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1~6 / 부활하신 예수님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눅 24: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눅 24: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누가복음 마지막 장인 24장에는 복음의 핵심인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을 영접해야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의 신앙으로 살다가 우리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부활의 신앙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1~3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첫 증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많지만, 첫 증인들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은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갈릴리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이 금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새로 만든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습니다.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져다가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나고 주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던 여자들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지켜보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무덤에 묻히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발라주려고 온 것입니다.
정승 죽은 데는 안 가도 정승 집 개 죽은 데는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유익이 되어야 초상집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예수님이 죽어서 아무 유익이 없는데도 찾아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에게 잡힐까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이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그들이 반역자 예수님을 따라다닌 죄 때문에 로마 군대에 잡혀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죽으신 예수님의 무덤에 가면 얻을 이득이 없고, 오히려 불이익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예수님의 무덤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사랑은 순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예수님을 희생적이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여인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의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무덤의 돌을 굴려버렸습니다. 이 돌은 장정 대여섯이 굴려야 하는 큰 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돌을 굴리지 않고 나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들이 올 것을 아시고 무덤 문을 열어서 여인들을 환영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큰 돌을 일부러 굴렸습니다.
돌이 굴려진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에는 시체도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 옷은 개어져 있었고 수건을 쌌던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입니다.
4~6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였습니다.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그들 곁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변화 산에서 찬란한 옷으로 변형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도 부활의 예수님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여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하여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천사는 어찌하여 살아나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책망했습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은 죽은 자가 있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어디 계실까요?
첫째, 하늘에 계십니다.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영원한 왕이 되실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열흘 후에 오순절 날 성령으로 그 영이 오셨습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이고 예수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 임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무시당하면 기분 나쁘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일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관심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 가운데 일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인 교회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너희와 함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모일 수 없었습니다.
물론 두세 사람이 가정에서 모여도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대면으로 전체가 모이는 교회를 통하여 주님은 더욱 힘 있게 일하십니다.
히브리 기자는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나옵니다.
성령님은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들어 가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 주십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북이스라엘의 고질적인 문제는 우상을 제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고질적인 문제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산당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기 어려운 사람이 산당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솔로몬도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산당에서 드린 번제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산당에서 예배드리다 보면 안일에 빠지고 우상숭배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피치 못할 때 온라인 예배라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온라인예배를 통하여 안일에 빠지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현장 예배를 나와야 합니다. 주님은 현장 예배에 모일 때 성령으로 강하게 일하십니다.
나오는 과정에 시간과 물질을 쓰는 것도 주님께 드리는 예배이므로 축복해 주십니다. 교회에 나올 때 성도 간에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