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을 넘나든 나무 이야기-6-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충남 천안(天安)땅은 그 이름이 천하대안(天下大安)에서 나왔다니 하늘아래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몇 해 전 천안시에서 시의 지명도와 이미지 확산을 위해 설문한 글, “[천안]하면 가장먼저 떠오른 것이 무엇인가요?”를 냈더니. * 천안삼거리와 흥타령, 능수버들, * 천안 독립기념관과 아우내 장터, 유관순, * 중국 자금성 앞 천안문, * 천안 호두과자. * 2013년 3. 26 연평 앞바다에서 일어났던 천안함 폭침 사건 등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중 가장 높은 빈도는 분명 <천안 호두과자>가 단연 최고빈도 이었다고 한다. 천안 호두과자는 누가 뭐래도 우리 국민간식 제 1호의 명예를 얻고 전국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나 마트, 백화점, 전통시장에서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주전부리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럼 왜 <천안호두과자>가 그렇게 명물이 되었을까?
먼저 후두나무의 전래 과정을 알아보자. 호두알이 달리는 호두나무는 AD139년 옛 중국 한 무제 때 장건(張騫)이란 외교관이 북쪽 흉노족의 침임에 대항하고 협공하자는 임무를 띠고 지금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지역, 당시로서는 대월지국(大越氏國), 즉 페르시아를 가는 사이 목적지에 가다가도 포로로, 오다가도 또 흉노에 잡혀 천신만고 끝 13년 만에 귀국하게 된다.
이때 장건의 보따리 속에는 호두, 석류, 수박, 포도 등이 들어있어 이들 과일이 중국으로 전래된 첫 기록이라고 중국 고전 <박물지>나. <본초강목>에 나와 있다.
호도(胡桃)의 호(胡)는 자존심의 나라 중국이 자국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그 주위 나라는 모두 오랑캐(胡)라 한 것에서, 도(桃)는 복숭아로 즉 호도는 ‘오랑캐 나라에서 들어온 복숭아 닮은 과일’을 말하는데 뒤에 발음하기 쉽게 호두로 변해 표준말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정통중국 외의 나라에서 직접 들어오거나 외방에서 중국을 거쳐 들어온 것들의 본 이름 앞에 오랑캐胡호자를 붙였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호박, 후주머니. 호떡. 호적(胡笛), 호콩(땅콩). 호배추(양배추), 호밀, 등등 호자 붙은 말이 흔하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이 망하고, 원이 중국을 장악했을 때는 청나라도 우리는 속으로 오랑캐(胡)라하여 청에서 들어온 문물에 이 역시 호(胡)자를 머리에 붙였다.
천안 호두과자를 말 할 때 뺄 수 없는 사람, 유청신, 그는 누구인가?
한 때 한국에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라는 기관이 있었다. 이 위원회 청문회에 역사인물로 꼭 불러내어 진실 여부를 밝혀야 할 인물이 바로 유청신이다. 고려가 원의 간섭받던 시기에 들어서 양국관계가 복잡하게 엉크러젔을 때 충렬왕의 총애를 받은 일개 몽골어 역관이던 유청신은 그의 직위가 낭장에서 대장군, 우승지, 급기야는 정승이란 최고위에 단기간에 수직상승한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원나라 조정의 힘을 업고 횡폐를 부렸을 뿐 아니라 심왕 고(瀋王 暠)를 고려왕으로 책봉하자는 주장도 했고, 조선 왕실을 위협하는 소위 원나라의 앞재비(附元輩)가 되어 온갖 정치적 장난을 무자비하게 많이 친 자이다.
