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의 유학생활, 그리고 패션 매거진을 통해 이름만 들어왔던 유명 브랜드의 옷을 직접 디자인하는 일…패션스터디인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 꿔 보았을 법한 일이죠? 그러나 막연히 꿈꿔온 것과는 달리 외국 유학을 떠나는 것도, 더군다나 현지에서 취업하는 길도 도무지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방향을 찾을 수 없는 미로처럼 아득하게만 여겨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패션스터디 게시판에도 항상 유학과 외국에서의 취업에 대한 궁금증을 담은 질문들이 쇄도하지만, 정작 시원한 대답을 드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답니다.
때마침 이태리 피렌체의 유명한 패션 스쿨인 폴리모다(Polimoda)를 졸업하고 현재 휴고보스(HUGO BOSS)의 블랙/오렌지/그린 라벨을 비롯, 캘빈클라인 진즈(Calvin Klein Jeans)와, 장 폴 골티에 진즈(J P Gaultier Jeans)의 디자인을 맡아 하고 있는 스튜디오 탈리아니 스타일 & 디자인(STUDIO TALIANI STYLE & DESIGN)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김유나씨가 여름휴가를 맞이해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패션스터디가 취재에 나섰습니다.
김유나씨는 국민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2002년 9월 피렌체의 패션스쿨 폴리모다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유학을 결심한 이후 6개월 간 한국에서 어학을 준비한 그는 대부분의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몇 학년이라도 좋으니 입학허가만 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편입심사를 앞두고 김유나씨가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포트폴리오였습니다. 어학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터라, 졸업작품을 준비하면서 만들어둔 포트폴리오는 물론이고 주변 친구들의 포트폴리오와 작품들을 모두 공수해 편입학 심사를 담당하는 교수님 앞에 갔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한국에서 네가 배웠던 모든 결과물을 가져오라’며 까다롭게 굴던 그곳 교수가 막상 김유나씨가 준비해 간 포트폴리오를 훑어본 이후 너무나 수월하게 3학년으로의 편입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너는 한국에서 옷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운 것 같은데, 뭣하러 여기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려고 하느냐?”고 반문까지 했다고 하는군요.
결국 소원하던 폴리모다에의 동참에 성공한 그는 그러나 9월 학기 시작과 함께 새롭게 합류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가 개최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해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개성 강하고 스스로의 감각에 자부심이 높은 현지 학생들 사이에서, 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에서 온 여학생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으니까요. 나름대로 감각과 개성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그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의 서먹한 시간이 지나고 능숙한 영어와 이태리어 구사력을 바탕으로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한 김유나씨는 곧 학교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는 2002년 11월 초 이태리 패션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된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 공모전에서 폴리모다를 대표하는 Best 5에 선발되어 섬유산업으로 유명한 이태리 북부 지방 꼬모(Como)에서 실물 제작한 작품을 전시하는 행운의 과정이 포함되었습니다. 행운이라기보다는 본인 스스로의 재능과 악착 같은 노력 덕분이었겠지만요. 더군다나 폴리모다의 대표주자를 뽑는 1차 일러스트 심사에서 1위로 선발돼, 그때까지 그의 존재를 은근히 무시해왔던 학교 친구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이 공모전 이후에야 비로소 김유나씨를 바라보는 학교 친구들의 시선에 “동지”로써의 동질감, 또는 경외감이 섞여 있는 듯 느껴졌다고 합니다.
폴리모다에서의 졸업 작품전을 마친 이후 독일 아디다스 본사에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회신을 기다리던 그는 현재 다니고 있는 STUDIO TALIANI STYLE & DESIGN의 사장인 마우로 탈리아니씨를 만나게 됩니다.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우연히 인사를 나누게 된 탈리아니 사장은 김유나씨의 독특한 스타일과 인상에 관심을 갖고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이태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라고 하는군요. 일반적으로 학교의 주선으로 패션업체와 인터뷰를 갖고 인턴쉽까지는 큰 무리 없이 밟게 되나, 그 이후 정식 사원으로 입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순전히 본인의 능력에 달렸다고 하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김유나씨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우연치 않게 입사하게 된 STUDIO TALIANI STYLE & DESIGN은 의외로 유럽의 유명 브랜드들로부터 인정 받는 감각 있고 탄탄한 회사였습니다. 국내 업계와 비교하자면 일종의 프로모션 업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이탈리아의 프로모션 업체는 단순 납품만을 하는 “하청” 개념이 아닌 트렌드와 디자인까지 먼저 제안하는 회사들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도 스튜디오 탈리아니 스타일 앤 디자인은 앞선 트렌드를 제시하는 “트렌드북”을 만드는 회사로도 유명한데요. 자사 브랜드인 ‘꼬르뽀노베(Corponove)’ 홍보를 위해 만들기 시작했던 트렌드북이 유명 브랜드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으면서, 타 브랜드 제품의 디자인 전개를 위해 트렌드를 제안하기도 합니다. 프레타포르테와 같은 collection을 앞둔 브랜드에 디자인 트렌드를 제시하는 컨설팅업무 또한 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튜디오 탈리아니에서 진행하는 유명 브랜드로는 휴고보스(HUGO BOSS)의 블랙/오렌지/그린 라벨과 캘빈클라인 진즈(Calvin Klein Jeans), 장 폴 골티에 진즈(J P Gaultier Jeans), 트루사르디, 스위스 브랜드인 젯셋(JET SET) 등이 있습니다. 유명 브랜드에서도 스포르띠바 라인, 즉 캐주얼한 라인들을 주로 진행한다고 하는군요.
