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1964년 9월에 태어났다.
'금강' 하류가 마을 옆으로 흘렀다.
물 좋고 공기 맑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이었다.
토지는 비옥했고 소출은 풍성했다.
아버지는 '교육 공무원'이셨다.
그런데 퇴근하면 곧바로 '농부'가 되셨다.
경작하는 농토가 꽤 많은 편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아저씨'가 계셨다.
나는 그 분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함께 살면서 우리 집 농사일을 삼촌이 주도적으로 하셨다.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쌀 가마니로 '새경'을 받아가셨다.
한 해 동안의 노고에 대한 정당하고 감사한 '품삯'이었다.
나는 그 '삼촌'과 사랑채에 있는 방을 같이 사용했고 덕분에 옛날 얘기도 참 많이 들었다.
늦가을에 '삼촌'이 우리집을 떠나실 때면 헤어지는 게 서러워 울고불고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아버지는 언제나 바쁘셨고 '성실과 열정'의 대명사 답게 1인 몇 역을 하셨다.
본인의 시간과 에너지를 허투로 사용하는 법이 없었다.
담배는 처음부터 안 피우셨다.
그러나 30대 후반까지 막걸리는 잘 드셨다.
그러나 '불혹' 전후에 '신앙의 영향'으로 술도 완전하게 끊으셨다.
항상 가문의 중심이었고 마을의 촌장이셨다.
또한 돈독한 신앙으로 인해 교회에서도 많은 역할을 감당하셨다.
우리 옆집에도 내 부모님보다 서너 살 위였던 아저씨, 아주머니가 사셨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별다른 직업이 없었다.
다른 분의 전답에서 일손이 필요할 때만 '품삯'을 받고 일을 하셨다.
그나마 일생 동안 성실하게 사셨다면 나름대로 야무진 삶을 역어가셨을 터였다.
하지만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세상을 원망했으며 부부싸움도 자주 하셨다.
중국엔 그 분에게 일을 부탁하는 동네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설상가상'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성격이 흉포해지셨고 급기야 자녀들의 등교까지 못하게 막을 정도였다.
'교과서와 노트'도 불태웠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유구무언'이었고 최악이었다.
어린 나의 시선에도 세상은 절대로 균형잡힌 공간이 아님을 알았다.
비슷한 살림, 환경, 교육, 관계가 아니었다.
어른 한 사람의 '행동과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옆집 형과 누나의 눈물을 자주 보았다.
암울한 옆집의 상황을 보면서, 어린 소년의 가슴에도 슬픔과 막막함의 먹구름이 자주 몰려왔다 사라지는 걸 가끔씩 목격하곤 했었다.
가슴이 아팠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옆 마을에 사시는 친구의 어머니께서 어려운 가정형편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
무거운 생선 광주리를 머리에 이신 채 여러 마을을 다니셨다.
그러면서 가가호호에 생선을 팔기 위해 애를 쓰셨다.
우리 마을에 접어들면 백프로 우리 집에 들르셨다.
두 어머니는 서로를 잘 알고 계셨다.
격의 없는 사이였다.
우리 어머니는 밥때가 되면 꼭 밥상을 차려주셨고, 밥때가 지났으면 시원한 미숫가루나 다른 간식들을 정성껏 내어주셨다.
많은 자식들을 제대로 양육하기 위해 '분골쇄신' 노력하시는 친구 어머니의 눈물겨운 고생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내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세상살이는 절대로 만만한 게 아니었다.
고2 때로 기억한다.
친구가 아파서 2-3일 동안 등교하지 못했다.
나는 걱정이 되어 주소만 들고 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동네에서 다시 한번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산 비탈에 수많은 '목조주택들'이 위태롭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정말로 열악했다.
나는 농촌 출신이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비교적 땅이 넓어서 집과 마당이 매우 큰 편이었다.
그런데 도시의 경사진 산비탈은 모든 환경이 확연하게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큰 비가 쏟아지면 산사태가 날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그날 이후로 그 집에 대한 얘기를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지만 내 영혼엔 또 다른 화인(火印)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뜨거운 인두가 내 심장을 강하게 지지는 듯했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 같은 기억이었다.
고3 때, 한 친구가 갑자기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떠나버렸다.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상상할 수 없는 '무단가출'이었다.
또한 '불효의 끝판왕'이었다.
그렇게 결석한 지 일 주가 지나고 보름이 흘렀다.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까, 제자를 '학수고대'하셨던 선생님은 급기야 부모님을 부르셨다.
작고 야위신 어머니가 학교로 불려 오셨다.
어머니는 죄인의 심정이라며 손등으로 연방 눈물을 훔치셨다.
나는 어머니를 부축하여 담임 선생님께 모시고 갔다.
굵고 뜨거운 눈물이 뚝뚝뚝 교무실 나무바닥 위로 떨어졌다.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오랜만에 뵌 친구의 어머니였다.
그새 피부는 더욱 거칠어졌고 머리엔 새치가 더 늘었으며 작은 얼굴엔 기미가 가득하셨다.
평소에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은 분이셨는데 내 마음이 더욱 저릿하게 아파왔다.
