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교회는 거룩하고 공번되다
몇 해 전 무식한 탓으로 금붕어와 열대어를 한 어항에 넣고 키운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고기밥을 주려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조그만 열대어가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횟감으로 삼았던 것이다. 가엾은 금붕어는 그만 물고기로서 제 기능을 잃고 말았다. 이렇듯 교회가 거룩하지 못하고 어떤 특정인들만이 판을 치는 아지트에 불과하다면 지느러미 잘린 물고기 꼴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를 나타내는 참된 표지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사도신경은 “거룩하고 공번된(보편적인) 교회”라고 고백하면서 성성(聖性)과 보편성을 교회의 참된 표지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니케아 신경에서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사도신경보다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니케아 신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표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인 교회
니케아 신경에 ‘하나인 교회’라는 내용이 들어간 주된 요인이 무엇일까? 교회 내적 요인은 당시 갖가지 이단(특히 아리우스의 이단)들로 교회가 분열되던 상황에서 공의회 교부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둘일 수 없고 오로지 하나임을 고백한 것이다. 외적 요인은 공의회를 소집한 황제가 지역교회의 최고지도자들인 주교들을 한곳에 모아 지역교회는 ‘대(大)교회’ 아래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일치를 로마 제국의 일치의 요소로 삼고자 했던 데 있었다.
그러면 왜 교회는 하나이어야 하고 그 하나인 원천은 무엇인가? 교회가 하나이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 하느님 아래 한 백성만이 있기 때문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한 몸만이 있을 뿐이다. 또 교회의 영혼인 성령께서 한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이어야 한다. 비록 많은 인종과 종교들로 세상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해도 하느님은 오로지 한 분이신 주님과 유일한 유대관계로부터 나온다. 주님께선 모든 시대와 장소의 백성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하신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이다’는 개념이 다양성을 배제한 획일성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들의 다양성을 통한 일치를 추구한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구체적으로 이루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같은 세례’와 ‘같은 빵’의 성사이다. “마치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실상 우리는 모두 한 영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며……”(1코린 12,12-13).
또한 초대교회 신도들은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마태 18,20)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함께 모여 성찬을 가지며 일치를 드러냈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영성체 후 기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다. “우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먹고 마시기를 원하신 하느님,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삶으로써 기꺼이 인류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갈기갈기 찢어지다시피 분열되어 있다. 인간들이 모여사는 곳에는 언제나 분열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힘으로 교회를 일치시킬 수 없다. 예수님은 교회일치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3).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 살아갈 때 일치는 가능하다. 같은 믿음 안에서 같은 세례를 받고 같은 빵을 나누어야 할 형제자매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없음을 마음 아파하자.
거룩한 교회
“교회에 다니는 놈들 나쁜 짓 더 많이 하더라.” 흔히 듣는 말이다. 어디 교회에 다닌 이후로 더 나빠지기야 하겠는가. 원래 바탕이 그렇고 그런 것이겠지. 하여튼 그래도 교회는 거룩하고 거룩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 몸담고 있는 신도들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신도들도 다 죄인들임을 고백한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교회를 세우시고 시작하신 그리스도와 교회에 생명을 주시고 교회를 이끌어가시는 교회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교회는 성령께서 한데 묶으시어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된 백성의 모임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선 교회의 구성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시고 그 구성원들 상호간을 묶으시는 끈이다. 동시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마치 성전에 머무르시듯이 머무르신다. 그래서 교회는 거룩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 39항은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결함없이 거룩하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 신부(新婦)로 삼아 사랑하셨고 그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셨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을 삼으셨고 성령의 특은으로 가득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은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그것입니다.’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모두 다 성화의 성소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결합된 교회는 이제 세상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한 그리스도 성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거룩하게 할 도구가 되기 위해서 교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속은 우리를 쉽게 속되게 타락시킨다. 성화되어야 함을 알지만 세상 재미에 놀아나다 보면 그만 “성당 다니는 놈이 뭐 저따위야.” 하는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그래서 “교회는 그 품안에 죄인들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하는 것이다.”(교회헌장, 8항)는 말씀에 따라 정신차려 살자.
공번된 교회
‘공번되다’는 말은 우리가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가툴릭적이다’ 또는 ‘보편적이다’는 말과 같은 말로 ‘전체성’과 ‘온전성’을 의미한다. 교회가 공번된 것도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면서 한 백성처럼 인류를 부르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나라에 부르셨다. 어떤 이도 구원의 부르심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그래서 모든 이들을 한 분이신 주님 아래 모으는 교회가 명실상부한 공번된 교회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버려진 이들이 교회 안에서도 버려지는 데도 공번된 교회일 수 있는가?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세계화’란 말을 요즘 자주 듣는다. 세계화란 달팽이처럼 자기 안에 갇혀있지 않고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전세계로 향하는 정신을 말한다고 본다. 공번된 교회가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보편성사’라면 교회의 신도들은 다락방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세상에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을 외친 사도들의 ‘세계화’ 정신을 선교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특히 어떠한 이유에서든 자포자기한 삶을 살아가는 막가는 이들에게 구원의 참기쁨을 전하도록 애쓰자.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증언하는 사도들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므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는 반드시 ‘사도적’이어야 한다. 모든 교회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사도들의 신앙 위에 세워지기를 바란다. 초세기부터 이단자들의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가르침의 정통성 기준을 ‘사도적 권위’에 두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이 믿었던 신앙과 일치하느냐를 따졌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신앙의 유산’ 또는 ‘신앙의 보고’라는 말을 듣는다.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신앙의 유산을 손상없이 세상 끝날까지 만민에게 전달함을 뜻한다. 이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 머무르시면서 교회를 이끌어가시기 때문이다. “그대는 베드로입니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데 저승의 성문들도 그것을 내리누르지 못할 것입니다”(마태 16,18).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져오기 때문에 교회는 동시에 사도적이어야 한다. ‘사도’란 말은 ‘파견받은 자’(apostolos)란 말에서 왔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도적’이라면 교회는 파견되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마태 28,19-20). 이를 위해 교회는 “사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45)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남을 섬기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신앙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린 그 일 때문에 파견된 사람임을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자.
[경향잡지, 1995년 3월호, 하성호(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