디자이너 Jean`s Paul Gaultier의 파리 프레타포르테 쇼룸을 위해 김유나씨가 제작한 작품들
김유나씨는 이곳에서 남성복과 여성복 디자인, 그리고 이미지 트렌드 북 제작 작업, 리폼 등을 통한 샘플 제작, 그래픽 작업 등 “뭐든지 다”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패션업계라고 해서 우리나라에 비해 근무여건이 특별히 좋지 만은 않아요. 이곳도 바쁠 때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해야 하고, 주 5일 근무라고 하지만 주말에도 일해야 할 때가 있고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다 해야만 하거든요.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지요.”
패션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이태리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김유나씨는 “보수를 얘기하는 거라면, 그다지 센 편은 아니예요.” 라고 대답합니다. “이태리에서 디자이너를 하고 있다면 다들 조르지오 아르마니나 베르사체 같은 유명 디자이너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곳에서도 그렇게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그만한 보수를 받는 사람은 드물어요. 이 곳 이태리에서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브랜드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디자이너가 꽤 되지만 실제로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니까요. 저도 제 수입으로 집세와 생활비를 빼고 나면 거의 남는 게 없을 정도인 걸요.”
패션업계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과중한 업무>와 <박봉>의 꼬리표를 뗄 수 없는가 봅니다.
그렇지만 김유나씨는 “꿈”이 있기에 현재의 생활이 즐겁다고 말합니다.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무렵부터 ‘카피’를 일삼을 수밖에 없는 국내 현실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유학을 결심했고, 그래서 떠나왔기에 웬만한 고생과 어려움은 각오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스위스 브랜드 Jet Set을 위해 리폼한 샘플과 김유나씨가 직접 자른 회사 동료의 헤어
“제 이름을 건 브랜드를 갖는 것이 최종 목표예요.”
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그는, 때문에 고되지만 지금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고 합니다.
이태리 또는 프랑스나 영국 등 외국으로의 유학과 현지에서의 취업을 꿈꾸는 패션스터디인들에게 김유나씨는 말합니다.
“환상을 깨고 오세요.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그만큼 반드시 필요한 말입니다. 어디든 시작은 힘들고 고되고, 또 꾀죄죄하기 마련이예요. 처음부터 우아하고 싶다면 돈이 아주 많은 부모님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원을 받아야 할거예요. 그렇다고 모두 다 잘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그리고 열린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지나치게 한국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글로벌 문화가 혼재된 이곳에서 절대로 융화되지 못합니다. 이태리든, 프랑스이든, 영국이든, 그 나라 브랜드가 유명한 것은 이태리적이고, 프랑스적이고, 영국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브랜드들에서 일하고 싶다면 그 브랜드에 본인을 맞춰야죠.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공부 또한 부지런히 해야만 합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서 그곳 사람들과 섞이고 함께 일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김유나씨는 개성적인 외모와는 달리 그곳 사람들과의 “융화”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패션산업이라는 것은 절대로 “혼자”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아쉬울 것 없는 그곳 현지인들이 먼저 다가와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알리고 친해지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회사 동료들과의 한때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마세요. 처음 제가 폴리모다에 들어와서 느꼈고, 이곳의 많은 한국인 친구들도 경험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감각과 실력이 이곳 학생들에 비해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거든요. 얼마만큼 융화되고 익숙해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일 뿐이예요. 자신감을 갖고 내 것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면 이곳에도 분명 우리가 설 땅이 있습니다.”
자신있고 당당한 김유나씨의 모습을 보고 저 스스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지금 김유나씨는 스튜디오 탈리아니에서 장민영, 김영진 등 두 명의 한국인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이 중 김영진씨는 김유나씨와 같은 국민대 의상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친한 친구라고 하는군요. 그래픽 작업을 담당했던 일본인 디자이너가 그만두면서 김유나씨의 추천으로 한국에서 일하던 김영진씨를 영입하게 된 것이지요. 언어와 문화의 장벽에 맞서 실력으로 힘겹게 승부하고 있는 김영진씨는 그러나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태리에서의 생활이 즐겁다고 합니다.
타국에서 씩씩하게 앞날을 개척하고 있는 이들 젊은 디자이너에게 격려와 부러움의 박수를 보내 봅니다.
첫댓글 멋있다 나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야지 ^^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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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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