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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창세기18장1~15절
제목 : 손님을 대접하는 아브라함
어제17:17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웃엇는데,
오늘 사라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웃씁니다(12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보인 태도 그대로 사라도 딸아 행동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자, 아브라함은 정성껏 손님을 대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고,
믿지 못해 웃는 사라에게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려주십니다.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를 환대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아들의 출생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사라는 말씀을 믿지 못해 웃습니다.
1. 아브라함의 환대(1~8절)
1)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여호와(1~5절)
(1)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1절)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므레”는 예루살렘 남방, 헤브론 근교에 위치한 곳으로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이 일찍부터 정착지로 삼아 지금까지 거주해 오고 있던 지역입니다.
‘날이 뜨거울 때에’ 태양이 하늘 중앙에 치솟은 때를 가리키는데 이때 팔레스틴 거민들은 대개 식사와 함께 잠시휴식을 취합니다(창 43:16;아 1:7).
(2)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2절)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사람 셋 - 13절과 19:1에 의거할 때 이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둘은 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9: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가 이처럼 가시적(可視的)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형상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시므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뜻하는바 계시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달려나가 - 생면부지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진실 된 사랑으로 영접한 행위입니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로 굳어진 아름다운 풍습이긴 하지만,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 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자 그의 삶이 항상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줍니다.
몸을 땅에 굽혀 - 귀한 방문자에 대하여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창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할 때(창 48:12),
또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를 맞이할 때(왕하 2:15)에도 이러한 인사가 행하여졌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을 묻지도 않고 이러한 예우를 표한 것은 그의 인격이 평소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줍니다.
(3) 아브라함이 세 사람에게 지나가지 말라고 간구합니다(3절)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내 주여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에 대하여 단수인 '내 주여'(my lord))를 사용한 점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이에 의거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즉시로 깨달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① 이는 세 사람을 총칭하는 대표 단수이며
② '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남편(12절)이나 상전(24:12) 또는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의미도 함께 지닌 단어란 점
③ 아브라함이 부지중(不知中)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는 점(히13:1) 등에 의거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13:1 “[1]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2]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즉 아브라함은 이후 서서히 그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17,22절),
아직은 그들을 단순한 나그네로 알고 일반적 차원에서 존칭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2)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4절)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발을 씻으시고 - 아랍과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모래와 먼지가 덮인 거친 사막길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샌들(Sandal) 같은 간단한 신발만 신고 먼지 길을 오래 걸은 여행자들에게는 발 씻을 물이 절실히 요구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필수 관행이 되었는데 이는 손님 접대에 있어서 최상 최적의 예우였습니다.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며 식사하기에 편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도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왼팔로 몸을 바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식사법입니다(요13:23).
*요13: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4)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5절)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상쾌(사아드) - '세아드'(원조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견고케 하다'(잠 20:28), '힘있게 하다'(시 104:15), '원기를 되찾다'는 뜻입니다.
장거리 여행으로 인하여 쇠진한 기력을 힘있게 회복할 수 있게끔 쉬라는 뜻입니다.
2) 여호와의 사자들을 대접한 아브라함(6~8절)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떡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가'는 '레헴'(떡, 빵)보다 더 고급스런 빵으로 뜨거운 돌에 구운 일종의 '펜 케이크'(pan-cake)를 가리킵니다.
나무 아래 모셔 서매 - 나그네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고 '그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든 것'(공동번역)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손님에 대하여 극진한 예우를 갖추는 행동입니다.
그들이 먹으니라 - 유대 주석가 및 일부 카톨릭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그들이 단지 먹는 척 하였을 뿐 이지 실제로 먹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지지될 수 없는 해석입니다.
물론 영적 존재가 육적인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과 수행 천사가 기꺼이 음식을 드신 까닭은 마므레의 환대 사건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사건이었다는 점을 족장에게 확신시키고 동시에 아브라함과 보다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것(눅 24:41-43)과 같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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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삭의 출생을 예고함(9~15절)
1) 내년 이맘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9~10절)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사라가 어디 있느냐 - 세 나그네가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보통 여행자들이 아님을 시사해 주는 질문입니다.
즉 이들은 이미 족장의 아내인 사라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라에 대한 특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특별히 방문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가라사대 - '그'를 '그들중 한 사람'(one of them)으로, RSV는 '주'(the lord)로, 공동 번역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밝히려 하시는 것입니다.
