 씁쓸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지내다 죽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삶의 목표는 가지고 있지만 하루가 기쁘지 않고 의미 없게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각자가 가진 꿈이 죽음을 이길 수 없는 꿈들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과 함께 할 때 가장 강렬해집니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 삶의 가장 큰 의욕을 발휘합니다.
방에서 시체놀이하며 뒹구는 사람은 죽을 위험도 없지만 삶도 의욕적이지 못합니다.
오늘이 의욕이 넘치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서는 꿈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들이 백인들과 함께 같은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죽음의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실제로 살해당하기는 했지만 그가 산 하루하루의 강렬한 삶은
보통 사람들이 평생 단 하루도 느껴보지 못할 살아있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애플의 전설 스티브 잡스도 아침마다 ‘오늘 내가 죽는다 해도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진정 삶에서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꿈을 가지는 것이 인생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돈 많은 백수가 되는 꿈이 오늘 닥쳐올 죽음을 감당할 수 있는 꿈일까요?
우리는 꿈을 정화해야 합니다.
케빈 두련트, 그는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농구팀의 멤버이며 미국 NBA의 2013-2014시즌 MVP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연설을 하였습니다.
“... 마지막으로 나의 어머니에게 ... 우리가 해낼지 몰랐어요...
엄마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 형을 가지셨죠.
그리고 3년 뒤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어요.
두 아이를 가진 미혼모였던 엄마는 겨우 21살밖에 안 됐죠.
우리가 여기저기 쫓기듯 이사를 다닐 때 아무도 우리가 이 자리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죠.
우리의 힘으로 말이죠.
저의 가장 소중한 추억 중 하나는 우리가 처음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에요.
침대도 없고, 가구도 아무것도 없었죠.
우리는 그저 거실에 앉아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해냈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좋은 일이 생길 때면 무엇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는지 돌아봅니다.
엄마는 무더운 여름,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제가 언덕을 뛰어넘게 하셨고 팔굽혀펴기를 하게 하셨습니다.
코트의 바로 옆에서 8,9살인 저를 목놓아 응원해주셨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을 때에도 엄마는 끊임없이 믿음을 주셨고 길거리의 노숙자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따뜻한 옷을 입혀주시고, 식탁에 음식을 차려주시고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을 때에도 엄마는 배부르다며 너희들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굶주린 배로 잠이 드셨죠.
어머니는 저희를 위해 항상 희생하셨어요.
어머니가 MVP이십니다.”
[출처 : 포크포크, 세계를 감동시킨 어느 MVP 선수의 레전드 수상소감]
이 수상소감을 말하며 케빈은 자신도 울었고 앞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도 울었고 주위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케빈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은 자신의 꿈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꿈을 대신 꿔주고 있었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꾸는 꿈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군가의 꿈에 의해 태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내동댕이치기 위해 자녀를 낳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를 낳는다면 그 자녀에 대한 꿈은 부모가 먼저 꾸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준 부모의 꿈을 찾는 것이 잘 살기 위해 가장 좋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을 존재하게 만들어준 분들은 사실상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조했을 뿐이지 우리를 존재하게 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부모는 우리 눈이 빠지면 다시 만들어 넣어줄 수 없지만 하느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우리 존재 원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존재하게 했다면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는 세상을 구원하는 꿈을 가지고 계셨고,
성모님을 통해서는 그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게 하는 꿈을 가지고 계셨으며,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는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을 맞아들을 준비를 시키게 하시는 꿈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런 특별하신 분들에게만 그분들에게 맞는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 때 어떤 의도 없이 만드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며 우리 각자에게 어떤 계획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 꿈을 찾아낼 때 죽음도 두렵지 않은 참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2007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폴란드 여성 이레나 센들러가 있습니다.
그녀는 1942년 유대인 구조대인 제고타(Zegota)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당시 바르샤바 시청의 사회복지사로 있었는데
아기들이 있는 수용소에 장티푸스가 창궐해 위생검사를 하러 들어가서
그 많은 아기들을 공구함이나 관, 혹은 구급차 같은 수단으로 빼돌려 고아원, 병원, 수녀원 등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들에게 아리아계 이름으로 된 가짜 출생증명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이들이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아이들의 진짜 이름을 적은 명부를 병이나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1943년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발이 부러질 정도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센들러는 함께 일한 동료들의 이름과 그녀가 구한 아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센들러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다른 제고타 회원들이 그녀의 석방을 위해 게슈타포 장교들을 매수함으로써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센들러가 구한 아기들의 숫자는 2500여명에 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행을 알리지 않고 오랜 시간 조용히 살다가 타인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그런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명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명을 느껴야 위험을 감수할 수 있지 그냥 결심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소명은 스스로가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존재하게 만들어준 누군가로부터 주어집니다.
