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벤허”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유다는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한 의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증오심에 불타던 복수의 칼을 집어 던진다. 유다 자신이 죄수로 끌려갈 때 자신에게 한 바가지 물을 건네 주던 사람, 몇 년이 흘러 만난 그 사람은 피범벅이 된 몰골로 유다한테 물 한 모금을 갈구하며 십자가에 짓눌려 있는 바로 그 사형수가 아닌가. 유다는 과연 누구를 만났는가?
우리에게 언제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과거만 있다면 추억은 있을지언정 희망은 없을 것이다. 현재의 삶이 고달프기 짝이 없을지라도 미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날에 대한 희망 속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우리 미래의 보증은 누구인가?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라는 사도 신경의 고백은 우리에게 희망찬 미래를 열어 주는 대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베들레헴에 오셨고, 지금은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다시 영광 중에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마지막 날 이 세상의 역사를 완성하러 오실 것이다. 역사가 완성될 때 창조 사업도 완성될 것이고, 하느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오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그분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 내용이다.
천주 제2위이신 성자께 대한 사도 신경의 마지막 신앙 고백 부분인 이 믿음은 분명히 ‘그분은 오신다’는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는 초대 교회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저 예수는, 그분이 하늘로 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승천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얼빠져 있던 제지들에게 약속된 이 말씀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한 약속의 말씀이다. “마라나 타 - 주여, 오소서!”(1코린 16,22; 묵시 22,20). 이 기도는 그리스도교 기도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기도문이다.
왜 오시는가?
승천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분은 세말에 무서운 심판을 내리기 위해 오실까? 우린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이란 유명한 그림을 회상하며 그 작품에 나오는 최후 심판의 장면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최후의 심판’은 ‘최후의 날’ 혹은 ‘마지막 날’을 암시한다. 옛 문학이나 성경에 보면 이 ‘마지막 날’은 천재지변과 같은 무시무시한 재앙의 날로 표현되어 있다. 과연 우린 최후의 심판이나 마지막 날을 그렇게 무서운 사건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무서운 사건으로 표현하는 것은 성경이 집필될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묵시 문학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그런 인간을 무지막지하게 벌하는 날로 최후 심판을 이해한다면 과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까? 묵시 문학적인 표현이 담고 있는 내용은 만군의 주님이 오시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만군의 주님이 오시는 것은 자신의 백성을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시고 원수를 쳐부수기 위해 오시는데, 그 오시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원수에게 짓눌려 사는 이에게 원수를 격퇴시킬 능력 있는 분이 오신다면, 그분이 오심 자체가 기쁜 소식이다. 그런 내용을 너무 윤리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다 보니 우리 모두를 주님 정벌의 대상으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분명히 사도 신경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말하면서 느닷없이 공포의 불이나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분의 강생에서부터 시작하여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아 그분의 일생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한 문맥에서 우린 그분의 다시 오심도 보아야 한다. 즉, 사도 신경의 신앙 고백은 구원 역사라는 차원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말하고 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계속해서 인간을 만나러 오셨고, 인간과 벗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던 그분은 결코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간과 더불어 역사 안에 현존하실 것이고, 마지막 날엔 그러한 당신의 현존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주실 것이다. 마지막 날은 분명히 주님의 날이다. 그날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또 우리를 위한 주님이심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주실 것이다.
모세가 자신을 파견하고자 원하신 하느님께 감히 그분의 이름을 물었던 성경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탈출 3,15). 하느님께서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조상 대대로 언제나 인간의 역사 안에 인간과 함께해 오셨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그 하느님은 지금으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결정적인 사건을 위해서도 역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리라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그러한 하느님은 자신밖에 없음을 “나는 곧 나다.”(탈출 3,14)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밝혀 준다.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 하였다. 이는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3). 주님은 영원한 우리 삶의 동반자,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그분은 우리의 동반자.
마지막 날이 구원의 낱이 되기 위해
마지막 날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우리의 믿음이 확인되는 날이라면, 그날은 믿는 이들에겐 더 이상 공포의 날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참된 해방의 날이다. 믿는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이고, 믿는 이들의 기다림이 채워지는 날이다. 과연 주님의 날을 애타게 기다리던 이들에겐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의 날일 것이다. 소원 성취의 날이요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다.
학교에서 늘 꼴찌를 독차지하던 어떤 꼬마가 어느 날 산수 시험 성적표를 받았는데 놀랄 일이 벌어졌다. 무려 80점을 받은 것이다. 그날은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 날이었다. 그 반대의 예를 들어 보자. 지금은 신부가 되어 있는 내 동생이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어느 여름날 동생이 해가 저물도록 보이지 않아 온 집안 식구들이 찾아 나섰던 적이 있다. 시간이 갈수록 온 가족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새마을 확성기를 통해 방송까지 하였다. 그러나 동생에 대한 기별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은 안방 재봉틀 옆에 겁먹은 표정으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검정 고무신 한 짝을 냇가에 떠내려 보낸 그 죄(?)가 어린 동생의 마음을 그렇게 공포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위의 두 이야기를 접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주님의 날이 소원 성취의 날이라는데, 왜 우린 자꾸 마음으로부터 그날을 두려워하고 그날을 외면하려고 하는가? 도무지 그날을 맞이할 자신이 없는 우리들이 아닌가? 신랑을 마중 나간 열 처녀 중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자리를 우리가 채우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은 아닌지? 기름을 준비하여 허둥지둥 잔칫집에 도착했지만 이미 문은 잠겨 버렸다. 아뿔싸 때는 늦었구나! “‘주님, 주님, 우리에게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여 ‘진실히 그대들에게 이르거니와, 나는 그대들을 모른다.’ 했습니다”(마태 25,11-12).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주님의 날은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되고 말았다.
달란트의 비유(마태 25,14 이하)와 최후 심판의 비유(마태 25,31 이하)에서도 같은 내용은 반복적으로 들려온다. 준비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다 쫄딱 망한 그 꼴을 보면서 우린 무엇을 생각하는가? 주인의 뜻을 받들어 충실하게 살았던 이들에게 돌아간 주인의 보답이 얼마나 부러운가? “잘했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사소한 일에 충실했으니 네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마태 25,21. 23).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장면에도 희비는 교차되고 있다. “그래서 이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러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러 갈 것입니다”(마태 25,46).
주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을 때 이루어질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다시 최후 심판의 장면을 보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자유로이 행한 행위 - 굶주린 사람한테, 목마른 사람한테, 헐벗은 사람한테, 병 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한테 자유로운 의사로 행한 행위 - 에 따라 상벌이 결정된다. 왜냐하면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 반대는 그 반대다. 작은 이에게 해주지 않은 것은 주님께 해주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주님, 주님”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아무리 주님의 은총이 풍부하다 해도 내가 자유로이 그 은총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은총은 우리의 자유를 강박하지는 않는다. 자유로운 결단으로 은총에 협력하는 이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은총으로 다가온다. 은총에 협력하는 자유로운 결단이란 최후 심판의 장면을 되돌아볼 때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3,15). 예수께서 모범으로 보여 준 것이 무엇인가?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도 지니지 못합니다”(요한 15,13).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결국 최후 심판에서 상을 받는 이들, 즉 작은 형제들이라 해도 예수님을 모시듯이 모시는 사람들이다.
“임은 전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하한주 신부, “임 쓰신 가시관”).
[경향잡지, 1994년 12월호, 하성호 요한(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