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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하면 소크라테스(bc477~399) 그리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차별로 떠올리지만 거기에 빼놓아서는 안되는 인물이 있다. 그 시대 동양에서는 공자(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가 있었다. 시대로 보면 소크라테스보다 이르고 이제 막 페르시아가 태동을 할 무렵에 이미 고대 중국의 춘추시대에 공자사상은 동양을 주름잡고 있었다. 아무튼 소크라테스가 공자와 비슷하다고 볼 때, 플라톤은 증자(曾子)와 유사하고, 크세노폰은 자로(子路)처럼 소크라테스의 뜻을 자기의 의지로 해석하고 실천하여 노력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저술가라면 저술가이고 직업군이라면 또한 직업군이라 할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로 또한 다작을 한 사람이다. 그 덕분에 많은 자료가 남겨졌고 특히 용병군으로 페르시아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키루스의 교육이란 책은 현세에 세계적 많은 기업들이 교본으로 삼을 정도다.
그는 한마디로 행동하는 삶, 그 자체였다. 앞서 잠시 그의 역정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오늘은 그와 연관된 인물과 국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할까보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총애 받던 제자였다.그러나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숙고하는 삶을 살았던 플라톤은 사색을 통해 [국가]를 썼고, 활동하는 삶을 살았던 크세노폰은 경험을 통해 [키루스의 교육]을 썼다.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전혀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키루스의 교육은 리더십에 대한 최고의 책으로써 활동하는 삶, 경험을 통한 교육을 말한다.그리고그는 또한 최초의 역사물을 만든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철학가다. 앞서 말한대로 소키루스 왕(키루스대왕과는 연도가 다릅니다.)의 용병으로 페르시아로 갔던 그는 소키루스왕이 죽고 장군들도 죽자 어쩔 수없이 용병대장이 된다.
만인대라는 만 명의 용병들을 데리고 크낙사 전투 후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로 돌아오는 데 되로 돌아서서는 바로 포위를 당하여 죽을 처지라 그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을 거슬러 올라 산악지대(아나바시스) 를 통과하여 흑해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한다.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만명의 사람들은 오천명으로 줄었다. 꽁꽁 얼어붙은 추위 속에서 동료들의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크세노폰은 엄청난 고난을 경험해야 했다.크세노폰은 그 전쟁의 현장에서 인간, 조직, 리더십을 배웠다. 또한 많은 영감과 통찰력을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세노폰은 활동하는 삶,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을 했지만 전쟁 후 크세노폰은 아테네에서 추방당하고 스파르타(올림피아)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역사물을 쓴다. 키루스의 교육, 그런데 그리스 사람이 왜 키루스 대왕에 관한 책을 썼을까? 키루스 대왕은 절제와 온화함을 지닌 탁월한 군주의 모델이었다. 키루스는 스승에게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교육을 받았다. 1. 리더는 법에 따라 판결을 내려야 한다. → 법을 지키는 것이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법 2. 자발적인 충성을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 보통 충성을 얻기 위해서 충성한 사람에게는 명예를 주고, 불충성한 사람에게는 불명예를 준다.그러나 그것보다도 지혜로워져야 한다. 어떻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워라.(배우지 않으려는 지도자들이 많다) 또한 그들이 고통받고 있다면 도우려고 노력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즐거워하라.
그가 12살 때 어머니으 고향 메디아를 갔을 때 그의외할아버지는 진수성찬을 차려주었다. 그러자 키루스는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언약을 받고는 곧 바로 할아버지를 보좌하는 사람들을 불러 그 음식들을 제공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동안 할아버지를 보필해주어서 고맙다고 맗을 했다. 그런 그는 최초로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페르시아가 원래부터 큰 나라는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 최고 권력과 갑부 라하던 크로이소스의 리디아를 점령하고 아르메니아 앗시리아를 점령하고 그의 어머니가 공주였던 메디아를 병합하고 최종 결전지인 신바빌론 정벌에 나섰다. 신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남부에 정착중이던 칼데아 인들이 메디아왕국과 연합해 bc612년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세운 왕국으로 난공불락의 바빌론 성벽으로 침입이 어려웠다.
