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한다”는 의미를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일상언어의 가장 평범한 의미체계를 정직하게 밝히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것은
“학교 시험 점수가 높다”
는 뜻이다.
우리 아이 공부 잘한다는 의미에 실제로 딴 뜻이 없다.
“학교 시험 점수가 높다”
는 것은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뜻이고,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것은 서울의 몇몇 일류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우리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생각하고 저 현묘한 허공에 무한히 펼쳐진 갤럭시를 생각할 때,
“공부”
가 겨우 요따위 밴댕이 콧구멍만한 서울의 시공에 집약된다는 것은 감내하기 어려운 위선이요 치졸함이건만, 우리 5천만 동포의 현실적 가치관은 공부의 다른 의미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공부의 본래적 의미를! 공부를 한자로 쓰면 “工夫”가 된다. 이것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 자형에서 “공장 인부” 정도 이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런데 이 “工夫”는 우리 현대어에서 실제로 영어의 “to study”라는 말과 상응한다.
그 라틴어 어원인 “studēre”도 “학문을 한다”는 뜻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노력해서 습득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개념적 지식의 한계를 넓힌다는 뜻으로 인간 이성의 확충이라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엘리트주의적 함의를 갖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동양 삼국의 서양언어 번역이 일치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스터디”의 번역어는 일본에서는 “벤쿄오스루”(勉強する)
로 되어 있고, 중국어에서는 “니엔수”(念書)로 되어 있다.
일본말의 “벤쿄오스루”는 “억지로 힘쓴다”는 뜻이니, 사실 공부라는 것이 억지로 해야만 하는 괴로운 것이라는 매우 정직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니엔수”는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스터디”의 실제 행위 내용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선비를 “뚜수르언”(讀書人)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스터디”의 번역어로서는 일본어나 중국어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만이 유독 “공부”(工夫)라는 요상한 자형을 선택했을까?
일본어나 중국어에는 “공부”라는 말이 없을까?
물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스터디”와는 거리가 먼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일본어의 “쿠후우스루”(工夫する)는 “요리조리 궁리하고 머리를 짜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국어의 “工夫”는 그것을 과거의 웨이드자일시스템으로 표기하면 “kung-fu”가 되는데, 그것을 그냥 표기된 영어로 발음하면 “쿵후”가 된다.
다시 말해서 중국말의 공부는 이소룡이나 견자단이 펼치는 “쿵후,” 즉 무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공부”의 원의는 사실 중국어의 “쿵후”가 보존하고 있는 의미를 계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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