무언가를 만든 사람이 그 무언가가 어떻게 쓰여야하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나를 만드신 분의 기대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만드신 분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 큰 애정을 가지고 기대하시며
또 그 기대가 성취되기를 바라며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뜻을 명확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으로 시비를 겁니다.
어떤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안다는 것만 밝힙니다.
자신은 조금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을 준비하기 위해 물로 세례를 줄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첫 제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들을 예수님께 이끌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명확히 깨달을 때
세상에서 누구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우선 내가 나에게 원하는 모든 것들을 버려봐야 합니다.
그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는 곳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바랄 수 있는 나의 모든 기대가 사라졌을 때,
절실하게 주님의 목소리를 찾게 되고 그때서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철저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숙고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바로 세상과의 싸움입니다.
하느님은 하늘로 향하게 만들지만
세상은 더 밑으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땅의 것들이 하늘로 오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고
그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세상의 흐름과 싸우고 있다면 나는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이고,
수년간 그 노력이 지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찾은 사람입니다.
매일 사막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처음엔 아무도 그의 가방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몰랐습니다.
장소는 Majuli섬입니다.
한때 이곳은 야생 동물들이 뛰어놀던 풍성한 오아시스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무를 베기 시작하면서 사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파옝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황폐해져가는 고향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1979년 그는 무언가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는 매일 황량해진 땅을 찾아 나무를 심었습니다.
3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의 숲은 이제 여의도 면적의 2배 이상으로 커졌습니다.
식물들이 자라면서 야생동물들도 삶의 터전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 곳엔 115마리의 코끼리, 그리고 코뿔소, 사슴 등이 살고 있습니다.
파옝 덕분에 170만평의 죽은 땅이 다시 울창한 숲이 된 것입니다.
[출처: 포크포크, 매일 사막에 나무를 심는 남자]
그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매일 사막에 나무를 심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 나무들을 베려고 하면 자기를 먼저 베야 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다시 숲이 되게 만드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소명입니다.
이런 이들이 지치지 않고 세상을 바꿉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소명을 찾는 이들을 만나러 오십니다.
구약의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은 내가 만들어 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꾸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꿈을 통해 요셉을 향한 당신의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요셉은 그 꿈의 성취를 위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었고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만들어졌다면 반드시 존재하게 된 원인이 있고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찾아야만 죽음도 넘어서는 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도 참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 세례자 요한처럼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전에 성지순례로 요르단에 가서 겪었던 일 하나가 떠올려집니다.
이스라엘을 거쳐서 요르단에 입국했는데 글쎄 제가 가지고 갔던 여행 가방의 지퍼(zipper)가 고장 나서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지순례 기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마침 호텔 맞은편에 여러 물건들을 파는 상가가 보입니다.
이 상가는 화려한 백화점이 아니라, 우리나라 7~80년대의 분위기를 내는 잡화상들이 가득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몇 군데를 둘러보면서 가진 생각은 가격을 무조건 깎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호객 행위도 대단했고, 또 이런 곳에 위치한 상점들은 손님들이 깎을 것을 대비해서 먼저 비싸게 가격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마음에 드는 가방을 발견했습니다.
가격표를 보니 55달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구입하는 가격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저렴하면서도 동시에 괜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구입하려고 했지만 혹시나 해서 짧은 영어 실력으로 “Discount Please~~”(깎아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주 흔쾌히 “Okey!!”(좋아요)라고 말하면서 25달러만 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말 하지 않고 25달러를 주고 구입한 가방을 들고서 기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제 생각에 싸다는 생각에 깎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구입했다면 어떠했을까 싶더군요.
딱 두 단어를 말했을 뿐인데, 자그마치 30달러를 깎을 수 있었습니다.
순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내 자신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주는 말도 있으며, 내게 이익이 아닌 오히려 큰 손해를 가져다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말을 해야 하겠지요.
문제는 자신만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함께 하는 사랑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내 마음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함께 기쁨을 간직하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도록 합니다.
대림초의 불을 세 개 밝힌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당시 그는 사람들에게 ‘엘리야, 예언자’등의 호칭을 받을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지요.
이 정도면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맞다.”라고만 말해도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 1,20)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동시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27)라는 큰 겸손의 말을 합니다.
보통은 자신이 짐짓 뛰어다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말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제1독서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이사 61,10)
맞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말이 아닌, 주님을 위한 말을 세상에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말은 과연 어떤 말일까요?