기한(에트 하야). '시간'(에트)과 '생명'(하야)이 복합된 말로,
직역하면 '생명의 시간'입니다.
이는 '소생할 때', '해가 바뀔 때'란 의미로 만사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네게로 돌아오리니 - 하나님에게 있어 '임하다' '돌아오다' 등의 표현 (출 3:18;민 10:36;시 50:3;90:13;슥 14;5)은 그분이 어떤 사건에 직접 개입하셔서 사역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지금은 약속만을 가지고 너를 방문했지만 다음에는 약속의 실현을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다'란 뜻입니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이로 보아 아브라함 가족들의 거처인 장막은 나그네들이 앉아 쉰 나무 가까이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고대 유목민들의 장막은 대개 칸막이가 처져 있어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바깥 부분은 주로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사랑방으로 남자들이 사용하였고, 안쪽은 생활필수품과 취사도구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여자들이 내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라가 하나님의 말을 들은 곳도 바로 내실이었을 것입니다.
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1,12절)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늙었고 - 문자적 의미는 '생명의 날들이 지나갔다'인데 이는 생식 능력의 때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단어입니다.
속으로 웃고 -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적 상황이 근거해 자신의 수태 가능성을 불신한 자궤적(自潰的) 웃음입니다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 '내가 어찌 부부간의 즐거움을 가지리요'라는 뜻으로 자신의 수태 불능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질문합니다(13절)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사라가 왜 웃으며 - 낯선 여행자로서 족장 아내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9절) 그녀의 심중의 생각까지 감찰하고 있는 점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입증해 줍니다(요 21:17;히 4:13).
어떻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움남'은 '참으로', '진실로', '확실히'란 뜻입니다.
따라서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인 줄로 철저히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요! 할때 웃엇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처한 환경에서 해결 방법을 찾았습니다.
남편도, 자기도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4)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절)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능치 못할 일 - 문자적으로는 '너무 어려워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일'.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는 있을 수 없음을 역설하시면서(렘 32:27;마 19:26;눅 1:37) 사라의 불신을 불식시키는 약속을 거듭 주고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재삼 죄인에 대한 그분의 인내와 사랑의 열정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5) 사라가 웃습니다(15절)
“[15]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 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두려워서 - 자신의 속마음이 확연히 드러나 버린데 대한 두려움이자, 단순한 나그네로만 알았던 자의 권능에 대해 느끼는 놀라움입니다.
승인치 아니하여 - 자신의 잘못이나 은밀한 생각 등이 폭로될 때 당혹감 내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짓말, 변명 따위를 늘어놓는 것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에 기초한 일반적 성향입니다(3:12,13).
이러한 태도는 사라에게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는데 그녀는 말하고 있는 상대방의 정체가 하나님일 것이라는 순간적인 생각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불신이 드러난 데 따른 두려움에 못이겨 거짓말을 하고맙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더 이상의 거짓말을 용납치않는 하나님의 엄숙한 선언입니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불신앙을 거짓말로 은폐해 보려 했던 사라의 경솔하고도 어리석은 죄악을 책망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한편 이에 대하여 사라가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 것은
하나님의 책망에 온전히 굴복당하고 말았음을 나타내 줍니다.
*손님을 환대하고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은 너무나 귀하고 휼륭한 모습이었을지 몰라도, 아마도 아브람과 사라를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맛있는 음식과 쉴자리를 얻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과 신뢰의 마음을 보기 위해 찾아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여도 웃고, 찾아와 가르쳐 주어도 웃어버리고, 귀담아 듣지 아니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경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지혜롭지 못한 결정들은 분명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환경과 상황에 억매여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 하지 않는다면 이것역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삶으로 부정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하고 분별할 수 이을까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말할 때 적절한 표현 중에 ‘환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특히 조건 없는 환대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하나님 환대와 이웃 환대가 사랑입니다.
하나님 환대는 그분을 향한 신뢰, 특별히 창조의 능력에 대한 신뢰이며, 이웃 사랑은 손대접입니다.
부지중 환대. 아브라함은 100세인데도 ‘장막 문에서 뛰어 나가’(2절) 여행객을 초대합니다.
객들의 정체도 모르면서도 가장 귀한 손님 초대하여 몸과 마음이 기운을 차리도록 객들에게 성심껏 쉼과 물과 음식을 제공합니다.