키루스 대왕은 그들의 축제 때 강물을 막고 강바닥을 걸어서 침입하여 성을 공격해 승리를 했다. 나보니두스가 신바빌론의 마지막 왕으로 패배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역사기록인 나보니우스 연대기가 현재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으며 키루스의 실린더라고 하여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하고 그 백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약속한 일종의 평화문서가 역시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키루스의 실린더의 내용 중에 " 나의 막강한 군대는 바빌로니아를 평화롭게 정복했고 어느 누구도 수메르와 아카디아의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들을 노예와 같은 삶에서 구출했으니 궁핍함속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
여기서 바로 바빌론 유수가 나온다.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시드기야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며, 기원전 538년에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50년 동안의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바빌론 유수기 동안 유대인은 고난과 고통으로 민족일치를 강화했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여 유대교를 정립하였고, 이 기간동안 경전을 정리하여 구약 성서의 기초를 만들었다.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진보하고 화려한 문화를 체험하였다.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절대적인 신을 설정하였고, 그 신이 인간들을 심판한다는 개념으로 인간사에 윤리성을 도입하였다. 이 교리를 유대인들이 받아들여 그 때까지도 현세 지향적이였던 유대교를 선진화시켰다.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한 후에도 유대인 중 일부는 바빌론에 남아 공동체를 유지하였으며 이들이 디아스포라의 유래가 되었다. 율일신을 믿는 유대인조차 이방인인 키루스대왕에 대해 놀라운 표현을 썼다. '키루스'대왕은 구약성서 '이사야서 제45장'에 나오는 '고레스'라는 인물이다. 역사상 '키루스'처럼 자신이 정복한 여러 민족들로부터 그토록 황홀한 칭송을 들은 왕도 없었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켜 노예 상태였던 유대인들을 풀어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 것도 '카루스'였고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유대 성전을 재건하는 비용도 선뜻 내준 것도 '키루스'였다. 민족 간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최초의 왕은 '솔로몬'이 아니라 '키루스'였다. 오죽하면 '이사야'서에 "나 여호아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찬사하게 했을까?
'키루스'대왕은 인간의 기본권을 세계 최초로 선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뉴욕의 유엔본부에 복사본이 있고 원본은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바로 <키루스 원통>이 그 증거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점령지 주민들을 착취하는 것을 엄금했으며 점령지를 개발하는 공공 프로젝트로 주민들과 '삶'을 공유한 기록들이다. 더불어 사는 철학이었다. 훗날 알렉산더 대왕조차 '키루스'를 존경해서 그의 무덤만은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전투가 끝나고 승리를 보고하는 군사에게 자신의 오른팔인 아브라다타스 장군이 안보이자 그를 먼저 찾았다고 한다. 전사했다고 하자 그는 바로 일어서서 슬픔의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 장군의 부인 판테아는 절세 미인이었는데 키루스는 일부러 외면하고 보지를 않았다고 한다.
관용과 절제를 누구보다 철저히 지킨 키루스대왕, 이 대목은 생각해 볼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인건의본성은 원래 약하기 때문 겁잡을 수없는 소용돌이를 만들 수 있다고 이글을 쓴 크세노폰은 본 것이다. 이 의미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성론을 부정한 말이기도 하다. 동양에서 벌어진 성선과 성악과도 선이 맞닿는다. 아무튼 그리스인으로 그는 왜 페르시아 왕에 대한 글을 남겼을까. 학자들은 누구보다 아테네를 아낀 그답게 아포리아 상태에 빠진 아테네를 위해 바로 교육하고 깨쳐야 한다는 의미로서 키루스의 교육이란 글을 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bc 484~425)가 죽은 후 페르시아 전쟁(bc 499~449)에 이는 펠로폰 네소스 전쟁(bc 431~404)은 계속됐다. 크세노폰은 그 뒤를 이어 글을 계속해서 글을 썼다. 그리고 그는 헬레니카 7권에 또 이렇게 썼다.
'나는 여기까지 적는다. 그 다음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가가 적게 될 것이다. '약소ㄱ국으로 전락한 아테네 지도자들에게 소국 페르시아 제국형성과정을 통해 원대한 꿈과 용기를 주려 했던 크세노폰 덕분으로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원정 당시 키루스 대왕이 한 것같이 그대로 행하여 세계를 제패했다. 현재 이란의 파사르가대에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 남겨져 있다.
▲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림 한가운데 한 손으로는 천국을 가리키며 독배를 받아드는 노인이 소크라테스다. 왼쪽에 보이는 노인은 플라톤이다. 그림에선 노인으로 묘사됐으나, 실제 소크라테스가 죽을 당시 플라톤은 28살이었다. / 조선일보 DB
파사르가데에 있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