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2024년 4월 한국의 시대정신
살아서는 저승이 궁금하고 죽어서는 이승이 궁금한 사람이 꽤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시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1748~1832)은 자기 죽은 후 이 세상 모습이 얼마나 궁금했는지 몇 년 더 일찍 죽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몇 년을, 내가 죽고 나서 다가올 각각의 세기말에 살도록 특전을 부여받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쓴 책들의 결과를 목도할 수 있을 텐데 ….”
벤담은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계몽사상에 힘입어 세상은 나날이 발전한다고 믿었습니다. 억압의 자리에 자유가 들어섬으로 인류는 정신도 물질도 나날이 풍요로워지는 삶을 누리게 된다고 봤습니다. 그는 이 예언을 자기 책에 담았는데, 이 예언대로 굴러갈 세상을 구경할 수 있다면, 후손들이 행복 속에 사는 걸 볼 수 있다면 몇 년쯤 죽음을 앞당겨도 좋다고 말한 겁니다.
이번 총선이 끝난 후 나도 벤담처럼 몇 년 덜 사는 대신 죽은 후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졌습니다. 내 소원은 벤담보다 소박합니다. 벤담은 100년에 한 번씩 돌아와 1년쯤 되살면서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 했지만, 나는 4년마다 돌아오는 총선 날 이 세상에 되돌아와 그날 하루만 머물고 다시 떠날 겁니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나를 확인하려 한 벤담과는 달리 나는 한국이 얼마나 나빠졌나를 확인하려 합니다. 세상이 좋아진다고 확신한 그와는 달리 나는, 다른 나라는 몰라도 최소한 이 나라 한국은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지금보다 나빠질 것이며 그 정도는 갈수록 심해질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확신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확인하기에는 총선 날 하루면 충분합니다.
한국이 더 나빠진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은 전과자를, 각종 범죄 혐의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자를,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받고도 뉘우치지 않는 자를, 사업도 하지 않으면서 사업한다며 거액을 대출받은 사기 대출자를, 수십 채의 부동산을 가진 투기꾼을, 투기로 챙긴 부동산 외에도 수없이 많은 재산을 축적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은 탈세꾼을, 뇌 속에 음란마귀와 아부귀신을 수십 수백 마리 키우며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곡학아세꾼을 국회에 보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라가 잘될 거라고 보십니까? 절대로 그리되지 못할 겁니다. 그 이유는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전에 이것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이 당선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동력’이 작용해서 ‘국민’이, ‘민의’가 이 사람들에게 앞으로 4년간 이 나라를 맡긴 걸까요? 하는 짓들로 봐서는 믿을 구석이 전혀 안 보이는 사람들인데? 국민과 민의보다는 자기 가족, 자기 패거리의 이익을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먼저 챙길 것만 같은 인물들인데?
이런 사람들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닮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해먹어도, 아무리 자기 말을 뒤집고 딴소리를 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오히려 부와 권력을 더 손쉽게 챙길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누가 정직하게 살아라, 죄짓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 말아라라는 말을 믿고 따르겠습니까?
자손만대로 잘 살고 권세까지 누리려면 착하게 살 것이 아니라 불법을 저지르는 게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됐는데, 누가 책대로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겠습니까? 그뿐인가요. 불법이 들통나면 나만 그러냐, 억울하다, 이 원수를 갚겠다며 하늘에 주먹을 들이대고 쉰 목소리로 악을 쓰면 다 '용서' 받더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수두룩해질 겁니다. 부패의 명백한 증거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훈장이 되고, 본받아야 할 시대정신이 되고 만 겁니다.
이런 세상이 잘 되겠습니까? 착하지만 약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그들에게 희생될 겁니다. 그다음에는 악한 그들 중에서 약한 사람이 사라질 겁니다. 그런 다툼이 계속되면서 한국의 인구 소멸 시점이 앞당겨질 겁니다. 그런 세상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려는 젊은이들이 지금보다 절대로 많아질 수는 없지요. 나는 내가 아는 젊은이들에게는 아이를 낳지 말라고 권하려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에게 네 아이는 저 사람 아이들의 노예가 될 수도 있어, 저 사람 아이들의 숙주로 평생을 보내게 될 수도 있어라고 주의를 주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 이제 못도 망치도 훨씬 큰 걸 갖게 됐습니다. 지난 정권이 박아 놓은 못 때문에 힘들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에 이 사람들이 이제 그 망치와 못으로 어디에 못을 더 박고 새로 박을까 두렵습니다. 못을 박는 건 자유를 앗는 겁니다. 그들은 원하는 곳, 아무 문짝에든 대못을 크게 쾅쾅 박아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은 자유로이 드나드는 걸 막을 겁니다. 보통 사람은 그 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제 더 알 수 없게 됐습니다.
탈원전한다고 원자력발전소에 대못 박은 후 태양광사업 벌인 그들이 많이도 해먹은 게 드러났습니다만, 내 생각에, 태양광사업은 새발의 피, 빙산의 일각일 겁니다. 보통 사람은 그들이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여도 알 수 없게 됐습니다. 그 잔치 비용이 자기 주머니에서 나간 것도 알지 못합니다. 돈은 자기가 냈는데 정작 자신은 굶을 수 있음을 모릅니다. 지난 정권이 박아 놓은 대못 중에서 사법부에 박아 놓은 것 몇 개만 뽑아도 나라가 좋아질 거라는 희망은 이번 총선으로 저 멀리 허공으로 날아갔습니다.
대통령의 오만함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론가들의 비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당선된 전과자들, 범죄혐의자들, 사기꾼들의 저 오만함, 아니 오만함을 넘어선 뻔뻔스러움은 왜 안 꾸짖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평론가들이 ‘국민’을, ‘민의’를 운운하며 저들의 총선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 뒷북을 치는 걸 못 보겠습니다. "부패가 무능을 이겼다"는 말도 들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패한 자가 유능하다" 혹은 "유능해지려면 먼저 부패해라"라는 말이 국가적 정설로 자리잡게 되겠군요.
2022년 12월 15일 대통령 후보 윤석열은 대전에서 출정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거기서 그는 '정권 심판론'으로 민주당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지난 5년 민주당 정권 어땠습니까? 국민 권력을 자기 권력인 양 내로남불로 일관하지 않았습니까?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철 지난 이념으로 편 가르기를 한 게 지난 5년 아니었습니까?
부패와 무능한 민주당 정권에 또 5년간 맡기고 싶으십니까?”라는 연설로 정권을 잡은 그가 정권 심판론으로 참담한 궁지에 몰렸습니다. “정권 심판 내세워 권력 잡은 자, 정권 심판론에 망한다”라는 추론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4년마다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올 때 이 추론이 위안이 될까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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