객과 주인이 바뀐 듯 아브라함은 참으로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섬깁니다.
불신의 웃음.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낳을 확정적인 때를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십니다.
기다린 지 25년만입니다.
아지만 자식이 없을 때는 시기하고 불평하던 사라가 자식이 생긴다는 말에는 불신의 미소로 반응합니다.
오랜 불임과 끊어진 경주를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보다 크게 본 것입니다.
창조능력. 하나님은 불신의 웃음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라는 말로 응수하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 불임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분께는 창조의 조건일 뿐이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건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창조의 조건은 우리에게 믿음의 조건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과 이스마엘을 통해 자녀 문제를 속히 이루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한 결음씩 가르쳐주시면서 지금껏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아들’탄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Point
1)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의 나이인데도 ‘장막 문에서 뛰어 나가’(2절) 지나가는 여행객을 초대한다.
객들의 정체도 모르면서도 마치 가장 귀한 손님을 초대한 듯 몸과 마음이 기운을 차리도록 객들에게 성심껏 쉼과 물과 음식을 제공한다.
손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준비하는 듯 보인다.
사심 없이 아낌없이 배푼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참으로 이따적이고 순수하게 섬긴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감옥에 갇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내미는 내 손길과 환대를 통해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대접을 받고 계신다(마25:35).
‘눈을 들어’ 내가 먼저 청하여 섬겨야 할 지체는 누구일까?
2) 아들 탄생보다 부모 탄생이 먼저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가 낳을 확정적인 때를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신다.
아브라함은 엘리엘셀과 이스마엘을 통해 속히 이루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한 걸음씩 가르쳐주시면서 지금껏 25년을 기다리게 하셨다.
하나님께 ‘아들’탄생의 약속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해지는 것이었다.
믿음은 빠리 달리는 것도 아니고 뒷걸음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때를 사는 것이다.
3) 믿음의 온전함에는 끝이 없다
사라가 믿지 않고 웃자 하나님은 가장(家長)인 아브라함을 꾸짖으신다.
아내의 불신을 확신으로 바꿀 만큼 아브라함에게도 여호와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을 때는 시기하고 불평하던 사라가 자식이 생긴다는 말에는 불신의 미소로 반응한다.
아비 집을 떠나고 땅을 양보하고 할례를 행할 만큼 믿음이 있으면서도, 아내의 오랜 불임과 끊어진 경수를 생각하면 불신이 고개를 들곤 했던 것이다.
믿음은 약속의 tlfog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이의 성품과 인격에 의지할 때 발휘될 수 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매달리지 않으면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내 삶에는 얼마나 있는가?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3-15절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분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처럼 불신의 미소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사라에게 진정한 웃음(이삭)을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신 아들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롬 4:17)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케 될 것입니다.
또한 사라의 불임을 치유하듯이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땅, 곧 죽음이 지배하는 타락한 세상도 고치실 것입니다.
이 땅에 웃음을 잃어버린 이들이 주님의 은총으로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기를 간구합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8절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합니다(히 13:2).
그는 장막 맞은편에 서 있는 세 명의 나그네를 발견하고 영접하여 환대합니다. 가장 더운 시간대였기에 먼저 그늘을 제공하고, 다시 그들을 위해 음식을 대접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라고 권면합니다(참조. 신 10:18,19).
예수님도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마 25:35-40).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사회적 약자의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새터민의 모습으로, 결혼 이주 여성과 그 가족의 모습으로, 혹은 난민의 모습으로 다가오실 수 있습니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가 환대하며 영접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2-5절 아브라함은 환대의 바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유목사회에서는 낯선 이를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는 손수 나아가 손님을 초대합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이지만, 마치 주인을 섬기는 종처럼 절하고 발을 씻기며, 음식을 대접합니다.
그동안 나의 구제와 환대가 혹여 자기 과시나 자랑의 수단이 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시다.
11,12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웃었듯이(17:17), 사라도 믿지 못해 웃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조차 자기 경험 안에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웃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일 뿐 아니라, 약속하신 일에 대한 확신이기도 합니다.
성취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능력의 한계치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기대어 기도할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
공동체-이 땅의 나그네들을 향한 경계를 허물고, 주님의 이름으로 환대하며 섬기게 하소서.
열방-프랑스에서는 매년 100명 이상의 여성이 배우자나 동거인에게 살해당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와 사법부가 가정폭력에 엄정히 대처하여 더 이상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