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미(美)
하회 북촌댁
[ 河回 北村宅 ]
문화재지정 | 중요민속자료 |
주소 |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06 |
하회마을은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크게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이 때문에 북촌 중심에 자리 잡은 가장 큰 가옥인 화경당(和敬堂)이 자연스레 북촌댁이라 불리게 되었다. 대지 1,700여 평에 72칸의 대저택인 북촌댁은 하회마을 가옥 가운데 가장 크다. 강 건너 부용대에서 마을을 내려다보았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너른 지붕이 바로 북촌댁의 안채이다.
고래등처럼 널찍한 북촌댁 안채 지붕
7대에 걸쳐 200여 년간 부와 명예를 누린 북촌댁의 역사는 1797년에 현재의 자리에 류사춘(柳師春)이 집을 짓고 만수당(萬壽堂)이란 이름을 붙이며 시작되었다. 이후 류사춘의 아들 류이좌(柳台佐)가 집을 중수하면서 화경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현재의 북촌댁은 류도성(柳道性)이 화경당의 규모를 크게 키워 증축한 것이다. 류도성이 집을 증축할 당시의 흥미로운 일화가 지금껏 전해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859년 여름, 상갓집에 조문을 갔다 돌아오던 마을 사람 수십 명이 탄 배가 홍수로 갑자기 불어난 물살 때문에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경상도도사를 지냈던 류도성은 강변에 건조 중이던 화경당을 증축하고자 3년 전부터 정성스레 준비했던 건축자재를 내어 주어 일부를 강물에 띄우는 뗏목으로 사용하여 동네 사람들을 구하고 일부는 불을 붙여 밤에도 환하게 구조 작업을 할 수 있게 조치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이 나무들을 마을 사람을 위해 단숨에 꺼내온 그의 도량과 배포가 지금도 북촌댁과 함께 전해지고 있다.
마을길 중간 즈음에서 북쪽 방향으로 들어서면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골목길과 수평으로 나란히 늘어선 북촌댁의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돌과 흙을 한 켜씩 번갈아 쌓아 올린 토석담장 옆에 기와와 백토를 같은 방식으로 쌓아 올린 흙벽담장이 나란히 세워져 있어 전통 담장의 다양한 모습을 한곳에서 살필 수 있다.
북촌댁으로 가는 길에 만난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 운치를 더하는 전통 담장
북촌댁의 대문채는 양진당, 충효당과는 다른 건축기법으로 지어졌다. 양진당과 충효당은 대문채 앞에 앞마당이 있어 대문이 골목길과 바로 접하지 않지만 북촌댁은 골목길과 바로 접하기 때문에 화재와 사고에 쉽게 노출될 수 있어 이를 막기 위한 화방벽으로 지어졌다. 기둥 골격이 그대로 노출되는 양진당, 충효당의 심벽과 달리 북촌댁의 화방벽은 외부를 장식하는 효과도 있는데, 둥근 강돌 위에 암기와를 나란히 쌓아 선을 강조하고 줄눈을 흰색 양성토로 마무리해 회청색의 기와 빛깔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화방벽으로 꾸며진 북촌댁의 대문채
북촌댁은 그 규모에 맞게 사랑이 셋이나 된다. 큰사랑 북촌유거(北村幽居)는 가장 웃어른인 할아버지께서 거주하시거나 간혹 외빈 접객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중간사랑 화경당은 아버지가, 작은사랑 수신와(須愼窩)는 손자가 거처했다.
정면 일곱 칸 측면 세 칸 크기의 별당인 북촌유거는 제일 왼쪽에 부엌, 그 옆으로 두 칸 크기의 방, 한 칸 크기의 방이 연이어 있고, 그 옆으로 두 칸 크기의 대청, 한 칸 크기의 누마루가 차례로 이어진 평면구조로 지어졌다. 누마루에 앉으면 하회마을의 3대 풍광을 동시에 볼 수 있는데, 동쪽으로는 하회의 주산(主山)인 화산(花山)을, 북쪽으로는 부용대와 낙동강을, 남쪽으로는 남산과 병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툇마루는 반 칸 뒤쪽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북촌유거가 남향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여름에 집 안으로 뜨거운 햇볕이 덜 들어오게 배려한 것이다. 북촌유거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는데 여기에 하얀 마사토가 깔려 있어 달 밝은 밤에 내려다보면 눈이 소복이 쌓인 것처럼 느껴진다.
북촌유거 뒤편의 뜰에는 수령이 300년 넘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와 소나무의 휘어진 모습이 닮아 ‘물돌이동 소나무’라 불린다. 북촌댁이 지금의 위치로 분가해 나올 때 류사춘이 집안의 융성과 일가의 번영을 기원하며 하회의 주산인 화산에서 옮겨와 심은 것이라고 한다.
큰사랑 북촌유거의 전경
북촌댁의 너른 사랑마당
북촌유거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의 형상을 닮은 ‘回자’ 모양의 소나무
중간사랑과 작은사랑인 화경당과 수신와는 한 건물에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가족과 친족 간에 화목하고 임금과 어른을 공경하라는 뜻을 지닌 화경당은 정면 두 칸 방, 한 칸 대청과 전면을 반 칸 물러 앉히고 툇마루를 두었으며, 특이하게 대청 오른쪽으로 한 자 정도 높게 쪽마루를 두고 난간을 둘렀다. 이렇게 대청보다 난간을 높인 것은 난간 본래의 목적보다는 북촌유거에 머무시는 웃어른이 대청에 계시는 모습을 아랫사람이 직접 바라볼 수 없게끔 한 시각 차단의 목적이 더 강하다.