고흥 유씨(高興 柳氏)인 그의 본 이름은 비(庇) 이지만 원 황제가 준‘훌륭한 신하’라는 뜻의 청신(淸臣)이란 이름으로 개명하여 1321년 충숙왕이 원나라로 송환될 때 고려를 원나라의 일게 성(省)으로 편입해줄 것을 시도한 소위 입성책동(立省策動)의 주도자이기도 했다. 이 위기는 익제 이재현 등의 충신들이 장문의 글로 부당함을 주장, 반박함에 따라 다행히 미수로 끝나게 되었다. 그는 충숙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자기의 죄를 알고 원에 그대로 남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한다. 이런 일로 그의 이름이 <고려사> “간신열전(奸臣列傳)”에 등재되는 불명예를 갖게 된 사람이다.
그러나 혹자는 그게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 빈천한 역관 이였던 자가 국법에 정해진 벼슬의 한도를 넘어 정승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니 이를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여긴 반대파의 원한에 찬 복수로 간신전에 올렸다는 주장도 있다. 분명 광덕사 일주문 바로 앞에 그의 송덕비가 근년에 후손의 손으로 세워져 있는데 이를 모를 리 없는 후손이 세운 빗돌이니 과거사 진실 규명회의에 붙여 흑막을 확실히 밝혀야 할 것이다.
유청신은 원나라와 조선을 여러 번 드나들었는데 그의 절정기 인 충렬왕 16년(1290) 왕의 수레를 모시고(扈從) 조선으로 들어 올 때 원나라에서 먹었던 호두가 맛이 좋았던지 그 호두알 다섯 개와 호두나무 묘목 세 그루를 가지고 돌아왔다 전한다. 마치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 드려오듯--
하여 호두열매는 그의 고향 지금의 천안 광덕면 매당리 자기 집 뜰에 심었고 호두 묘목은 자기 마을 앞개울 상류 쪽 산속에 있는 절집 광덕사 경내에 심었다. 이 일은 마침 문익점 선생이 목화문화을 우리들에게 퍼트린 것 같이 천안호두가 농촌사회에 고소득을 안겨주는 효자나무의 발단이 된 것이다.
천안시에서 남쪽으로 약 20km 거리에 있는 광덕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된 대 사찰 이였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 되어 폐사되었고 여러 번 중건과 소실을 거듭하다가 조선 경종 3년 (1723) 다시 소실, 재건, 하여 지금은 옛 영화는 볼 수 없고, 언제 찾아가도 정적이 흐르는 작은 절집으로 앉아 있다. 광덕사 입구 주차장 삼거리에서 절집으로 드는 얌전하고 화사한 일주문을 지나 산 쪽으로 고개를 들면 언덕배기에 종루와 대웅전 마당으로 드는 보화루(普化樓)가 산뜻이 서있는데 맑고 밝은 모습으로 한 눈에 들어온다.
작은 다리를 건너 보화루로 드는 계단에 이르면 오른 쪽에 우람하고 세월의 두터운 이끼 옷을 몸에 두르고 힘겨워 쇠지팡이에 의존하고 선 노거수 한그루를 만난다. 그 옆에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 제 398호 광덕사 호두나무>라는 걸 알려주는 표석과 함께. 유청신과 전래 연관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앞에 서 있다. 땅위 가슴 높이에서 Y자형으로 갈라지고 밑둥치 둘레가 장정 두 아름 정도,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도 호두가 달리긴 달린단다.
유청신이 처음 심은 그 나무라면 나무 나이 700여년이 넘었을 건데 전설은 그러하나 사실은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다. 안내판에도 수령 420여년 이라 했으니 아마도 원조나무의 곁가지나 그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광덕사가 호두나무의 시배지란 영예를 달게 된 것이다.
한편 엄중히 말하자면 여기 광덕사 호두나무가 우리나라 최초의 호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도 보인다. 그 증거로는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민정문서>란 기록에는 경덕왕 14년에 이미 충청도 지방 물산 조사목록에 추자(楸子)라는 이름이 나오고 또 고려사 <한림별곡>에도 호두를 당나라에서 왔다고 당추자(唐楸子)라는 기록이 보이니 도입의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통일신라 이전에 도입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