휴대폰도, 삐삐도, 팩스나 복사기도, 고성능 승용차도 아예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1982년의 일이었다.
서울로 간 그 친구에게 연락할 재간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통신인프라'였다.
불과 45년 전의 일이었지만, 세상의 혁신적인 변화 때문에 마치 까마득한 과거의 모습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제발 퇴학처리만은 면하게 해 주세요"
어머니는 눈물로 '선처'를 호소하셨다.
인정 많은 선생님도 가출한 제자를 위해 하염없이 기다려 주셨다.
'학칙'이나 '원칙'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눈물'이 있었고 '정과 배려'가 잔잔하게 흘렀던 시대였다.
선생님과의 면담을 마치고 교무실을 나서신 어머니는 긴장이 갑자기 풀리셨는지 한동안 맥이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셨다.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나는 어머니를 부축하여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
덜컹거리는 낡은 시내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친구와 함께 시내에서 어머니를 2-3번 뵌 적은 있었지만, 친구의 집에 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해 '서해바다'엔 갯벌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을 간척하여 새로 일군 광활한 땅이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위로 군데군데 작은 농촌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인이 된 뒤로 나는 국내외로 다양한 지역을 여행했었다.
'북한'의 개성과 '박연폭포'에 갔을 때 보았던 시골의 흙집들.
'백두산'에 갔을 때, 그 거대한 산자락 오지에서 보았던 오래된 너와집들.
'동 티벳'의 차마고도, '네팔'의 히말라야, '베트남' 북부와 '몽골'과 '키르기스스탄'의 오지에서 보았던 '귀뜰집' 같은 구옥들이
차라리 더 좋았다고 표현할 만큼, 고3 때 내가 보았던 친구의 집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네 기둥에 합판과 목재로 얼기설기 덧대 만든, '이재민'을 위한 간이 주거시설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더 이상의 상세한 묘사는 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나는 약 5킬로 정도를 무작정 걸었다.
중간에 버스를 타기는 했지만 그냥 정처 없이 걷고 싶었다.
양 미간을 타고 삐질삐질 흐르던 눈물이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로 튄 친구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건강도 안 좋으신 어머니의 가슴에 이렇게 대못을 박아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원망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천 걸을 만 걸음을 양보할지라도 그런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불효'였다.
"너는 천하의 씨발놈이다. 이 개자식아...."
만약 내 앞에 그놈이 나타났다면 아마도 '옥수수'를 전부 털었을 것이다.
나는 꽤 먼 거리를 터벅터벅 걸으며 수도 없이 곱씹었다.
"세상은 절대로 평탄한 공간이 아니다. 너무너무 굴곡이 심한 벼랑이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었다.
고3 연말에 '연합고사'를 치르고 나는 서울로 왔다.
나도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받고도 경제적인 상황 탓에 'IN SEOUL'을 못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그 친구들의 좌절과 눈물 어린 소망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어쩔 수 없이 '지방대'를 선택한 친구들도 있었고, 아예 대학을 포기한 친구들도 있었다.
대학진학과 엇갈린 인생길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슬픔과 애통함은 전적으로 그들의 몫이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세상에 '빚진 자'라고 생각했다.
누가 나에게 그렇게 얘기한 적은 없었다.
다만 조금씩 철이 들어갈 무렵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주문하고 있었다.
내 미래의 '인생항해'와 내가 준비한 '해도'도 그런 관점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너는 이 세상에 '빚진 자'다"
좋은 부모 슬하에서 걱정 없이 자랐고, 공부도 웬만큼 했으며 미래를 '좌절과 비탄'이 아니라 '희망과 비전'으로 엮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나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얻어진 산물이 아니었음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모태신앙'으로서 중, 고시절부터 수도 없이 하나님께 기도했고 나의 미래를 간구했다.
기도하면 할수록 이 세상에 미안한 점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어떤 면에선 송구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어느새 스무 살이 되었고, 서울에서 다부진 청년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었다.
서울에서 새로운 세상, 사람들, 문화를 광범위하게 접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색다른 기준과 안목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학과 친구 중에는 불우한 형편 때문에 캠퍼스 안의 수십 개나 되는 '커피 자판기'를 청소하고 관리하며 그 작은 소득으로 어렵게 학교를 다녔던 사람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종로의 어느 '꼬마빌딩'에서 '건물청소'를 하면서 에어컨도 없는 불가마 '옥탑방'에서 먹고 자며 공부했던 친구도 있었다.
그 당시 캠퍼스엔 '자가용'으로 통학했던 학생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고학생'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세상은 절대로 평평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나는 기도실을 나설 때마다 내 심장에 한 문장을 각인시키곤 했었다.
"기욱아. 너는 이 세상에 '빚진 자'다. 한시도 이 사실을 잊지 말아라"
나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깊은 철학을 겸비한 사상가도 아니었지만 스무 살 이후로는 늘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았다.
"나는 세상에 '빚진 자'이기에 기회가 된다면, 아니지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베풀고 나누고 헌신하며 살자"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대한민국'의 남자는 모두가 '국방의 의무'를 필해야 했다.