두 칸 방 뒤에는 안채 마당을 향해 돌출된 벽장과 안채로 통하는 은폐된 통로를 두었으며, 대청마루 뒤에는 한 칸 크기의 서고와 다락을 두었다. 다락 아래는 큰사랑채로 나가는 문의 통로가 된다.
북촌유거에서 바라다 보이는 화경당의 벽에는 음양의 조화를 나타낸 기하문양이 암수 기와로 새겨져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날개채 아래로 통하도록 꾸며져 있다. 물론 이와 맞은편에 사당을 찾은 손님이나 사랑마당에서 일하는 하인이 안채를 들여다볼 수 없도록 내외벽이 세워져 있는데, 이 벽은 중방 아래에는 널빤지를 댄 판벽으로 만들어놓았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 위에는 두 칸 크기의 다락을 두었으며, 방과 대청 사이에는 필요에 따라 완전 개방할 수 있는 4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았다. 화경당의 편액 글씨는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를 집자하여 각(刻)한 것이라 한다.
수신와(須愼窩)는 어렵게 사는 이웃을 생각해 언제나 삼가면서 낮추어 살라는 정신이 담긴 당호다. 한 칸 방, 한 칸 대청, 두 칸 툇마루로 이루어진 수신와는 사랑 중 규모가 가장 작다. 손자가 기거하는 수신와의 방 오른쪽에는 어린 손자가 안채의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중문을 통하지 않고 출입할 수 있는 조그만 문이 달려 있다.
한 건물에 배치된 화경당과 수신와
안채는 둘레 3.5자(약 1미터), 높이 13자(약 4미터)의 두리기둥과 둘레 6.5자(약 2미터), 길이 23자(약 7미터)의 굵고 긴 대들보를 얹은 장대한 규모로 지어져 있다.
대청의 천장가구를 살펴보면, 커다란 대들보가 마루 끝까지 한 번에 건너지르고 기둥과 만나는 곳에서 보아지를 아래에 받쳐 주춧돌까지 힘을 전달하도록 되어 있다. 위풍당당함이 절로 느껴지는 대들보는 중간 부분이 착시현상으로 가늘게 보이는 것을 보정하기 위해 배흘림 양식을 사용했는데 때문에 훨씬 안정감이 느껴진다.
대청 뒤편을 막는 바라지창은 여느 집처럼 판벽과 빈지널을 이용한 밋밋한 형태가 아니라 띠살무늬 분합문에 동살을 세 무리로 구성하였으므로 문을 닫았을 때 대청 안의 분위기를 한결 화사하게 꾸며준다.
한편, 안채 뒤뜰에서 바라지창을 바라보았을 때 윗부분의 회벽이 검게 그을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회벽은 집을 지은 후 한 번도 보수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벽은 짚을 잘게 썬 여물과 해초풀, 찹쌀을 쑤어 만든 풀을 흙과 개어 만들었다. 이렇게 전통 방식으로 만든 벽은 화재나 해충에 잘 견뎌 내구성이 뛰어나다.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고 이렇게 그을음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이 벽이 우리 전통 건축기법의 우수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안채 대청의 멋스러운 천장가구
안채 대청 뒷면의 바라지창과 회벽
윗상방과 아랫상방 사이 통로 위 선반에 놓인 꽃가마
전체 평면의 모양은 ‘ㅁ’자형으로, 중앙에 마당을 두고 전면에 부엌, 안방, 대청, 고방, 윗상방, 툇마루, 아랫상방을, 오른쪽에 큰사랑으로 통하는 중문, 왼쪽엔 아랫광, 뒤주, 문간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윗상방과 아랫상방 사이에 놓인 통로는 여러 역할을 하고 있는데, 주로 제사를 지낼 때 대청에 차려진 음식을 사당으로 옮길 때 유용하게 쓰인다. 이 외에도 며느리가 기거하는 윗상방과 시어머니가 기거하는 아랫상방이 통로로 떨어져 있어 며느리가 개인 생활을 좀 더 누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밖에도 윗상방의 덧문을 살펴보면 이 방에 기거하는 이에 대한 배려를 확인할 수 있다. 덧문에 띠살무늬 분합문을 두고 미세기문은 간결한 살대를 이용해 처리했는데, 미세기문은 사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이나 하인들이 문틈으로도 안을 볼 수 없게 턱을 만들어 맞물림 이음으로 마무리했다.
며느리가 거주하는 윗상방 덧문
부엌은 세 칸 반으로 상당히 규모가 큰데, 상부에 안방의 다락과 같은 크기의 다락을 두었다. 툇마루에서 부엌 쪽 벽 판문을 열고 통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다락이 나오는데 들창이 달려 있어 음식을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로 쓰인다.
대개의 부엌은 수직널을 이용해 판벽을 만들고 살창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나 북촌댁의 부엌은 사람 눈높이 부근의 판재 벽체에 구멍을 수직으로 뚫어놓았다. 이 구멍은 부엌에서 나무를 땔 때 나는 연기를 빠져나가게 하거나 전기가 없던 시절에 채광 역할을 했을 것이다. 구멍의 위치가 눈높이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부엌에서 일하던 여인들이 밖의 동정을 살필 때도 이용했을 것이다.
안채 부엌의 내부
사당은 안채와 큰사랑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안채에서는 사당으로 바로 갈 수 있으나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에서는 별도의 담장과 ‘헌춘문’을 통해서만 갈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이하다. 사랑에서 사당으로 가는 특별한 통로를 만든 것은 바깥주인이 선조들의 배향에 노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하회 북촌댁 [河回 北村宅] (한옥의 미, 2010. 7. 15., 서정호)
[출처] 하회 북촌댁 [河回 北村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