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서구의 위장결혼 복사판
1980년대 초반에는 냉전이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동구 국가에서 서방으로의 합법적 이주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렵다고들 했습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도 국가가 이주를 허가한 이들이 가물에 콩 나듯 있기는 있었습니다. 이것 말고는 불법 탈출 같은 위험한 방법뿐이었습니다. 이는 전쟁 중인 군인의 탈영에 비유될 만큼 위험하고, 무모했습니다. 특히 동서독의 경우에는 경비병의 총탄 세례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동독 군인이 탈출하는 시민에게 발포한 경우가 100건을 넘었고, 통일 이후 이들은 법정에 섰습니다.
서구의 젊은이들이 자국 이주 정책의 허점을 이용해 동구권 시민 구출(탈출) 작전을 벌였습니다. 묘안이 백출했습니다. 눈길을 끈 것 중 하나가 위장결혼이었습니다. 서구인이 동구에 가서 비교적 긴 시간 체류하면서 각본대로 동구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다음 결혼하지요. 귀국 후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인권과 행복권을 내세워 “같이 살아야겠다.”며 갖은 방법으로 국가를 괴롭힙니다. 초기에는 이 방법이 성공했습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당국도 눈치를 챘습니다만 진위를 가리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진짜 부부처럼 살아가는 중이니 어떤 질문을 해도 거리낄 게 없었습니다. 남녀를 분리하여 부부관계의 깊은 내용을 따로 질문하면 답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답니다. 무사히 통과하면 시민권이 발급될 때까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부로 삽니다.
시민권이 나온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부부싸움을 시작합니다. 이웃 누가 봐도 “함께 살 수 없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했지요. 지독한 비난의 말을 들을 수 있을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어떤 쌍은 혼외자까지 임신했다고 소문을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해외에서 본국에 두고 온 상대방의 아기를 잉태한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부부싸움 중에 폭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하여 보호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격리하여 보호받기까지 하면 금상첨화입니다.
법정에서 이혼 판결이 나면 두 사람은 얼싸안고 목표달성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서구 시민권을 받은 이는 즉시 동구에서 오매불망 기다리던 연인과 재혼을 합니다. 초혼과 같은 탈출 방법을 반복합니다. 운이 아주 좋으면 3, 4년 길면 10년도 더 걸렸답니다.
오죽했으면 그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다른 사람 품에 안기게 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공산정권의 압박과 횡포가 얼마나 지독했을지 짐작하게 합니다.
서독 대학의 멘자(학생식당)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동독 시민 구하기’ 주제로 작은 토론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일부에선 공산 학정에 시달리는 친구를 구하려는 인간적 행동이라고 했고 반대편에선 위장 탈출을 돕는 불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신중론자들은 범죄조직이 개입해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다면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주장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과 젊은 동구인의 결혼 대부분이 매매혼에 가깝다는 것이었지요. 나이든 이들이 추가로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노예처럼 부리면서 이혼을 반대하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동구국가에서 온 이는 위장결혼이 들통나면 본국으로 강제추방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기다릴 수밖에 대안이 없었습니다. 폭행을 당해도 참아야만 했습니다. 생활비를 벌어 대는 경우도 있었지요.
실제로 매매혼도 있었습니다. 매스컴에선 xx아가씨(동남아 어느 국가의 여성)이라는 신조어도 유행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한국 귀화 후 베트남 남성과 재혼하는 베트남 여성이 늘고 있답니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베트남에서 귀화한 여성(우리 국적을 갖고 있음)이 베트남 남성과 재혼한 경우가 482건이나 됩니다.
“결혼 후 한 달 만에 가출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많은 경우가 시민권을 노린 위장결혼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정 파탄과 경제적인 문제도 뒤따릅니다. 대비책을 마련할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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