'직업군인'인 '부사관'이나 '장교'가 아니라 일반 사병으로 복무할 수 있는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해병대 특수 수색대'가 유일했다.
UDT, 공수부대(현 특전사), CCT, HID, SSU, SART 등은 모두가 '부사관'이 중심이었다.
'좌고우면' 할 것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해병대 특수 수색대'에 지원했고 우리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훈련했다.
그 당시엔 '죽음'조차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진짜로 그랬다.
전역 후엔 6학기 연속 '과대표', '검도부'와 '수영부'의 훈련 및 훈육, 봉사 동아리 '바인클럽' 활동, 3년간 '야학 교사'및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야간 알바'를 열정적으로 했었다.
정말로 모든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의 소망이었던 '고시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다시 태어난다 해도 더 이상의 뜨거운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열하게, 촌음을 아껴가며 살았다.
대학졸업 후 어느 회사에 입사했고 '월급'을 받자마자 매월 중중 '장애인 공동체'및 무의탁 '노인 공동체'를 찾아가 나눔과 봉사'를
시작했다.
'헌혈'도 지금까지 102회를 했고, 7월 하순에 103회째를 할 예정이다.
모두 전혈이었다.
백혈병 환우들을 위해 그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서 '성분헌혈'도 여러 번 했었다.
'골수기증', '시신기증', '장기기증'도 두 자녀를 낳자마자 바로 신청했다.
지금도 '해외아동' 여러 명과 국내 '장애인 공동체' 여러 곳을 36년째 매달 후원하고 있다.
내가 잘 낫음을 자랑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여러 '모임'과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지역과 다채로운 컨셉으로 M.T를 가면 대개 밤이 깊도록 대화를 했다.
심야가 되면 잘 사람은 자고, 극히 소수만 남아서 깊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 시간이 되면 거의 100% 믿음의 형제들, 친구들, 선후배들이 나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다.
"매번, 그것도 몇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경조사, 기념일, 창업, 문병, 각종 행사나 이벤트 등 거의 모든 일들을 전면에 나서서
챙기고, 헌신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 희생적인 삶을 사는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된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시대에 형님 같은(동생 같은) 사람이 또 있겠는가"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30-40년 간이나 동일한 삶의 패턴을 유지한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일인가"
"본인도 그렇게 살았지만 두 자녀들까지 그렇게 양육한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삶을 살 작정인가" 등등
깊은 밤에, 숲 속이나 바닷가의 조용한 숙소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많이 했다.
나는 그때마다 간단하게 나만의 '개똥철학'을 얘기했다.
바로 '빚진 자'의 '소명'에 대해 것이었다.
누가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어떻게 평가 하든 나는 상관없었다.
'지천명'이 지나고, '이순'도 지났으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 따위에 내 삶의 좌표나 나침반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세월의 힘'이었고 '관록의 파워'였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참 좋다.
그리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노인 한 사람의 '인생'이 도서관 하나 분량의 '지혜'라는 말도 있다.
맞는 말이었다.
누구를 설득하거나 제압하려 들지 말자.
그냥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고 본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이 나이에 상대방의 인정과 평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소리 없이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한 '인생'이며 '세상살이' 아니던가.
누구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헌신'하는 것도 아니었다.
'생명'을 허락해 주신 '신'에 대한, 살아 있는 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자 '도리'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아전인수'처럼 살지 말자.
자신의 논에만 물을 대지 말고, 기왕지사 장화 신고 삽 들고 전답에 나갔으면 '들판전체'를 생각하며 좀 더 통 크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목전의 행마가 아니라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좀 더 긴 호흡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지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소천하신 내 '부모님의 인생'을 통해, 먼저 떠나신 수많은 '어른들의 삶'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고, 배우는 것처럼
우리가 귀천했을 때 우리 자식이나 후학들이 우리의 삶을 '배움의 교재'로 삼을 수 있도록 각자의 인생을 향기롭게 엮어갔으면 좋겠다.
오늘은 2026년 7월 12일, 일요일이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혼자서 '큐티'를 진행했다.
역시 '빚진 자'의 '소명'과 '미션'에 대해 깊게 묵상했으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신께서 나의 생명을 언제 거둬가실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나는 그 시점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자력으로 호흡하는 그 순간까지는, 신께서 명령하신 '청지기'로서의 삶을 열심히 엮어가고 싶다.
그 기도 하나 뿐이다.
내 나이 어느새 '예순세 살'이다.
인생을 살아보니 삶의 핵심은 재물도, 권세도, 명예도 아니었다.
오직 '감사와 사랑' 그리고 '배려와 헌신'이라고 믿는다.
그런 생각과 기도로 한 발 한 발 나아갈 뿐이다.
옛날부터 나는 '빚진 자'였다.
지금도 '빚진 자'다.
앞으로 귀천하는 그 순간까지 '빚진 자'로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의 '부모님'과 여러 '스승님' 그리고 '이 세상'으로부터 받았던 '은혜'와 '축복'이 너무 크고 많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담아 고백하는, 나의 진심 어린 '간증'이다.
일요일 남은 시간도 내내 행복한 시간 보내시길 바란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