세례자 요한처럼 큰 기쁨 안에서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를 알리는 말을 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를 통해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1테살 5,16)
-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오늘은 ‘기쁨주일’(gaudete) 입니다.
‘핑크 빛’ 대림초에 불이 붙여졌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태웁니다.
빛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기쁨입니다.
<입당송>에서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필리 4,4.5 참조)
<제1독서>에서도 이사야 예언자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이사 61,10-11)
<화답송>에서도 성모님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루카 1,46)
그렇습니다.
이토록 오늘 말씀은 기쁨의 선포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나서야 하는 곳은 당혹스럽게도 광야입니다.
우리는 설레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의 핑크빛 옷을 입고서 어처구니없게도 텅 빈 광야로 나서야 합니다.
그곳에서 광야처럼 텅 빈 사람, 요한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증언하며 기뻐하였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요한 3,29)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이 솟구쳐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솟구쳐야 할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요한은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그저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비워져 있기에, 참된 소리가 되었습니다.
비어 있는 자 만이 온전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온전히 비어 있기에 소리를 낼 수 있는 피리와 같습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이는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입니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저 비어 있는 피리에 지나지 않으며, 글을 쓰는 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 비어있는 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말이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 퍼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어졌기에 빛을 반겨 맞아들였고,
들어온 그 빛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빛의 참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비어져 있음은 겸손과 낮춤으로 드러납니다.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라, 그저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한 그는
이제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한편, 그는 자신이 비어져 있는지라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분을 알아보고서 선포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26)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건만, 우리는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5)
그렇습니다.
어둠은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들어와 눈이 열려야 그분을 보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을 뜨고도 “그들과 함께 걸으시는” (루카 24,15)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주시자, 마침내 “눈이 열려”(루카 24,31)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 영의 눈이 열려면, 보게 됩니다.
곧 빛이 비추어 눈이 열리는 것이 “깨어남”입니다.
오늘 우리는 “깨어있기” 위해서, 먼저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도 함께 깨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필리 4.4)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의 현존을 보게 되면,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기쁨’ 안에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 15,11)
바로 지금이 그렇게 깨어나야 할 대림의 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로마 13,11-12)
그렇습니다.
이제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곧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구원은총”에 깨어나고,
동시에 ‘아직 아니’ 완성된 “그리스도의 승리의 개선행진”(2코린 2,14)을 동행하시는 성령께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임마누엘 주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한 3,16)
이 시간 내어주는 삶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사랑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자선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한 방법입니다.
가난한 사람, 고통 받고 소외당한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 내어주는 사랑을 사는 것이 자선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선을 되도록 많이 해야 합니다.
자선을 하되 올바른 지향으로 하느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도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선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암흑에 빠지지 않게 해 줍니다.
신명기 24장 19절에서는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을 보면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4,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라면 자선은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신명 15,10) 기쁜 마음으로(로마 12,8)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고린13,3).
그러므로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8)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2코린 9,10)
그러나 만약 이만큼 도우면 나에게 그만한 대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그것은 자선이 아니라 장사입니다.
그저 베풀 수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태 19,21)
성탄이 오기 전 자선을 베풀어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에는 우리의 옷장이나 서랍에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한 가지씩 골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연말 연시를 맞이하여 선물을 주고받는데, 버림받은 예수님께도 한 가지씩 준비하시면 하느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배고픈 예수님, 옷 없는 예수님, 아파하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을 성심성의 것 받들어 모시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힘들어하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선물을 서둘러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내 눈썹이 내 눈 가까이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내 코가 눈 가까이 있는데도 또한 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주 가까이 있는데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들은 보는데 내가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입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나를 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너희 가운데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26)고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지만 여전히 그분을 몰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자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유한준)고 했습니다.
관심을 갖는 만큼 보이고 또 아는 만큼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이나 관심 있는 사람은 금방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옆에 있어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십시오(이사 61,10).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7-18)
요한의 삶도 살펴봅니다.
요한은 조연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은 없기에 그는 주연을 위해 세례를 주는 일을 포기했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하며 그분을 따를 것을 권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주연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조연을 하면서도 하느님 눈에 꼭 듭니다.
철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대림절입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실까요?
1)천당
2)지옥
예수님께서는 지옥에 계신답니다.
온갖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대신하시고자 지옥에 계십니다.
험하고 어려운 곳을 찾아다니시며 어둡고 더럽다고 생각되는 곳, 괄시 받고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바라고 계십니다.
자선을 베풀어 그분의 사랑에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을 송두리째 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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